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 온 친구가,
"요즘 뭐 하고 지내?"
하고 물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13주 차 강의라 꽤 오래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친구가 다시 무엇을 배우느냐 묻는데,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왜냐하면 수강 신청을 한 나조차 이제 13주나 매주 목요일마다 3시간 강의를 듣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는 건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일과 시간만 보고 세부 내용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덜컥 수강 신청부터 했기 때문에 무엇을 배우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건 더욱더 곤란하다. 궁금해하는 친구에게 결국 실토했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기다려봐. 첫 수업에 다녀온 다음에 제대로 설명해 줄게."
첫 수업은 6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었고, 종강은 9월 셋째 주였다. 수업 시간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3시간 연강이었는데 해가 머리꼭대기에 있을 시간이라, 극한의 더위를 견디며 출석했다. 그리고 수업 과정과 변화, 그리고 수업 중에 찍은 사진을 담은 액자를 전시하는 전시회로 마무리되었다.
초복과 중복, 말복을 지나 저녁에 귀뚜라미가 우는 추분 무렵에야 끝이 난 수업에서 내가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화장과 사진이다. 그러니까 화장을 잘하는 방법, 그리고 사진을 잘 찍는 방법. 구체적으로는 50대 중년 여성에게 어울리는 화장의 기술과 사진 찍히기를 어색해하는 우리에게 좀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서 내일보다 젊은 오늘의 내 모습을 남기는 것.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지원사업으로 수업료는 무료, 재료비도 없다. 성동구에 위치한 교육센터에서 진행된 수업이라 성동구민 우대 조건이 있었는데, 광진구민이면서 아슬아슬하게 합류했고, 중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고 수강 신청이 확정되었다.
수업은 출산과 육아, 경력단절로 자존감을 잃은 중년 여성들이 화장과 사진을 통해 나를 회복하고, 다시 세상과도 연결되는 프로젝트이다. 대상은 50대 여성으로 제한된다.
수업의 제목은 매일이 리즈.
주제는 중년 여성의 자존감 회복.
그리고 그 방법이 화장과 사진이다.
그동안,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단순히 화장하는 법과 셀카 찍는 방법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었는데 수업이 다 끝나고 난 뒤에야 정리가 된다.
첫 시간은 자기소개로 시작된다. ㅁ자로 배치된 책상에 마주 보고 앉은, 오늘 처음 만난 또래의 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진행형인 힘듦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누군가는 이야기 도중에 감정이 격앙되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모집 인원은 스무 명이었는데, 첫 번째 시간에서 부담을 느끼고 하차한 수강생이 세 명.
우리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다른 도시에서 오래 살았던 이도 있다. 전업주부도 있고 이제 막 퇴직한 취업주부도 있었다. 비슷한 연령대라는 것 말고는 공통점도 없고 처음 보는 사이이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듣는 순간, 어쩜 우리는 이렇게 비슷한가, 놀라웠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허둥거리며 살았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이제 돌봄 노동에서 해방인가 싶은데, 부모님이 아프기 시작한다. 배우자의 부모까지 모두 네 명. 차례차례, 또는 한꺼번에 병환이 들고 입퇴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적절한 돌봄 노동자로 간택된다. 딸이니까 며느리니까 돌봄 노동에 익숙하니까 시간이 여유로우니까. 말하자면 여자이기 때문에.
성인이 된 자녀들 역시 버겁다. 경제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자녀와 함께 지내는 것은 여전히 가사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자기 방도 치우지 않는 자녀, 사과도 깎아 먹지 못하는 자녀, 통장에 돈이 모이기가 무섭게 써 버리는 자녀. 똑같은 반찬을 두 번 이상 먹지 않는 자녀.
설상가상 배우자의 은퇴가 시작된다. 삼식이 또는 오식이로 불리는 배우자와 집을 나눠 써야 한다. 그동안은 잠깐이긴 해도 낮 동안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던 집이 갑자기 좁아지며 숨이 막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동시다발적으로 아프기 시작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무릎과 허리와 어깨가 쑤신다. 폐경기를 지나며 배가 나오고 살은 빠지지 않고 피부는 탄력을 잃는다. 불면증과 우울이 닥친다. 내 모습이 나조차 밉고 마음에 들지 않으니, 휴대폰에는 온통 꽃 사진뿐이다. 급하게 사진이 필요해서 아무리 사진첩을 샅샅이 뒤져도 혼자 찍은 내 사진은 없다. 간혹 있더라도 뒷모습, 간혹 있더라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예쁘지 않은 나.
