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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Apr 08. 2020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탐방기

스털링 건축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문



요소

건축 요소가 말을 건다.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Staatsgalerie Stuttgart)에 방문했을 때 바로 느낀 점이다. 이 건물은 제임스 스털링이 디자인하고 80년대 초에 완공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수로 불리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는 모든 제각각의 건축 요소들이 — 이를테면 벽, 바닥, 천장, 창문, 기둥, 계단, 조명, 그리고 구획된 각 구역들 모두 —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기보다는 적절하게 형태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면서 말을 걸어온다. 이 요소들은 대체로 단순 기하학 도형의 형태이지만 색상, 축(혹은 각도), 스케일 그리고 재료 등의 다양화를 통해 다채로운 변주를 이룬다. 각각이 충돌을 하긴 하는데 조화롭지 않은 것은 또 아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가오는 방식은 요란함 혹은 드라마틱함 보다는 친근함—혹은 친밀함—에 가깝다. 허세 없이 귀여움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한국에만 있을 때는 가장 공감이 어렵던 것이 이러한 (전기) 포스트모던 풍의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몇 년 지내다 보니 왜 이런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는지 조금은 공감하게 되는 것 같다. 유럽에서의 건물은 오랫동안 세분화-양식화된 각 건축 요소(혹은 유형)들의 집합처럼 인지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깊게 박힌 고정관념인가 하면, 유럽인들은 기능적으로 필요가 없음에도 벽 중간중간에 굳이 기둥인 척 부조(relief)를 만들고 이에 따른 장식을 얹었다. (pilaster 참고) 없어도 되지만 허전한 나머지 모양이라도 새겨놓는 행동에서, 우리는 유러피언들이 건축 요소에 갖는 심리적 애착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작은 창문부터 도시 전체의 구성까지를 모두 관통한다. 이것은 각 요소마다 애정을 두고 교감을 했기에 가능한 행동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모더니즘이 이걸 다 갈아엎었다. 모더니즘은 합리성과 기능주의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건축 요소에 갖는 감정적 애착관계를 모두 지워내려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차갑게 다가온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모더니즘이 저물어가기가 무섭게 다시 과거의 애착 관계를 복원하려 했다. 이들은 수천 년간 익숙했던 풍경(혹은 유형)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변한 시대상에서 모더니즘의 성과—추상화를 바탕으로 기계화, 산업화된 인공물들을 미적으로 포용—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추상화된 기하학적 요소를 가지고서 과거의 (요소-유형적) 친근감을 회복하려 했다.


여기에는 과거의 디서플린으로 회귀하려는 건축인들의 관성도 한몫한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디자인 과정에 있어서 전통적 직각-투영법에 기반한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만 요소들만 추상화된 기하학 도형으로 바뀐다. 이 덕분에, 새로운 요소를 만난 전통 투영법은 포스트 모던에서 마지막 미적 포텐을 터트린다. 이 건물을 디자인하며 스털링이 남긴 드로잉들이 이를 증언한다. 하지만 이후에 해체주의(혹은 후기 포스트모더니즘)를 이래로, 전통적 투영법-드로잉을 통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몰락을 맞이한다. 포스트모던은 notation(기보)를 통해 표현 가능했던 조형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몰딩 모양의 간접조명


스털링의 choisy view 드로잉이 그대로 묻어나는 부분






드로잉

포스트모던 이후 건축 디자인의 역사는 전통적 투영법-드로잉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로 설명이 가능하다. 마지막 불꽃 이후에, 당시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 도구에 한계를 느낀 것 같다. 새로운 건축적 상상력은 옛 방식에 더 이상 담기지 않았고, 이들은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첫째는, 프랭크 게리에서 자하 하디드로 이어지는 갈래이다. 이들은 평면적 드로잉으로 절대 담아낼 수 없는 복잡한 입체물을 향해 나아갔다. 이들은 드로잉으로 디자인을 하기보다는, 디자인을 다른 데서 다 해놓고 거기서 드로잉, 바꿔 말해 평면 입면 단면을 추출한다. 다른 갈래는, 피터 줌터로 상징되는 갈래이다. 이 길은 이미지 자체로는 포착이 불가능한 경험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줌터는 건물에서 재료만 남기고 형태를 완전히 제거해버린다. 줌터는 자신의 책 “Thinking Architecture”에서 “음악이 아름다워야지 악보가 아름다울 필요가 있냐”며 건축 드로잉 추종자들을 대차게 디스한 바 있다.


