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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나는 혼자였고 심심했고 그래도 좋았다

by 함지연

혼자 속초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계획이 미리 있었던 것은 아니고 웹 서핑 중, 할인된 가격에 적당한 숙소가 나왔길래 예약부터 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도 가깝고, 속초 해변을 도보로 이용할 수 있다. 근처에 대형마트도 있어 편리했다.

숙소 할인 덕분에 갑자기 갖게 된 혼자만의 시간. 굳이 3시간여의 시간을 들여서 찾아간 혼자만의 공간. 속초에 가서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딱히 한 일이 없었다고 할 것이고, 혼자서 여행을 다니면 심심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저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이 간절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영랑호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 예정이다. 호숫가에 있는 장작불로 구운 고구마를 사 먹고 저녁 끼니를 사러 중앙시장까지 들렀다가 늦지 않게 숙소로 들어갈 예정이다. 지방 도시는 밤이 금방 내린다. 더군다나 해수욕장이 폐장했고, 평일이라면 식당들마저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다음날은 체크아웃 시간까지 실컷 자고 외옹치해수욕장까지 걸어가서 칼국수를 먹고 해변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바다를 실컷 볼 것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릴 때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다. 하늘도 바다도 회색빛이었고 기온은 선선했다. 도무지 개일 것 같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할 예정이었던 계획이 날씨 때문에 취소되었다. 순두부를 먹고 중앙시장까지 걸었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싹싹 비웠더니 과식을 했나 보다. 청초호를 따라 한참을 걸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시장을 둘러보니 먹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름지고 양이 많은 음식을 사면 다 먹지 못하고 남겨 곤란해질 것 같았다. 결국 식혜 한 병만 사서 숙소로 향했다.

여전히 낮이었는데, 체크인을 하고 계속 숙소에서 뒹굴었다. 비가 오는 날, 호수도 바다도 걷기에는 불편할 것 같았다.

먹을 것을 사러 호텔 근처의 대형마트에 잠깐 다녀온 것 외에는 줄곧 숙소에 있었다. 창가를 마주 보도록 의자를 놓고 앉아서 창밖 풍경을 한참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가를 반복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습관처럼 챙기는 준비물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읽을거리를 챙기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챙겨가도 한두 장 정도 겨우 읽을 정도로 집중이 되지 않아서 책 대신 주로 그림 그릴 도구를 챙긴다. 이번에는 아이패드를 가져왔다. 그림을 그려야지, 생각하고 아이패드의 전원을 켰는데, 그림판에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본체만 완충하고 펜슬은 충전하지 않았던 것. 결국 가방만 무거웠고,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다음날, 체크아웃 시간까지 나는 쭉 심심했다. 읽을 책도 없고 아이패드 펜슬은 사용할 수 없고 TV를 켰다가 시끄럽기만 해서 금방 꺼버렸다. 노래도 사람의 목소리도 없는 공간에서 나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감각만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심한 채로 침대에 누웠다가 아침까지 푹 잤다. 복잡한 생각도 소란스러운 꿈도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자기 전에 검색했던 일기예보는 다음 날도 흐리다고 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거짓말처럼 하늘은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오늘은 뭘 하지. 잠은 깼지만 침대에 누운 채로 궁리했다.

자전거를 꼭 타고 싶었지만, 영랑호와 해변, 그리고 카페까지 가기엔 바쁠 것 같았다. 미션을 수행하듯 시간에 쫓기며 여행을 할 일인가. 나는 심심한 김에 심심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30분쯤 걸어서 얼큰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전에 동생과 맛있게 먹었던 식당인데, 리모델링을 깔끔하게 했고, 맛은 여전했다. 평일이라 한산한가 보다 했는데, 내가 다 먹고 계산을 할 즈음 식당 안은 빈자리 없이 꽉 찼다. 다들 누군가와 함께였다. 손님의 대부분은 젊은 연인들이었다. 나만 혼자였다. 그래도 씩씩하게 국수를 후루룩 후루룩 맛있게 먹었다. 다정한 연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지만, 혼자인 것도 좋았다. 식당 문을 나서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해를 피할 수 있는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양산은 펼친 다음, 바다를 실컷 바라보았다. 할 일은 그저 일렁이는 바닷물을 눈에 담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어린 남매가 내 근처에 장난감을 쏟아놓고 모래놀이를 시작했다. 그 모습이 평화로워서 안 보는 척하면서 계속 보았다. 남동생은 유난히 찡찡거렸는데, 아마도 낮잠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어린이를 본 지가 오래여서인지. 우는 아이마저 귀엽고 예뻐 보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출발 시간까지 나는 계속 해변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심심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편안할까. 왜 잠도 푹 잤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결과물도 없는데 왜 불안하지 않았을까.

어쩐지 너무 오랫동안, 심심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온전히 혼자였던 시간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집에서 뛰쳐나와 혼자 심심할 시간과 공간이 간절했던 것 같다.

속초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마주한 동해 바다는 잿빛이었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며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바다의 색은 파랗고 깊고 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2025년 가을, 속초에서 나는 혼자였고 심심했고 그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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