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만났던 베로니카는 성당에 봉사를 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는 성당에 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가볍게 덧붙였다.
내 기도도 해줘요.
그러자 베로니카는 어떤 기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가볍게 했던 말에 진지하게 반문하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 제목을 얘기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막상 떠오른 것은 그런 피상적이고 진부한 내용이다.
그날 밤, 베로니카에게서 카톡이 왔다. 이미지도 함께 전송되었는데, 그건 여러 개의 촛불이었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 연두색의 초가 내 초라고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촛불을 켜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내가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색과 가장 가까운 연두색 초를 골랐다. 베로니카는 기도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템플스테이를 몇 차례 참가하기도 하고 교회에 다닌 시기도 있지만, 현재의 내게는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종교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이지는 않다. 독실한 신자를 보면 그들의 순전한 믿음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한다. 의심이 많은 내게 무조건적인 믿음이나 사랑은 여전히 쉽지 않다.
종교를 누군가의 권유나 설득에 의해 갖고 싶지도 않다. 그런 눈치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상대방을 경계한다. 나는 나와 무관한 타인에게 대체로 상냥하고 친절한 편인데, 길에서 마주치는 도믿걸이나 도믿남을 만나면 분노가 치민다. 믿음까지 강요당하고 싶지는 않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친구의 계속된 전도에 부담스러워지자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냥 기도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그 이후, 친구와의 관계가 편안해졌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친구의 기도는 여전히 고맙고 감사하다. 나를 생각하고 내 평안을 위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해 주는 마음이 당연히 고맙다.
베로니카가 밝힌 연두색 촛불은 그날 밤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이미지로 전송되었을 뿐인데,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는 작은 불의 온기가 전달되었다.
나는 이렇게 고독하고 슬픈데, 이렇게 날 위해 기도를 하는 어떤 마음이 있구나. 나는 혼자인 것 같은데, 어딘가에 이런 다정한 마음들이 함께 있구나.
베로니카는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이다. 알다가 가까워진 건 더 최근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사이이다. 편해서 스스럼이 없는 사이도 아니고, 언니 동생하자고 했지만, 아직 말을 편하게 놓지 못하는 사이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도 충분히 따듯했다.
베로니카의 기도는 오래전, 내게 당도했던 한 사람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를 오기 전, 살았던 주택은 여러 가구가 살던 공동건물이었고, 그곳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분리하고 배출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커다란 비닐에 모아 묶어서 지정된 요일에 건물 앞에 두곤 했는데, 폐지를 모으는 어르신들이 골목을 오가며 집 앞에 내놓은 비닐봉지를 뒤져 필요한 재활용품을 꺼내 가곤 했다. 특히 유리병과 알루미늄캔이 돈으로 바꾸기 좋은 품목이었던 것 같다. 쓰레기 더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혼합된 재활용 쓰레기를 헤집는 모습이 영 보기 불편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할 때마다 빈병과 캔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리어카를 끌고 집 앞을 지나는 어르신들을 보면 챙겨둔 병과 캔을 드렸다. 재활용품이 꽤 쌓였던 어느 날 외출을 하려고 나서던 순간, 집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어르신, 빈 병 모아놓은 게 있는데 가져가실래요?
할머니는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숨을 고르며 집으로 도로 들어가는 나를 기다리셨다. 빈 병을 가져와 수레에 얹은 다음, 알루미늄 캔도 있으니 잠깐 기다리시라 했다. 빈 병과 알루미늄 캔을 다 실은 후 할머니는 여러 차례 고맙다고 하셨다. 그걸 고물상에 가져가서 팔면 몇 천 원이나 될까. 고맙다며 웃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민망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떠나기 전에 아이의 이름을 물으셨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왜 그러시냐 했더니 교회에 다니는데, 가서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알려드렸다. 그 순간의 나는 의심도 주저함도 없었나 보다.
그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할머니는 고물상에 들렀다가 저녁엔 교회에 갈 거라고 하셨다. 잊지 않고 아이를 위한 기도를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달라고 빌어주신다 하셨다. 정말 내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하셨을까. 더는 만난 일이 없으니 물을 수도 없지만 어쩐지 약속대로 기도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 순간이 떠오른다. 십여 분이나 되었을까. 긴 시간 지속된 나의 삶에서 아주 잠깐 스쳐 간 한 사람과의 인연.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무탈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건 어쩌면 그때 그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 아닐까. 어린아이였던 아들이 자라 성인이 되도록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던 건, 나의 애정이나 노력뿐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며 건강하게 잘 자라라고 기도해 준 할머니 덕분이 아니었을까. 아들 때문에 애를 끓이다가 휴, 다행이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할 때마다 고작 빈 병 몇 개의 마음을 기도로 돌려준 할머니의 마음이 생각난다.
그러니 언젠가의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어쩌면 베로니카가 켠 노란 촛불을 함께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행복한 건, 베로니카의 기도 덕분인가 보다 생각할 것 같다. 때때로 내게는 먼 곳에서 당신들의 마음이 당도한다. 그것은 마치 우연히 내 손에 얹힌 뜻밖의 선물 같다. 그 다정한 마음들이 모여 나를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