줌터와 자하의 건물은 ‘건축 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요소들은 모두 전체에 녹아내린다. 예를 들어, 자하의 건물에서는 벽, 바닥, 천장의 구분이 없고, 줌터는 덩어리를 깎아나가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어나가며 외부적으로 덧붙여지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게 만든다. 이는 각 요소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고 충돌하며 자신을 봐달라고 속삭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한편 90년대에 메이저 학계 다수가 파라메트리시즘에 빠져들었던 것은, (물론 한국은 제외, 43그룹이 태동했다. 왜 한국은 언제나 갈라파고스일까.)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통해 표현 가능해진 다채로운 형태—특히 곡선적 형태—에 매료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세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년기까지 공고했던 아날로그 문명 자체에 대한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서 새로움(디지털)에 대한 갈증이 터져 나오게 된 것 같다. 이러한 갈망은 모종의 거대한 건축적 판타지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들뢰즈의 생성적 철학'과 ‘자가 생성적 디지털 알고리즘'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오늘날 무언가를 표현함에 있어서 디지털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제작 현장에서는 아직 멀었지만…) 젊은 세대들에게는 ‘파라메트리컬 디지털 형태’에 매료된 선배 세대가 오히려 답답해 보인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쏟아지는 건축 드로잉들은 직각 투영에 기반한 전통적 드로잉 양식을 다시 차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평면적인 성질로 회귀하려는 듯한 이러한 경향은, 자신들의 바로 윗 선배 세대들과 선을 긋고 다시 아날로그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는 역사상의 디서플린적 지식과도 연결된 듯한 느낌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정리가 가능하다: 어느 디자인 도구가 유일한 방법으로 주어질 때,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 되지만, 극복하고 나면 다시 재미있는 선택지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디자인 과정에서 같은 도구를 활용하더라도 극복되기 전과 후는 태도의 차이를 남긴다. 선택지로 되돌아온 도구는 유희적인 관점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요즘 세대들이 직각 투영 드로잉이 남기는 평면적 조형성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시각적으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직각 투영법의 본연의 목적, 즉 ‘수치적 왜곡이 없이 기록되는 형상의 본질’ 혹은 ‘측정 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는 드로잉’을 생산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주어진 도구가 남기는 왜곡을 보정-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극대화하려 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들은, 요즘 들어 다시 포스트모던 풍 디자인의 부활을 이끄는 중이다. 그리고 여기엔 콜라주 테크닉이 더해진다. 이에 따라, 요소를 모두 전체에 녹아내려했던 충동은 다시 각 요소들의 노출 및 충돌을 유도하는 디자인으로 변화하고 또 이동한다. 그래서인지, 스털링의 건물에서 느낀 감정중에 하나는 ‘트렌디하다’였다. 요소들이 숨지 않고 살아서 말을 걸어오는 방식, 그리고 돌아서는 장면마다 2차원적인 이미지(드로잉)가 포착이 되는 풍경은 이제 와서 보니 사뭇 새로웠다. 그런데 이 매력의 바탕에는 또 다른 특징이 깃들어 있다. 바로 ‘무겁지 않다'는 점이다.  


미술관 로비의 기둥


구획된 공간이 엇갈린 축과 대비되는 재료로 만난다.





