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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Sep 20. 2020

건축가 직군의 전근대적 속살  

건축에 깊이 자리한 에스테틱 포비아


단어 하나에서 출발한 사색인데 오류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유서 깊은 떡밥


최근 건축사 면허 확대 움직임에 대한 건축사 협회의 반발이 뜨겁다. 면허 확대 주장의 이면에는 그동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건축사의 역할 회복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한다. 건축사는 자신들만이 부여받은 사회적 권한에 비해 그동안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도 개선에 대한 다른 움직임으로도 이어진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서울시는 건축사의 제대로 된 역할 회복을 위해 ‘설계의도 구현제도’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새로운 제도는 그림자 노동이었던 설계 이후 과정에서의 건축사 참여를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을 골자로 한다. 건축계는 이를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것의 실행은 공공 건축물의 수준을 향상시킴은 물론 건축사 본연의 역할이 재정립될 수 있는 기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에는 다소 의문스러운 표현이 존재한다. 바로 ‘건축물의 품격’이라는 문구의 사용이다.


이 제도는 시공 과정에서 건축사의 개입을 크게 두 갈래로 명시한다. 첫째는 ‘설계의도 구현’이고 둘째는 ‘공사감리 및 건설사업관리’이다. 전자의 주 내용은 ‘건축물의 디자인 및 품격 사항 확인’이며 후자의 주 내용은 ‘건축물의 품질 및 안전 사항 확인’이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항목을 나눈 기준에 따르면, 건축물의 품질은 디자인과 별개이며 그 디자인은 건축물의 품격과 한 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 디자인의 구현은 품질(Quality)이 아니고 품격(Dignity)일까. 이들이 말하는 건축물의 품격이란 무엇일까? 이는 혹시 품격이 일반적인 뜻이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한편 건축의 품격이라는 문구가 사용된 다른 예시는 그리 멀지 않았다. 올해 초 완료된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이하 ‘국건위’) 제5기의 활동내역 자료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용례를 찾아보면, 건축에서 품격은 이 단어가 사전적으로 갖는 의미 — 위엄 혹은 품위 — 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디자인의 구현을 품질이 아니라 품격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이번 국건위 구성원과, 서울시 건축 제도 개선에 개입하였을 그간의 총괄 건축가들은 같은 사람이거나 혹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그룹의 사람들이다.







에스테틱이라는 터부


품격(Dignity에 가까운 의미로 본다면)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가치체계 성립을 가정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추상적이다. 품질은 다양한 항목을 통해 점검과 측정이 가능하지만 품격은 그렇지 않다. 품격은 의미가 추상적인 만큼, 애매한 부분들을 권위에 기대어 채운다. 이 개념은 일종의 신비화와 터부가 바탕으로 깔려야 비로소 작동한다. 이는 현대화된 산업 환경에서 법률 조항으로 명시하기엔 다소 곤란한 개념이다. 그런데 왜 기능과 안전에 대한 문제는 품질로 대변하면서, 에스테틱 퀄리티에 관한 문제는 품격으로 치환된 걸까. 에스테틱적 의사 결정을 불가침 영역에 두는 듯한 이러한 단어 선택은 사실 건축에서 오랫동안 존재해온 어떤 무의식을 반영한다. 바로 에스테틱에 대한 터부시 혹은 '에스테틱 포비아’이다.


에스테틱을 불가침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듯한 제스처가 왜 에스테틱 터부시인가? 터부는 언제나 그 반대급부로 과잉되고 왜곡된 애착(혹은 집착)을 낳는다. 최근 몇년간 한국을 뜨겁게 달군 미소지니(여성 혐오로 번역되어온 단어) 논쟁을 떠올려보자. 누군가 중년 기득권 남성들에게 ‘당신은 현재 미소지니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 그들은 대개 이렇게 항변하곤 했다. “무슨 소리!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쩌면 품격이라는 단어를 설정한 노건축가들에게 ‘당신은 건축에서 에스테틱을 멸시하고 있어!’ 라고 지적한다면 비슷한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신성한 건데!”


