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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May 15. 2019

건축, 건축가 그리고 건물

정확한 분별을 향한 첫 걸음

학문으로서의 건축(건축학 혹은 architecture)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발전해온 (서구)철학처럼 철저히 서구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지식체계(discipline)이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장르이다. 이를 '장르'라고 규정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를 상대적인 잣대로써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같은 매체에 대한 다른 장르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음악에서 '클래식'음악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 있는 것과 같다. 건축의 매체가 공간이라면, 우리는 기존의 건축이 아닌 다른 방식의 '공간을 다루는 장르'에 대해서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건축학의 입장에서 태초에 한국(혹은 동양)에는 건축이 없었다. 그러나 공간은 존재해왔다. 그러면 이 공간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파편적인 시도들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한국건축'이라고 부르겠지만 이는 architecture가 아니다. 왜냐면 전혀 다른 지식체계로부터 발생되어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architecture의 번역어와 같은 단어, 즉 '건축'을 사용하면 번역의 어느 지점에서 미끄러짐이 생긴다. 그리고 해당 공간을 architecture의 여러 가지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논의하게끔 유도한다. 그래서 이 공간에 대한 독해는 독립적인 이름을 지닌 전혀 다른 '장르'로서 존재해야 하지는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을 현대 도시의 상황에서 대상을 바꾸어 질문해보자. 산업화 이후 급히 개발된 현대 도시(특히 서울)에서 공간이 100만큼 있다면 그중에 architecture로 독해가 가능하고 그 범주에 들어가는 공간은 1도 안될 것이다. 대부분의 공간은 건축의 외적 영역에서 자생적으로 생산되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러한 공간에 거주한다. 그러면 이 공간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을까?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공간에 거주한다면, 이 공간은 어떻게 연구되고 발전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논의에서 구조, 기능, 미와 같은 잣대는 똑같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그 맥락과 기준은 기존의 architecture와 굉장히 큰 괴리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 중요한가? 즉, 장르의 구분은 왜 필요한가? 그 이유는 저마다의 장르가 독립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발전하려면 구분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미 도시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정체 모를 공간에 대해서 기존의 건축학은 주인의식을 가지지 않으며, 관심을 갖지 않거나 갖더라도 현상적 흥밋거리로서 관심을 갖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은 누구의 책임 영역일까? 적어도, 다수를 차지해버린 이 공간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전문가가 되어 질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건축학 교육을 받은 소위 '건축가'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기 위해 현실에 많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공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 잣대의 온도차가 소위 '건축가'와 수요자들 사이에서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학교에서 배운 학문적인 건축으로서의 이상(과 그에서 파생된 미적인 고정관념)을 실천이라는 핑계로 현실에 직역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서로 불만을 갖는다. 건축가는 자신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무식하다 탓하고, 수요자들은 자기들이 봤을 땐 쓸데없는데 권위적이며 비싸기까지 한 계획들에 대해 큰 괴리감을 느낀다. 다시 서로가 서로를 찾지 않는 사이 처참한 수준의 공간이 끊임없이 쏟아져 도시를 뒤덮어간다.



장르의 구분은, 여기서 양 측의 부담과 죄책감을 동시에 벗어던지게 해 줄 것이다. 기존의 소위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문화적 활동으로서의 건축(과 그에 파생된 디자인 활동)에 순수하게 집중하면 될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건물과 공간에 대해서는 새로운 전문가가 나타나 새로운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디자인하고 공급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자면, 후자에 속한 디자인 영역의 현재 수준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이에 시공행위만 남은 분야가 되어버렸다.) 그래야 서로 뒤엉키지 않고 전자도 발전하고 후자도 발전한다. 또한 양측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존재로도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존이 음악이라면 마치 블루스를 이해하는 클래식, 베토벤을 이해하는 대중음악가와 같을 것이다.



2018년 12월에 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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