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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감정

세대를 통해서 전달된 인식되지 않은 수치심과 그 감정이 만들어가는 현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수치당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자존심이 무너지고 수치심 때문에 죽고싶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혹은 뚜렷한 원인이 없는 수치감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경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나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심각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일단 상황이 일어나면 수치심의 종류에 따라서, 그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그 수치심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해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수치심의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과정을 거쳐서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치스러움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거부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고착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게 되고, 결국 그 고통의 감정을 잊어버리기 위한 강력한 도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중독의 문제가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안의 감정들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현재의 시점에 머물지 않습니다. 전에 소개한 글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감정은 세대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 대응하는 방법도 세대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문화를 통해서 또는 사회적 규범을 통해서 수치에 대응하는 방법이 전달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건강한 방법이 전수될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 전수될수도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수치에 대한 대응방법이 지속적으로 전수될때,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고통이 증가될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떤 집안에서 수치감에 대해서 대응하는 방안이 건강하지 않을때 그 가정은 정서적 건강을 유지할수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그 피해를 당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국가, 사회, 가정, 그리고 개인은 서로에게 이러한 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가지게 되는 수치의 감정도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 사회, 가정, 그리고 세대를 통해 전달된 수치의 감정과 대응방법에 대한 조망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어느 집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한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가정을 해봅니다. 이러한 경우는 흔하게 있을수 있습니다. 그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부모들은 아이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구박을 하거나 다른 자녀들은 다 잘하는데 너는 왜 공부를 못하냐는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자녀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 자녀에게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부모들이 하는 작업은, 공부를 잘하면 자랑할 일이고 공부를 못하면 부끄럽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자녀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자녀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험성적을 잘받으면 자랑스러운 것이고, 시험성적을 잘못받으면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가치는 전세계에서 공유되는 가치는 아닙니다. 시험성적보다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고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등이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새로운 사업과 기업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성적보다 이러한 능력이 더 중요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위의 예와는 다른 상황을 예로 들면, 어떤 아버지가 있는데, 이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초반기에는 경제활동을 했지만 중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무시당했지만, 사회에 대해서 어떠한 대항을 할수 있는 상황이 안되었습니다. 수치와 두려움의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할 방법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집에와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사회생활에서 누적되었던 자신의 수치감을 폭력과 폭언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때리고 폭언으로 대했습니다. 수치의 감정이 폭력과 폭언이라는 방법으로 가정안에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폭력과 폭언은 대상이 된 사람들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만들게 됩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 것 뿐만이 아니라, 부모가 사용한 수치에 대한 대응방법을 그대로 배우게 됩니다. 자녀들과 아내에게 투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폭력이 되었던, 폭언이 되었던 누군가의 대상에게 퍼붇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이 아이가 커서,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폭력과 폭언의 굴레를 전달해주지 않으려고 죽을 노력을 한다면, 폭력과 폭언의 강도가 자신의 부모세대보다는 줄어들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치심을 타인을 통해서 해소한다는 프레임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억제하고 있을 뿐이지 언제든지 그 폭력과 폭언은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들은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자신이 알고있는 대응방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수치심의 감정이 몇세대를 거쳐서 흘러가면서, 알콜중독을 통해서 그러한 수치심의 고통을 이겨내는것이 패턴이 된 가정이 있다고 가정을 해봅니다. 이러한 집안은 조상들과 부모가 가지고 있던 수치심의 감정은 그대로 물려받게 됩니다. 동시에 조상들과 부모들이 사용했던 알콜중독이라는 대응방법도 물려받게 됩니다. 이쯤 되면 수치심의 감정이 왜 유발 되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수도 없습니다. 이미 문맥없는 수치심에 통제를 당하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수치심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알콜중독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많아지고 이러한 상황은 더 심한 수치심을 야기하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수치심이 많은 사람중에 수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게 되는데, 이때는 비판의 형식으로 타인을 몰아붙이게 됩니다. 자신은 의인이고 타인은 부족하고 악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수치심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 안정성을 만들어낼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면서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그것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주게됩니다. 그리고 수치의 감정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의 감정을 인식하고 마주하고 해소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이러한 수치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대물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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