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 표절 논란에 부치는 글
유희열은 정말로 표절을 밥먹듯이 했을까. 나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이번에 논란에 선 영상들을 보면 여기에는 다소 일관된 흐름이 있다. 의혹 영상 중 대부분은 곡의 일부에서 '편곡'과 '코드 진행'이 다른 곡과 거의 흡사하거나 같은데 멜로디가 살짝 다른 경우가 많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유희열은 자기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곡이 가지고 있던 특정한 '분위기'를 '재현'해내는 것에서 창작의 원동력을 얻은 것 같아 보인다. 달리 말하면 원곡의 스타일과 퀄리티를 그대로 가져와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가사와 멜로디 터치(가끔은 이마저도 비슷한 경우가 간혹 나왔지만)를 첨가하여 곡을 완성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창작의 과정이 될 수 있냐고 따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작법 이면에 있는 그의 욕망을 상상해본다. 그는 생각보다 음악을 오래전부터 한 사람이다. 90년대 초반에 음악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는 모든 분야의 창작물의 완성도가 형편없어서, 결과물의 완성도를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숙제이자 열망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럴싸하고 싶은데 그 그럴싸함이 안된다. 질감에 결핍되어 본 창작자는 그것이 얼마나 높은 산인지를 안다. 똑같은 외곽선의 형태로도 무슨 재료로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건물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상상해보면, 대중음악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가난했던 시절의 흔적이 맞다. 엔지니어링 미달의 환경이 불러일으킨 왜곡된 갈증이기도 하다. 다른 창작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익숙한 분야를 돌아보면, 서구의 건물, 제품, 그래픽 등의 분위기만 흉내를 내어도 그게 창작이었고, 느낌이 비슷한 정도가 디자인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였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자본과 기술의 인프라가 모자를 때는 그것을 획득하는데도 한 세월이 걸렸다. 여전히 건축계의 어른들은 31 빌딩을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 디자인의 카피라고 폄하하기보다는 그것을 재현해냈다고 추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움이란 사치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회사이자, 국가적인 영끌을 통해 굴러가고 있는 현대자동차가 허접하지 않은 모양새의 차를 내놓은 게 고작 십여 년 전이다. 그전까지는 무언가 닮긴 했는데 어설프다는 소리를 밥먹듯이 들어왔다. 건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기성 건축가들은 어설픈 레토릭의 포장 이면에서, 따라잡고자 했던 레퍼런스의 스타일과 퀄리티를 옮겨오는 데에 전력을 다 했다. 소위 '뽕끼'를 제거하는 일이다. 이 관성은 지금도 남아있다. 너도나도 피터 줌터 콜롬바의 벽돌 패턴을 자랑스럽게 자기 파사드에 이식해오던 게 최근 일이다. 그의 작품집 그래픽 디자인 언어까지 그대로 따라한 사람도 있었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 된다고 했던가. 퀄리티를 만족시키고도 새로움을 탄생시킨 사람이 해당 창작 분야의 레전드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런데 그런 존재가 여지껏 등장하지 못한 채로 존재하는 분야가 있다. 그러면 '그럴싸함'만 충족해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면 대중들은 그 사람이 정말로 창작을 잘하는 줄 알게 된다. 거품은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 퀄리티를 재현해 낸 사람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 맞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숙제에만 머물러야 할 것인가. 창작의 가치와 성취에 대해 더 건강한 개념 정립이 서로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은 유희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