전근대적 여성성(순결함 등)을 과도하게 또 신성하게 여겨온 것이 여성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런식으로 대상화된 여성성 속에 가둬진 사람들에게는 폭력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같은 식으로 건축에서의 에스테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건축에서 에스테틱은 터부로 취급되는 만큼 과도하게 신비화 혹은 대상화되어, 있는 그대로로서 인정과 논의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가문의 비기마냥 현학적이고 두루뭉실한 말들 속에 가려져있다. 특히 고차원적인 설계 과정을 헤쳐 가다 보면 주어지는 산물 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우연일까. 품격이라는 단어를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은 공교롭게도 건축을 인문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인문학적 건축이라는 수사는 디자인 영역의 개념적 공백을 ‘윤리(적 태도)’를 방패 삼아 밀고 들어온 사이비이다. 우리는 이것이 태도로 포장되었으나 결국 스타일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구조는 에스테틱이 태도의 문제로 치환되어버린 지점에서, 그간 존재해온 에스테틱 터부시를 여실히 잘 드러낸다. 미를 미 자체라고 칭하지 못한 것이 터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실, 에스테틱은 아주 오래전부터 태도 등 정신적 영역의 연장선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것이 독자적으로 포착된 것, 그리고 이것을 위한 전문 영역이 ‘디자인’이라는 이름 등으로 구분-분리된 것은 현대에 들어와 생겨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시각적 형상을 의미적 지시와 연결 지어 사고해온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스테틱을 윤리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원시적 지점은 전근대적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자연스럽다. 예시도 멀리 있지 않다. 학생의 외모와 학업 성적 혹은 성실도를 연결 지어서 생각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예쁜데 공부까지 잘하네!”


에스테틱에 대한 멸시와 편견은, 제 역할을 잘하면서 — 그럼 못생기기 마련인데 — 아름답기까지 한 무언가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사람들은 이 두 항목이 그냥 따로 각자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을 못 한다. 이는 건축에서 엇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기성의 건축계는 좋은 건물과 잘생긴 건물을 별개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별개의 문제들을 다 뭉개 놓고서 그 위에 에스테틱만 신비롭게 구름처럼 포장해 놓는다. 이러한 여파로 인해, 건축계의 꼭대기(?)에 가면 결국 잘생긴 건물을 그리는 사람만 포진해있다. 이것은 편견이 에스테틱을 과대 포장하여 이것이 역설적으로 엔지니어링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한편 과대 포장된 에스테틱은 그 방향 또한 편향적이다. 한국 건축계의 전근대성은 피터 줌터류의 건축가에 대한 신화적 팬덤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국 건축계는 유난히 구도자적 태도로 진리에 다다르려 하는 건축만 좋아한다. 특히 이런 취향을 공유하는 많은 이들이 현상학을 운운하지만, 우습게도 그 ‘현상’은 로우테크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처럼 취급된다. 구도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거나, 반항아적 기질의 실험적 건물 혹은 하이테크의 화려한 건물에는 현상을 지각하는 주체가 성립하지도 않는 걸까? 이렇듯 에스테틱에 대한 터부 혹은 공포증은 ‘착해 보이는 아름다움’만 현상의 대상으로 인정해주는 편견의 이면에서 더욱 공고히 자리한다.


결국 이러한 왜곡된 인식은 에스테틱을 불가침의 영역에 올려놓고 자신들의 디자인 행위에 ‘품격(Dignity)’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버린다. 그러나 에스테틱 — 혹은 이것을 만들어내는 디자인 — 은 그런 게 아니다. 오늘날의 이미지 시대에서 에스테틱은 독립된 객체로 존재하며, 이러한 인식은 대부분의 다른 창작 분야에서는 이미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왜 건축은 아직 과거의 관념에 머물고 있을까?






낡은 직업


에스테틱도 사실은 품질의 영역에 들어온다. 더 정확히는, 디자인을 유지하며 생산해내는 것은 품질의 영역이다. 기능에 관련된 것만 품질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감성의 영역이라지만, 디자인만 소위 신비의 영역에서 비법처럼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기능과 대등한 카테고리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디자인 영역 개념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공물은 개발과 제작 두 단계를 거쳐 탄생한다. 그리고 개발 단계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대등한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고도화된 분야일수록 분업-협력 체계는 공고하며 절대 하나의 개별 전문가가 독립적으로 다 해낼 수 없다. 가장 최신이자 동시에 흔한 결과물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있다. 앱 개발을 하려면 디자이너와 개발자(엔지니어)가 동시에 필요하다. 기계인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가 형태를 비롯한 전반적 감성적 품질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동안, 기능적 구현을 위한 설계는 엔지니어의 몫이다.  


