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살이를 오래했다. 아파트에 살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잠깐이었다. 아파트보다는 주택을 좋아하지만, 내거 살았던 주택 역시 거주하는 사람이
여럿인 공동주택이었다. 한정된 공간에 여러 가구가 생활하는 것은 편리함보다는 불편함이 더 많다. 20여년을 한 건물에 사는 동안, 이사를 들어오고 나간 사람들이 수십 명이다.
생활 패턴도 활동시간도 직업이나 나이가 각각
다른 이들과의 공동생활이 쉽지 않다.
그러니, 더 높이 솟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건
더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더 다양한 종류의
조심할 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은 내게
거의 공포이다. 내막이야 자세히 모르지만, 다툼을 넘어 시람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까지 왕왕 있다.
얼마전에는 끓는 기름을 끼얹었다는 끔찍한 기사를 접하기도 했다.
층간소음뿐 아니라, 누수나 흡연 등으로 인한 문제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부동산 자산으로서의 가치, 생활의 편리성을 생각해 보아도 역시 나는 아직 주택이 좋다.
정확히는 한 건물을 공유하는 이웃이 전혀 없는 단독 주택을 좋아한다.
너무 크지 않은, 키 작은 꽃나무 몇 개를 심고,
해마다 일년초 꽃씨를 한 주먹 흩뿌려서 꽃을
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
윗층에서 나는 식탁 의자 끄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고 아랫층을 신경쓰느라 실내화를 잊지 않고
챙기며 살지 않아도 되고.
서울의 평균 땅값을 생각한다면 그저 꿈인 것을 알지만, 그런 소형 단독주택은 재산으로서의 가치 역시 떨어지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누군가는 핀잔을 줄 수 있지만
꿈 꾸는 건 자유이니까.
내가 꿈 꾸는 집은 작은 평수의 구옥 단독주택이다.
이제는 좀 오래 가주할 집이 필요해서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 들른 부동산에서 역시 서울에서
마당있는 단독주택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체감하고 나와야 했다.
동생은 수도권을 알아보라고 하지만, 나는 서울 '특별시민'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으니 재산의 가치나 편리함을 포기하고 내 재정상태에서 적당한
거주지를 구해야할 것이다. 아쉽지만 단독주택에 살아볼 기회는 이제 더는 없을 것이다.
노년기를 보내야할 거주지로 단독주택, 심지어
구옥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문제를 끊임없이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 동반된다. 사람처럼 집도 나이가 들수록 여기저기 고장이 났는데, 나는 억척스럽게 집 관리를 하며 살았다. 전문가가 필요한 경우 이외의 잔고장은 직접 해결했다. 전등 본체 교체나 보일러 배관을 녹이는 일은 통달해서 당근에 구인글이 올라온다면 지금도 달려갈 수 있다. 한파에 언 보일러 배관도 30분 이내에 뻥 뚫을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아줌마 해결사 필요하신 분 연락하시라.
솔직하게는 점점 나이가 들며 나이 든 집을 살피는 일에서는 손을 놓고 싶다. 그러니 꽃씨를 뿌릴 마당은 포기하는 것이 맞다. 노년기의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노동이 필요한 공간을 천천히 찾아볼 예정이다.
그럼에도 이사할 집에는 식물들이 햇볕과 바람과 비를 실컷 맞을 수 있는 발코니는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식물과 더불어 나 또한 내 집에서 햇볕과 바람과 비를 즐기고 싶다. 넓은 거실보다 넓은 발코니가 있는 집을 발견한다면 바로 계약힐 것 같다.
시간이 흐른 후의 나는 혼자 지내게 될 가능성이 많다. 주위에서 1인 가구의 걱정에 대해 듣다 보면,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이 공통적으로 있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아, 오랜 기간 방치되는 상황을 떠올리면 충분히 공포스럽다. 몇 일 또는 몇 달만에 발견되는 고독사에 대해서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렇지만 고독사가 두려워서 노년기에 혼자 살기를 포기해야 할까.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독거 중인 이들은 항상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을 이고 살아야 할까.
현실적으로 혼자 살면서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과 매일 안부를 주고 받으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의 삶이 바쁘고 나조차도 원가족들과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이 아니다. 편한 친구와도 일년에 한 두번쯤 연락을 하는 내가 늙는다고 지금보다 더 자주 안부를 물을 일은 없을테지. 때로는 자녀들이 내 주거지와 먼 곳에 거주하게 될 수도 있다. 쉽게 오갈 수 없는 외국에서 살게 된다면 어쩌면 죽기 전에 열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함께 늙어가는 배우자가 있는 경우라도 나중에 둘 중 한 명은 독거 노인이 될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녀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매일 안부를 물어오거나 직접 간병을 하는 경우는 희박할 것이다. 그래서 늙고 병든 우리의 미래는 요양원 또는 요양병원이다.
그런데 요양원 또는 요양병원에서 근무했던 친구의 경험을 들으면, 그곳의 노인들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반복적이고 무료한 일들로 채우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창밖의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자연의 변화도 그들의 얼굴에 즐거움이나 웃음을 주지 못한다. 그렇게 일 년, 그렇게 십 년 또는 그 이상을 그곳에서 지내며 삶에 대한 의욕은 이미 오래전 상실된 채 오직 죽음만을 기다린다. 죽고 싶은데 죽는 것도 어렵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우울과 무기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서 나의 노년기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입소하면 죽은 후에나 나올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 애정하는 사물들을 모조리 폐기하고 최소한의 짐을 챙겨 낯선 이들과 공용 공간에서 지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내 공간에서 늙어가고 싶다. 아프고 불편해지더라도 어쨌든 내 집에서 아프다가 죽고 싶다.
그래서 나는 노년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공동주택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노인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공기 좋고 경치 좋지만, 교통편이 불편하고 대중교통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외딴 곳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년기에도 풍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며 살면 좋겠다.
물론 도시에 있는 실버 주거단지도 있다. 그런데 누구나 선뜻 선택하기엔 문턱이 높다. 노인 빈곤율 1위인 우리나라에서 수억원의 보증금을 지불하고 입주할 수 있는 노인은 상위 몇 퍼센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보통의 노인들이 거주할 공동주택이 필요할 것이다. 각자의 독립되고 사적인 주거 공간에서 지금까지 그랬듯이 계속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내게 애틋한 어떤 것들도 버릴 필요가 없다.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 해낼 것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개인의 일상을 살며 커뮤니티 공간이 있어서 다른 이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것도 좋겠다.
어느 시기가 되면 당연히 돌봄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럴 때면 나라의 복지 혜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서비스를 요청하면 된다. 내 집에서 노인에게 특화된 서비스를 받으며 지낸다면
무기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공동주택에서 지낸다면 적어도 죽은 내가 일주일 이상 방치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여전히 나는 앞으로 살 집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렇지만 점점 더 어떤 것은 포기하고 어떤 것은 선택할지에 대한 생각은 구체화되고 있다. 새로운 집에서 내 삶을 즐기다가 언젠가 내가 꿈꾸는 역세권이면서 병원권인 실버공동주택이 나온다면 나의 마지막 집으로 결정하고 바로 청약을 신청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