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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Sep 12. 2023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초판본 구매에 동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운 질서, 그리고 마음

얼마전 새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덕분에 샤블리 사진을 찾아 보았다. 책에서 주인공은 직접 만든 오징어와 버섯을 넣은 스파게티에 냉장고에 둔 샤블리를 곁들인다. 내가 샤블리를 마셨던 날은 3년여전인데, 그때도 마침 9월이었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풍경이 '9월의 샤블리'라는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불러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산 건 이번이 처음인데, 십대 후반의 소년 소녀가 편지를 주고 받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 부터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몇몇 에세이와 <1Q84> 외에 내가 푹 빠져들어서 읽었던 하루키의 책은 <상실의 시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 세권 뿐이다. 공교롭게도 세권 모두 십대 후반의 나이로부터 약 20여년이 지나 성인이 된 주인공들이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십대 시절(열일곱살) 내성적인 남자, 그 시절 친밀했던 소녀가 갑자기 사라지는 기억을 갖게 된 남자, 그 '사라진 소녀'의 기억에  사로잡혀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기어이 그 기억을 따라 모험을 떠나는 남자. 이 남자는 대체로 주변을 잘 정돈하고, 요리를 쉽게 하고, 음악에 조예가 깊고, 사람들의 옷차림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커피와 위스키를 즐긴다. 특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하루키 월드를 집대성 한듯-십대 소년 소녀, 더플 코트나 울 스커트, 위스키, 커피와 빵, 비틀스(!!), 재즈 혹은 클래식, 백퍼센트, 스파게티 등- 하루키 소설의 키워드들이 계속 나와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그 자체로는 사소한 것들을 무작위로 모아 놓은 것이다." 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하루키 월드에서 저렇게 무작위로 나타나는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운 질서를 경험하고 나면, 일상의 작은 행위들이 특별하거나 의식처럼 여겨진다.

자기 복제라고도 폄하되는 하루키의 일관적인 세계관에 대해, 하루키가 노년이 되어서도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밖에 없는 그 우물, 그 무의식에 대해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서른 중반에 이르러, 십대 시절의 기억과 '사라진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니까. 그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느 시점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십여년전의 기억을 소환한다. 왜 그 즈음일까. 주어진 대로 수행해야 했던 삶의 성장 단계에서 벗어나 조금 더 주도적이 될 수 있는 한편 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나이여서 그런걸까.  그 나이 즈음 밀려오는 십대 후반의 기억들은 갑작스럽고 강렬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사라진 소녀', 그리고 함께했던 책, 음악, 음식, 주변인들은 그들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존재들이기에 당황스러움은 잠시, 그들은 이를 계기로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 가게 된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그들처럼 죽을 때까지 오로지 '그때로만' 돌아가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 반복은 그저 ‘되감기’가 아니라 ‘되새기기’에 가깝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려는 다짐 같은. ​


하루키 소설에서 주인공의 기억 속  '사라진 소녀'는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무언가에 사로 잡히는건 꼭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사물, 취향, 일, 꿈 등 모든게 가능 하지 않을까. 비록 돌아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상실의 시대>)를 되뇌이게 될지라도, 무언가를 좇아서 모험을 떠났던 (원래는 소심했던) 주인공들의 모습에 어쩐지 용기를 얻게 된다. 하루키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의미"라고 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주인공은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주인공은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다. 아마도."라고 말한다. 칠십대가 된 하루키의 소설을 이번에 만나고, 그동안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 주인공들의 마지막 말들을 모아서 읽어 보면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하루키는 언제나 “그러니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계속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해왔다는 것을.​


샤블리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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