물론 이것은 제작 단계 — 생산 또는 시공 과정 — 가 있기 전을 의미한다. 개발이 끝나면 각 매체들은 저마다의 제작 단계를 갖는다. 어플리케이션은 컴퓨터 연산 장치를 통해 개발자가 짜둔 코드가 구현이 되어 완성이 되는 과정을 거치고, 자동차는 공장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설계했던 각 부품들이 생산 및 조립되어 완성품이 된다.


그렇다면 건물은 어떠한가? 개발(설계) 과정과 생산(시공) 과정을 분리해서 볼 때, 전자에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협력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는가? 건축사법에 따르면 건축사가 혼자 다 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법령에서 ‘설계’라는 표현의 사용을 보면 ‘디자인 용역’ 보다는 ‘공학적 설계와 관리’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의 공백에 대한 추측을 차치하고서라도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건물은 건축사라는 하나의 전문가가 혼자서 다 설계해 낼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창작물인 건가? 아니면 건축사의 전문 분야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를 아우르는 천재적 르네상스맨의 현대적 재림인 걸까?


그러나 서울시가 마련한 ‘설계의도 구현제도’를 보면 미약하게나마 이 둘을 구분해 놓고 있기는 하다. 생산(시공) 과정에서 개발(설계)자가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명시하는 과정에서, 품격과 품질이라는 이상한 꼬리표이긴 하지만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업역을 구별해 내고 있다. 하지만 구분까지는 성공했는데, 구분한 대상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왜 자신들이 구별해 낸 것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는 건축이라는 직업군이 오래되어서 그렇다. 건축물의 역사는 인류의 탄생과 출발 시기가 거의 같다. 예술과 기술이 구분되기 전부터 이 분야는 존재해왔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구분되어 각자의 디서플린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건축 혹은 건축가라는 개념은 그전에 먼저 구축되었다. 즉, 유서가 깊어서 그렇다. 덕분에, 하나의 매체(건물)로 굳어져버린 이 분야는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이 구분되어 각자의 저마다의 고도화를 이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종사자들이 에스테틱과 엔지니어링을 분별해서 사고하는 개념을 갖기 어려운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대부분의 건축 교육과 건축 시장, 심지어 건축사의 책무마저 엔지니어링 관련 부분에 의해 잠식되어있는 한국의 현실은 에스테틱 포비아가 자라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의 에스테틱 혹은 디자인과 관련한 부분에서 자꾸 헛발질이 일어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특히 건축사에게 더욱 그렇다. 건축사는 엔지니어링과 행정 관련 전문성만으로도 몸과 머리가 모자랄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건축물의 품격'이라는 표현의 등장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오늘날 에스테틱 자체를 다루고 창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기예이자 디서플린이다. 이미지 시대에서 이는 더 심화된다. 이 디서플린이 갖는 전문성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다루려고 하는 매체에서 생겨나는 에스테틱을 이해하고 또 가지고 놀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잔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건축은 그 규모와 무게 때문에 재료의 물리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는 하지만 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설계의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건축사는 과연 건축물에서 생겨나는 에스테틱에 대한 전문가가 맞을까?


개념의 공백은 제도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개념이 뒤늦게 생겨도 문제다. 기성의 체제와 제도는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의 영역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택시를 단지 운수 여객 업으로 이해한 정치권과 택시 운전사들은, 이동 과정에서의 공간에 대한 수요를 창출해낸 서비스를 불법으로 몰아 사장시켜 버렸다. 건축에서의 에스테틱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까. 지금의 빈자리와 터부는 앞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지금의 제도적 움직임이 아직까지는 여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덧.

산업혁명 이후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로 분리된 개발 단계는, 소프트웨어와 이에 수반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다시 통합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어영부영하다 건축에 남아버린 전근대적이고 공예적인 태도는 오히려 다가오는 시대에 얻어걸려 새로운 주역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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