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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지연

큰 병에 걸렸다가 이제 완치 판정을 받고 건강해진 친구를 만났다. 마침, 대화의 주제가 수술하던 당일로 옮겨갔다. 조심스럽게 그 순간의 마음을 물었다. 두려웠는지, 슬펐는지, 외로웠는지. 질문을 받고 그녀는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방 앞에서 기다리던 당시의 일화를 회상했다.


춥고 차가운 수술실의 침대에 누워 창백한 형광등 불빛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의 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했다. 그녀의 몸속에 달라붙은 종양에게도 사과했다고 했다. 그동안 나의 몸을 돌보지 못해서, 소홀하게 대해서 미안하다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죽음이나 수술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의 몸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고 고백했다.


다행히 수술의 경과는 좋았으며 건강을 회복했다. 암에 걸리기 이전의 그녀와 이후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소홀히 하거나, 내 몸을 망쳤던 습관과 버릇들을 버리고 내 몸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쓰고 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자신의 몸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내 몸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떠올려보았다. 내가 내 몸에게 했던 무관심과 냉대와 나쁜 습관과 내 몸을 병들게 했던 중독들. 생각해 보니, 너무나 많아서 그녀처럼 내 몸에게 진심 어린 사과가 나에게도 필요하구나 싶었다. 사과를 늦춘다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내 몸을 싫어했다. 혐오했다. 내 몸에서 못난 부분들을 찾아내어 학대했다. 아름다운 몸을 열망했으나 갖지 못한 것에 절망했다. 나이가 들자, 이 고약한 버릇은 어이없게도 젊은 날의 나와 늙은 지금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20대에도 30대에도 나는 나를 미워했다. 정확하게 내 몸을 미워했다. 그런데 50대의 내가 사진 속에 남은 20대의 나, 30대의 나는 왜 이렇게 젊은가, 아름다운가. 시기했다. 그때의 나는 왜 내게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나.


40대의 내 사진은 남은 것이 없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던 것도 같다. 그즈음의 나는 나 자신을 잔혹할 만큼 미워했다. 노화가 시작되는 나이이기도 했으며, 조기 폐경을 하게 되면서 몸의 기능들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기도 했다. 체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을까.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다.

평생에 걸쳐 나의 몸을 싫어하게 된 데는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 지속적으로 당한 가스라이팅의 영향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20대이던 1990년대 전후, 결혼 적령기는 20대 중반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십 대 중반이면 짝을 찾아 결혼하고, 서른이 되기 전에, 출산을 했다.

결혼 적령기를 지나면 여성은 팔리기 어렵다. 이십 대 후반에 이르면 노처녀라고 불린다. 심지어 ‘똥차’라고 서슴없이 지칭되기도 했다. 역혼을 무슨 금기처럼 여기던 시절이었고, 결혼 적령기를 넘긴 언니가 아직 결혼 전이면, 똥차가 빨리 비켜야 동생이 결혼을 할 것 아니냐고 재촉했다.


그러니까, 이십 대 후반을 지나, 서른을 넘기면 여자는 똥차이다. 여자의 몸은 똥으로 가득 찬

더러운 몸이다. 서른 전후의 남성에게 똥차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여성만 똥이다. 길을 막고 버티는 더러운 똥이다.

똥이었던 20대 후반의 내가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폭력.

‘첫 손님으로 안경 낀 여자가 타면 재수가 없다.’

나는 초고도 근시이다. 근시가 시작된 것은 국민학교 때였고, 안경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쓰기 시작했다. 열네 살 이후 줄곧 안경을 꼈다. 렌즈를 낄 때도 있지만,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안경을 착용했으니, 첫 손님으로 택시를 타면 재수가 없다는 바로 그 안경 낀 여자가 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도 아니고, 조선 시대도 아니고, 남자아이만 학교에 보내던 시절도 아니고, 여자아이들도 당연하게 대학에 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주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이십 대의 내가 이른 아침에, 택시를 탈 일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여성에게 폭력적인 그 말은 오랫동안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이른 아침에는 아무리 급해도 택시를 탈 수 없는 약점을 지닌 나의 몸을 나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을까.


초고도 근시이면서 똥차였던 나의 몸은 점점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회가 주변인들이 그리고 몸의 주인인 나조차 그랬으니, 언제 반짝였을까. 한 번이라도 빛이 나긴 했었을까.

지금 단조롭게 이어지는 친구의 일상은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적절한 신체 활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건강한 식재료로 밥상을 차려 자신을 대접한다. 친구로부터 들은 몸에 대한 고백을 곱씹으며 나는 너무 오랫동안 미워하느라 소홀했던 나의 몸을 챙기기로 했다. 마음 못지않게 몸 또한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유기체인데, 함부로 대하는 동안, 나의 몸은 점차 건강을 잃어갔다. 여기저기 병이 들었고, 붓고, 저리고, 몸의 내부에는 몇 가지의 염증과 몇 개의 혹이 있다. 크기는 변함없는 것도 있고, 어떤 부분에 자리 잡은 종양은 더 커지기도 해서 정기적으로 사이즈를 확인한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만성질환이 생겼거나 전단계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내버려 둔 동안, 나의 몸은 그렇게 망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콤플렉스가 단단하게 뭉쳐진 채로.


심지어 나는 손가락도 콤플렉스였다. 보통의 여자들보다 살집이 많고 굵어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약지가 17호 정도인데, 10호 이하인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면 너무 아름답다고 부러워했다. 나와 반대로 너무 얇은 둘레 때문에 맞는 반지를 찾지 못하는 손가락을 질투했다.


물론 사연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 반지를 맞출 때였다. 각자 반지 사이즈를 잰 후, 반장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내 손가락이 제일 굵었다. 17호라는 말에 모여 있던 반 친구들 모두 깜짝 놀랐다. 이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구나. 내 손가락은 뚱뚱하고 못생겼구나, 나는 내 손가락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전,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한 후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는데, 바코드를 찍던 주인이 문득 말했다. 손이 정말 예쁘네요. 그 말이 꽤 신선했고 기분 좋았다. 누군가는 예쁘다고 칭찬하기도 하는 나의 손가락을 그동안, 부끄러워하고 움츠리기에 바빴다.

나는 나의 마음과 사납게 싸웠다. 그리고 극적으로 화해했다. 나이 오십을 훌쩍 넘겨서야 나는 거칠고 뾰족한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평생에 걸쳐 형성된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할 점이라며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던져지는 무례한 조언에 무감해질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미리 방어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조언은 사양할게,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그러면 덜 상처받고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이제는 나의 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갖고 연민하고 돌보아야 한다.

사우나에 들어가면서도 안경을 착용해야 하는 나, 한때는 똥차였던 나, 폐경 이후 점점 키가 작아지는 나, 근육은 줄고 체지방은 늘어나는 나. 차가운 손과 발과 두 번의 제왕절개 수술로 길고 붉은 흉터가 있는 복부. 이것이 나의 몸이다.

건강을 위해 최근 체중을 줄이고 있는데, 목표 체중에 도달한 나도 나이고, 설령 실패를 했다고 해도 그게 나이다. 이런 나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가까워질 예정이다. 못생겼다고 한심해하지 않을 것이다.

가공식품을 줄이고 몸에 좋은 것들을 챙겨 먹이고, 푸르고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동자에게 실컷 보여주고, 내부에 있는 혹들이 더 커지지 않게, 나빠지지 않게 다독이면서. 친구가 그랬듯 나를 이루는 나의 모든 것에게 미안해하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서. 모른척하지 않고 안부를 물으면서. 이제 나는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을 공평하게 사랑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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