지시 없는 표정

다시 요소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 건물에서 요소들은 대부분 순수 기하학(이를테면 점 선 면, 혹은 기초도형)으로 추상화되어있으며, 건축가는 이것들을 적절하게 충돌-노출시킴으로써 각자 존재를 드러내게끔 유도한다. (여기서의 ‘적절한 개입’이 건축가의 감각이자 능력이 아닐까.) 이 요소들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배경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객체들이다. 이 때문에 요소들은 ‘나 여기 있어’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건물(혹은 공간)에 고유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스털링이 유능했던 덕분인지, 이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표정으로 인해, 이 건물에서는 내외부 어디를 거닐든 친밀함과 생동감이 돈다. 그리고 이 감각의 형성은 두 가지 중요한 지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첫째는 ‘건물의 기능과 표정은 상관이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표정은 표정일 뿐 아무것도 심각하게 지시(index)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건축은 형태(form)를 추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대놓고 형태(form)만 추구하면 망해버린다. 마찬가지로, 형태는 의미로부터 추출될 수 있지만, 대놓고 그 의미만 추구하면 망해버린다. 포스트모던 건축의 디자인 과정에서, 그 형태를 축과 상징 등의 다양한 ‘지시적인 맥락’에서 도출할 수는 있겠으나, 도출된 형태에 정말 그러한 상징성을 무겁게 부여해버리면 망하기 쉽다. 왜냐하면 과도한 의미부여는 도출된 이후의 조형-객체가 ‘자주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형태적 특질'의 생명력을 퇴색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디자이너에게 일어나면, 즉 형태 도출 이후에도 의미 부여를 내려놓지 않으면, 형태 자체가 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소외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 못생겨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형태를 어떤 식으로 추출했든 간에, 추출 후에는 그 과정은 잊고 형태 자체가 이끄는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털링의 시립미술관은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모범적이었다. 각 요소들이 대놓고 ‘나 좀 봐줘’라고 훼방하듯이 말을 걸지 않는다. 이는 이것이 어디에서 왔든, 결과적으로는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시의 대상은 의미적 상징일 수도 있고, 인간의 행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안도 타다오의 건물은 가끔은 지나치게 ‘너는 여길 지나가,’ ‘너는 지금 여길 봐야 해,’ ‘여기서 넌 오른쪽으로 가야 해,’ 등의 행위에 대한 개입을 한다. 반대로 이것이 절제된 스털링의 미술관에서는 건물의 표정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 지점에서, 잘 지어진 포스트모던 건축물이 왜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당대 한국의 사회적 현실은, 조형 그 자체의 자주적 생동감에 집중하기에는 정신적으로 가난했던 모양이다. 당시 건축은 기능이든 상징이든 형태에 부여될 의미(전통, 윤리 등등)를 끊임없이 쫓아왔다. 이는 ‘이왕 돈 들이는 것에서는 무게감 있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표정을 다양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장소에서 축을 생성해보던 방법론이 ‘반드시 반영해야 하는 장소성'으로 변질되어버린 것 등이 있다. 이처럼 진지하지만 무겁진 않던 서구의 많은 방편들은 한국에서 무거운 숙제로 둔갑되어왔다. 기능이나 의미를 지시하지 못하는 조형 요소는 ‘얄팍함’ 혹은 ‘가벼움’이라는 말 아래 사라져 간다. 무거움을 좋아하는 관성은 여기에 윤리 지향의 인문학(?)적 내러티브를 주입하고, 드라마틱한 무대적 연출+질감 전시로 디자인을 축소하기도 한다. 여기엔 친밀한 유희가 자라날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건축의 다양성이 죽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이단아처럼 자리하는 건축가가 있다. 바로 정기용이다. 묵직한 혹은 드라마틱한 건물을 선호하던 한국 건축계에서 그는 포스트모던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따듯하고 친밀한 (허세 없는) 공간과 표정을 빚어냈다. 그가 남긴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들을 보면 그는 거의 스털링에 준할 만큼, 기초 도형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러한 (긍정적 의미로서의) 유희적 창작 스타일에 대한 본인의 인식은 그다지 가볍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또한 당대 한국인으로서 어쩌면 조형을 의미 없이 가볍고 친밀하게 대하는 법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대목은, 그의 사후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조형이 건네는 표정들과 대화하기보다는 그가 남긴 사회적 메시지만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디자인을 드라마틱한 연출로만 받아들이는 이류 건축가들 사이에서 디자인을 못한다고 디스를 당하는 것은 덤이다.


