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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ssis Mar 04. 2019

모니카 마론『슬픈 짐승』

이것은 사랑 소설이 아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이 책은 주로 '독일 통일'이라는 외재적 사건과 '사랑'이라는 내밀한 만남이 어우러지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간이라는 선분 위에서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라는 사건이, 공간이라는 선분 위에서는 동독과 서독이라는 평면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점의 좌표에서 구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라지고,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물든 체제의 실험 대상자로 전락합니다. 때문에 이 소설은 단순하게 '사랑소설'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진 『슬픈 짐승』의 개인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1) 체제와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편승, 그리고 2) 구원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집착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생성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1) 구성되거나 2) 파멸되거나 결국 죽음의 축으로 향할 뿐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축에서는 식육 식물, 검은 이불, 프란츠의 안경, 코르셋, 라이프헨, 유탄 파편의 아버지들, 60알의 알약과 와인, 열두 시 반, 빨간 벽돌담, 테겔공항, 자를란트 남자들의 명예욕, 찬송가와 스탈린 찬가, 2제곱미터의 묘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p.49)


 그렇지만 죽음으로 치닫는 사랑이 아닌 생성하는 사랑은 할 수 없었을까요? 소유로서의 사랑, 구원으로서의 사랑은 결국에 "...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p.120)이라는 죽음의 축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존재 양식으로서의 사랑'을 통한 생성의 축을 우리는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1억 3,500만 년 동안 생존해온 개미처럼 그들을 위한 국가의 체계화'(p.174)를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내기 위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제의 실험대상자로서 구성되는 주체가 아닌 구성하는 주체가 될 길이 있습니다. 비록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모니카 마론은 그러한 접속구로서의 통로들을 열어두고 소설을 끝냈습니다. 브라키오사우르스, 파르지팔(강아지), 플리니무디의 정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장벽도 언제나 누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붕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50마르크의 연금, <슈피겔> 지, 켐핀스키 커피 한 포트, 베를린 장벽 등을 통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내연하는 닫힌 세계 속, 보편적 욕망과 쾌락 체계'를 '외연하는 열린 세계 속, 단독적 욕망과 쾌락 체계'로 바꿔나갈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그러한 가능성을 위한 끊임없는 해석과 외연의 한걸음을 오늘도 디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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