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청기도 빼고 쓰고 있던 캡모자도 벗고 나무 데크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기댄다. 코 끝부터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의 촉감, 흩날리는 꽃잎의 향연들, 은은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의지해본다. 비록 행인들이 왔다 갔다 하지만 이곳이 적적한 집에서 혼자 우울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잠깐 모자를 가리개 삼아 누워보기도 한다. 데크 의자가 딱딱해서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자세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잠시나마 광합성을 하면서 힐링하고자 하는 것일 뿐. "충분하도다. 감사하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때처럼 불안했던 마음들이 사르르 녹는다.
햇살의 따스한 기운이 나를 감싸 안을 때, 내가 지금 안전한 공간에 있구나. 지금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구나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토닥인다. 명상을 따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숨-날숨을 호흡이 안정적으로 잡힌다.
동면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면 될까. 어둠 속에서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한줄기의 햇빛을 쬠으로써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기지개를 켜면서 햇살을 마음껏 만끽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면 마치 암막커튼을 치고 깜깜한 어두운 상태와 같아서 이렇게 따스한 햇빛을 받고 있으면 내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이 비로소 체감된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내가 온전히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요즘처럼 수시로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서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게 쉽지 않다. 티 없이 맑은 하늘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마스크를 벗고 온전히 공기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의 날씨는 감정기복이 심한 나의 상태처럼 흐리거나 혹은 미세먼지를 동반한 따뜻한 날을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하루하루 체감하고 있다.
그래도 풍경을 보고 있자면 새삼 신록의 계절, 봄이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다. 푸릇푸릇한 나무들과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린다. 초록초록한 색이 주는 안정감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어느샌가부터 공원에서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휴식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면서 따로 시간을 내야 할 수 있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은 운동보다는 가볍게 조깅을 한다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자연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외부 자극으로 예민해져 있던 내 감각신경들이 누그러진다. 마음의 짐들을 잠시나마 덜어냄으로써 다시 새로운 것들을 채울 준비를 한다. 그렇게 다시 일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고 오늘도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본다.
마스크를 벗고 돌아다닐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그 볕 아래 쭈그리고 앉아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 그 옆에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등을 맞대고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낯가림의 재능>, 김상민
길게 늘어지는 햇살, 온몸을 감싸 안는 시원한 강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찰나에 마주치는 사람들과 날벌레, 그리고 저마다 웃음과 여유를 머금은 기분 좋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에너지는 행복이란 감정을 이미지화하면 이렇겠구나 싶다.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달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열심히 눈에 담는다.
넉넉한 한강의 품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면서 또 한 주 반복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광합성을 한다.
<아무튼 계속>, 김교석
(···) 엄마가 그랬다. 사람도 식물과 같아서 햇볕을 쬐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잘 자란다고, 사람도 식물과 같아서 해가 길고 비가 많은 여름에 쑥쑥 자라고, 겨울에는 자주 콜록거리고 꽁꽁 여민다고.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밝고 따뜻한 빛이 중요해."
저녁 무렵 산책을 나섰다가 밤을 만났다. 빛이 사라진 거리에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광합성을 마친 식물처럼 조용히 숨을 골랐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고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