처음 만나는 우리의 이야기 속에는 그런 애환이 담겨있다. 나는 늙고 나는 여전히 없는데, 돌봄 노동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돌봄 노동을 시작해야 하는 슬픔.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 밥 차리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자녀가 다 성장하고 나니 은퇴 후, 집돌이가 된 배우자의 밥상을 하루에 세 번, 또는 다섯 번을 차려야 하는 고달픔. 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공감하며 들었다. 형제들이 모두 여의치 않아 아픈 친정엄마의 돌봄을 전담하는 누구는 고달픔을 털어놓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누구는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그 마음들을 알기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수업은 화장과 사진을 번갈아 배우며 진행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맞는 화장과 액세서리 착용하는 방법, 기초제품과 색조화장품을 바르는 순서. 스파츌러나 브러시의 사용법 등을 익히고 사진을 배우는 시간에는 구도와 각도, 조명 등을 배운 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13번을 배웠다고 우리가 드라마틱하게 변화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은 변화했다. 생전 처음 눈썹 손질을 했다는 누구는 눈썹만 정리했을 뿐인데 훨씬 예뻐 보였다. 블러셔를 한 누구는 피부가 화사해 보였다. 활짝 웃는 모습이 찍힌 누구는 아름다웠다. 화장을 배우며 처음 시도하는 종류의 색조 화장품을 사기 위해 누구는 수업이 끝난 뒤 올리브영으로 갔고, 누구는 인터넷에서 최저가를 검색했다. 평소에 전혀 화장을 하지 않거나, 화장 시간이 길어야 5분이라던 여자들은 거울 앞에 좀 더 긴 시간 앉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열세 번의 만남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변화를 선물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3시간의 이론과 실습을 함께 하며 서로에게 예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예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나는 나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했나. 미워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누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얼굴을 감추기 바쁘다. 휴대폰을 만지다 실수로 셀카 모드로 바뀌며 화면 가득 내 얼굴이 보이면 화들짝 놀란다. 에구. 참 못생기고 늙었네.
지금 내 사진첩 속에는 내 사진이 굉장히 많다. 수업 시간에 돌아가며 모델이 되고 사진을 찍어주던 순간들.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가 점점 친숙해진 그녀들과 서로 칭찬을 해주고 장난을 치며 프레임에 담았던 자연스러운 장면들. 햇빛 아래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온화한 빛 아래에서 반사되는 빛 아래에서 참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중에서 가장 예쁜 사진을 함께 골라주었다.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고 즐기면서 나 자신은 못났다고 비하하며 살았다. 남이 나를 다정하게 봐주기를 원하면서 나는 나에게 다정하지 못하고 돌보지 않았다. 나를 찾겠다고 나로 살겠다고 분투했던 나날들 속에서 내면의 성장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외면은 내버려 두었다.
화장을 배우고 카메라 앞에서 좀 더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반복해서 연습하는 동안. 놀랍도록 유쾌했고 즐거웠다.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남이 보는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미 나를 알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면일 것이다. 수업에서 나는 리더십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으며 입담 또는 유머를 담당했다.
유독 나를 그렇게 봐주었던 한 여자는 시부모와 시누이까지 있는 대가족의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였다. 가족을 위해 30년을 헌신한 그녀는 내가 쏟아내는 이야기를 집중하고 들었는데,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니 괜히 미안해진다. 순진한 그녀를 물 흐려 놓은 건 아니겠지. 설마 나처럼 집을 뛰쳐나오지는 않겠지. 나는 내일도 그녀를 만날 건데(종강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몇 명의 친구가 생겼다), 수위 조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내면이 더 중요하고 외모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가. 내면과 외모 모두 한 개인을 이루는 부분인데 내면에 비해 외모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평가되었다. 보수적인 사회에서 기혼 여자, 나이 든 기혼 여자는 외모 가꾸기보다 가정을 가구는 일에 더욱 힘쓰기를 요구했다. 자녀를 위해서는 지갑을 열지만, 나를 위해서는 선뜻 돈을 지불하지 못한다. 자녀에게는 아이폰을 사주고 자신은 보급폰을 고른다. 긴 여정이 끝나고 마지막 시간에 소감을 나누었다. 누군가 새로 산 최신형 휴대폰을 들어 자랑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쓴 돈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라고, 역시 비싼 것이 좋더라며 고백하자, 우리는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겉과 속은 똑같이 중요하다. 나의 내면을 가꾸는 일 못지않게 외모를 가꾸고 돌보는 일 역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기 위한 공부와 더불어 나의 외면을 성장시키기 위한 배움 역시 놓치지 않고 꾸준히 할 것. 꿈도 소중하고 꿈을 담은 그릇도 소중하니, 그 그릇을 반질반질 닦을 것. 화장과 사진 수업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바로 균형 잡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