대부분의 건물이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건물은 더욱이나 적정한 스케일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미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각각의 요소들이 신체의 시야와 접근 가능 범위 안에서 적절히 조화되어야 다채롭게 인지되고 그 안에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표정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너무 크면 비율이 느슨해지고, 조감도 등을 보기 전까지 건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이 덫에 걸려든 케이스가 있다. 바로 서울 예술의 전당이다. 이곳은 대지에 뿌려진 도형들이 건물군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스털링의 시립미술관과 유사하지만, 해당 건물군 사이에서 경험하게 되는 긴장감은 매우 차이가 난다. 부풀려진 스케일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참고로 이 둘은 대지와 도시가 관계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포스트모던 건축에는 방계 자식들이 많다. 이들은 지역의 맥락 혹은 사회적 기능 등 무엇을 바탕으로 하든 간에, 단순 기하학의 직설적이면서도 다채로운 배치를 통한 조형언어를 이어나간다. 여기엔 한국에 친근한 또 다른 예시가 있다. 바로 마리오 보타이다. 그는 언제나 직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둔한 비례로 인해) 어딘가 토속적인 형상을 남긴다. 그가 남긴 형태들은 기호학적으로 개성이 매우 뚜렷하다. 그런 그가 최근 남양 성모성지에 아이코닉한 두 개의 탑을 세웠다. 이는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기하학적 제스처이다. 그런데 마리오 보타를 좋아하여 그를 데려오고 소비하는 한국 건축인들은 그의 다른 면모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리오 보타가 훌륭한 건축가는 맞지만 그가 과연 숭고함의 대가일까?


이러한 과정에서 건축가가 무슨 말을 하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창작자는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다 알지 못한다. 또한, 만들어지고 난 건축은 결과물 자체로 별도의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이 어떤 미적 효과를 만들어내는가이다. 이에 따라, 추상화된 형태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 유희와 감응의 대상이 되는 자주적 객체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아내든, 이를테면 기호학 혹은 유형학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도출되었다고 하여도 그렇다. 다른 접근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창작자가 현상학적으로 접근을 했든 아니든 지어진 모든 건물은 경험과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공학적이지 않은 건물은 없고, 윤리와 무관한 건물도 없다.) 따라서 지어진 건물이 일으키는 현상을 논할 때, 창작자가 현상학적으로 접근했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런 연유로, 창작자가 핑계 삼는 모든 접근법은 그저 건물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다른 표정을 불어넣을까’ 궁리하며 만들어내는 알리바이로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어째 이 알리바이는 바다를 건너면 거품처럼 더 부풀어 올라 우리의 생각을 막고 눈을 가린다. 시간이 지나 맥락이 풍화되면 좀 나아질까.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이, 객체(부분 혹은 오브젝트) 자체의 에스테틱에만 관심을 갖는 건축은 여기저기서 등장하고 있고 관심도 올라가는 것 같다. 실제로, 제각각의 요소들의 지시 없는 표정으로 가득 채우는 건축은 오늘날의 사물들과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을 더 잘 반영해준다. 우리가 살고있는 정크스페이스에서 넘쳐나는 레디메이드는 미적인 효과를 홍수처럼 쏟아내지만, 그 이면의 맥락은 접근과 추적이 전혀 불가능하다. 이또한 결국 표정만 남긴다. 표정만 남긴 채 정체는 알 길이 없는 미적 효과들 사이에서 헤엄칠거면, 차라리 이것과 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은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여러모로 많다. 기념비적인 건축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건물 매스 사이의 공간들


미술관 옆 음악학교의 정문. 이 구역은 모두 스털링이 디자인했다.




나머지 사진들.

건물 메인 출입구
로비
로비의 슬로프
전시장 내부
옆에 위치한 음악학교
전면부 진입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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