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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ykwariat Oct 03. 2023

해시태그를 통해 발견하는 독서 대가족

좋아하는 작가와 책으로 형성된 공동체



얼마전 아이의 예전 일기장에서 "아~ 책냄새 참 좋구나~ 나에게 에너지를 줘~"라고 쓴 글을 발견했는데, (그 아이가 사춘기 이후로는 책을 멀리하지만 ㅠㅠ) 마침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에서 책에 관한 너무나 사랑스러운 글을 발견했다. <패배의 신호>를 너무 재밌게 읽은 후로 사강의 글을 조금씩 찾아 읽는데,  <리틀 블랙 드레스>도 책장에서 꺼내 두었다. 새것인줄 알았는데 이미 밑줄이 여러군데 있었다. 이번에 책 정리하면서 그렇게 많은 양의 책에 밑줄이나 접한 부분이 다 있는걸 보니 책을 그냥 사기만 한게 아니었던걸 확인하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그 부분 때문에 가격이 더 낮게 책정 되어 책이 대체로 깨끗해도 다 '중급'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어떻게든 책이 내 안에 남아 있을거라 믿으며. 그리고 설사 남지 않더라도 그 순간 매번 발견했고, 즐거웠으니 괜찮다. 무자비한 책정리에서 살아 남은 책들은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의미 있는, 내가 오롯이 하나 하나 고른 책이었다. 그리고 사강의 <리틀 블랙 드레스>를 이참에 다시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너무 발랄하고 사랑스럽고 몰랐으면 아쉬웠을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사강의 에세이 모음집 <리틀 블랙 드레스>에서는  사강의 패션과 예술에 대해 섬세한 취향을 엿볼 수 있는데,  그녀의 소설을 보면서 특정 옷 브랜드 등이 나오고 주인공이 그에 집착하는 것을 보며 이미 짐작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사강이 먼저 추구한 스타일이겠지만, 특정한 취향에 매니악한 부분을 글에 잘 녹여 내는 것이 하루키 생각도 나는...) 얼마전 김중혁 작가님이 비틀스의 광팬인 소녀가 나오는 그래픽 노블 <어디에도 없는 소녀>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숭배하고 덕질한다는 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시간이 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바꾸는지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소개했는데, 사강의 <리틀 블랙 드레스 - 정말 좋은 책에 대하여 - 독서대가족>은 사강이 책을 숭배하고 덕질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아이가 일기에서 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책냄새가 나에게 에너지를 줘'라고 한마디로 압축했다면, 사강은 책에서 위안을 얻고, 흥분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고, 덜 심심하며, 살았다! 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녀는 같은 작가의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을 모두 '독서 대가족' 이라고 부른다. 요즘 나는 독서 대가족들을 좋아하는 출판사 계정의 댓글이나 해시태그를 통해 발견한다. 좋아하는 작가와 책으로 형성된, 멀리 있어도 연결되고, 보이지 않아도 연결되는 공동체. 나는 어느 작가를 숭배하고 덕질할까? 내 인생에서 소중하고 나를 많이 바꾼…에너지를 주는 사람, 역시 프루스트가 아닐까.


​날씨가 추워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대신 평온한 긴긴 낮이 다가올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내가 즐겨 읽는 작가의 책이 한 권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여행 중이며, 더없이 멋진 전경을 앞에 두고 풍경은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있다. 책에다 코를 박고 있기 때 문이다. 아니면 새벽 네시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이른 새벽의 아무런 색도 느껴지지 않는 무색의 고요함과 정적을 뚫고 가만히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우리만이 마치 죽은 듯한 이 도시에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 같다.


나를 포함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매일 복용하는 약물을 빼앗으면 왜 그토록 무기력하고 불안해 하는 걸까.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처럼 불안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묵독은 일종의 평온한 편집증이자 화롯가에 둘러앉아 한가롭게 주고받는 이야기에 익숙해진 습관 같은 것이다. (...) 책을 펼치자 한 사람이 내게 최선을 다해 분명하고 뚜렷한 어조로 말을 건넨다. 모든 이야기가 내 가슴에 와닿는 것들이다. 생과사, 고독, 사랑, 두려움,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나한테는, 나와 스탕달이나 러시아 문학 또는 피츠제럴드나 아폴리네르를 '함께 나누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우리 집안 사람들이면서 그러한 감상적인 독서 대가족의 일원인 것이다. 따스한 유년기 이후와 사춘기의 육체와 정신의 눈부신 발견 이전이, 어쩌면 인생이 당신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하얀 페이지 위에 까만 필치로 담담하게 줄 서 있는 이 수 킬로미터의 피부와 혈관과 신경 들, 예상치 못하게 피어난 꽃들이 의기양양하게 스러져 가는 그런 관들이, 바로 책이며 '타인들'인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리틀 블랙 드레스 - 정말 좋은 책에

대하여 - 독서 대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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