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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Jul 14. 2023

교실 이야기

뒤틀린 통지표

 한 학기가 저물어 간다. 곡식은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게 보통이지만 학교는 수시로 수확을 한다. 몇 달에 한 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오늘 한 시간 안에도 여러 번 일어나는 일이 학생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가는 성적 통지표는 많으면 일 년에 네 번, 대부분 학기당 한 번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다보니 학기말이 다가오면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한 창작의 고통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진다. 한 학기의 모든 일을 한 두 문장에 담으려다보니 고통에 참다 못해 몇몇 선생님들은 울화통을 터트린다.


 "차라리 수우미양가로 돌아가는 게 낫죠. 이게 뭐하는 짓인가요?"


 우리 세상은 모든게 등급으로 나뉘어진다. 부동산, 대입성적, 평가고과, 등등 단순한 숫자나 기호로 줄 세우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사람의 심리 또한 단순한 것을 원한다. 그런데 초등학교에서는 줄 세우기가 꺼려지고 있다.


 수, 우, 미, 양, 가가 사라진 통지표는 예전보다 화려하고 듣기 좋은 말로 가득한 정성적 평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등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학교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매우 잘함', '잘함' 또는 숫자 5, 4 등을 쓰며 우수한 등급을 알려주고 나머지 이하도 같은 형식으로 통지표에 기록된다.


 문제는 등급이 아니다. 못하는 아이를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사는 피노키오 마냥 거짓말을 해야하고, 보기 좋고 듣기 좋은 통지표를 빚어 만든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는 취지에서 완곡한 표현을 쓰라고 한다.


 상처를 주지 말자는 의견에 동의를 한다. 또 부족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창피를 주기 위해 평가란을 채울 생각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통지표를 채우다가 불만을 터트리는 교사들이 있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 초등학생은 종이 쪼가리를 부여잡고 저마다 쓸데 없는 시간낭비를 할 것이다.


 사연 많은 통지표 하나가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민낯을 잘 보여주고 있다. 통지표를 꾸미는 입장에서 보면, 관리자의 주문부터 코미디가 따로 없다. 무려 교육경력 30년이 훌쩍 넘은 관리자 분들이 주문한다. 보기 좋게 만들어라. 뒷장에 꼴랑 두 세줄 있는 것은 용납치 않는다. (학부모님이 보기 불편한 방식이니까.)


 맞는 말이다. 문단 편집을 하여 보기 좋게, 예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통지표가 한 학생의 한 학기를 오해 없이 학부모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 판단하는게 더 중요하다. 근거가 명확하고 충실한 평가 후  논란의 여지가 없이 쓰여진 통지표라면, 문제를 기하는 학부모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선 그렇게 할 수 없다. 학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학생의 평가와 기록은 귀찮은 일로 취급 받는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평가는 수시로 일어나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선 공지된 수행평가, 과정중심평가 같은 명칭의 것들이 평가의 기록란을 차지하고 일부 관찰 기록에 근거한 평가가 따라 붙는다. 그래서 몇 번 되지 않는 평가가 한 학기 학습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쓰여지게 된다.


 평가에 더 공을 들이고 논의를 하고 여러 번 기회를 주어 성취기준에 도달하게 만들고 싶어도 학교 현장은 그런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교육과정을 가르치다보면 몇 번 평가하기도 벅차다. 하물며 학생마다 부족한 부분을 평가하고 다시 가르치고 다시 평가하는 시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도 떠나기 바쁘고 교사는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바쁘다. 학교는 통지표에 힘을 실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기이한 통지표가 나오는 이유는 학교의 탓이기도 하지만 더 큰 걸림돌이 있다. 바로 초등학교에 대한 시선이다. 단적으로 사교육 시장이 이를 말해준다. 유치부 의대준비반이 등장했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일그러진지 오래다. 대입에 미치는 초등학교의 영향력은 귀여운 수준이다.


 초등학교에서 한 학년의 한 학기에 배우는 한 과목의 평가 기록은 학부모와 학생에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까. 영어 학원에서 레벨 테스트도 아니지만 즉흥적으로 치른 단어 쪽지 시험 하나보다도 형편없는 위치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날 학교의 통지표가 온다. 우리 애는 의대 준비반을 향해 척척 레벨이 올라가는 아이인데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단다. 난리가 날 수 밖에 없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기분을 상하게 한 자체가 문제다. 학부모도 학생의 잘못도 아니다. 사회에서 초등학교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히 기분 나쁜 단어로 아이의 100여일을 한, 두 단어로 평가내린 교사의 잘못이다.


 실제로 초등학교 교사의 처지는 매우 곤란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생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일은 천대 받고 내신 성적도 없고 학원처럼 선행학습을 빡시게 할 수도 없으니 교과목 지도나 평가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입시와 관련이 적어 보이고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들도 많지만 수능 말고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생활 지도, 인성 지도를 소신껏 할 수도 없다. 일부 학부모들이 무혐의인 것을 알고도 고소를 하는 시대이며 교감, 교장은 물론 상위기관에서도 교사를 생활지도 전문가로서 밀어주고 적극적으로 보호해줄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있다. 즉, 교사의 말에 권위가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는 시대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자. 모범적인 생활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교대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교사가 되었을지라도, 수십년간 교실에서 경력을 쌓은 초등 교육 전문가일지라도, 전교생이 다 동의하는 사실에 기반했을지라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일지라도, 우리 소중한 아이들의 100여일을 감히, 한, 두 문장으로 단정지어서 무궁무진한 (능력도 아닌) 가능성에 지문하나 조차 묻히면 안된다.


 현재, 교사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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