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나만을 위한 수건을 가진다는 것
지난한 삶 속에서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 때 위로가 되는 건 의외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 늘 사용하는 수건이다.
우리나라는 행사 답례품으로 수건 주는 걸 참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기도, 귀엽기도 하다.) 주거나 받는 사람 모두 부담이 없기 때문일까? OOO환갑잔치라던가 OO배 축구대회 같은 행사 기념 문구가 찍혀있는 수건들이 그렇게 일상으로 흘러들어온다.
다 제각각의 모양새를 띤 수건들이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충분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가, 색깔이, 두께가, 모든 것이 한 뼘 모자랐다. 서랍장을 열었을 때 통일된 모양의 도톰한 수건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딱히 불편하지도 않은 걸 버리는 것도 나름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기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때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때다 싶어 가지고 있던 수건을 다 버리고 새 수건을 사들였다. 좋아하는 색깔의 도톰한 수건 10장 세트로.
그렇게 바꾼 수건의 힘은 대단했다. 단지 수건을 바꿨을 뿐인데 삶의 질이 한 뼘쯤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고, 정신적으로 지친 어느 날의 샤워 후엔 묘한 위안마저 안겨줬다. 햇빛 좋은 날 옥상에 널어 말린 수건을 차곡차곡 개서 서랍장에 일렬로 세워놓고 그것을 바라보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독신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앞으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 삶의 행보에 지친 순간에도 수건은 매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마주한 수건이 OOO 씨의 환갑을 축하하는 수건이 아니라, 앞서 말한 모든 감정을 다 끌어안은 ‘내’ 수건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나름의 위로를 주는 것이다.
분명히 예전보다는 여러모로 나아졌다는 위로. 그러니 앞으로의 나날들도 괜찮을 거라는 희망.
이 거창한 감정을 고작 수건에서 느낀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반드시 대단한 것에서만 거창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큰 슬픔과 좌절, 절망이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나를 다독이는 일은 삶의 정말 사소한 부분을 돌보는 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