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리멀리 Sep 11. 2020

김봉곤 <그런 생활>

[비겁함의 정반대로 가는 과정]

 무던하고 귀여웠던 애인의 이면이 완전히 탄로 난다. 봉곤의 애인은 그와 함께 있지 않은 순간들에 쉴 틈 없이 그가 아닌 다른 이와의 성적 관계를 욕망하고 있었다. 봉곤은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둘의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설계한다. 하지만 그 설계는 잠시 후 모조리 무너진다. 애인과 함께 그의  이반시티 계정을 삭제하기 전 쪽지함을 확인하고 그가 ‘지속적으로 불특정 다수와 섹스 약속을 잡아왔’ 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어제까지도. 


 그를 있는 힘껏 짓밟은 다음 부둥켜안고 다시 잘해볼 생각이었지만 쪽지함을 열자 그 설계는 실행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눈에 애인이 혐오스럽고 징그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밑바닥을 마주하고 봉곤은 이렇게 말한다. “너같이 못 배운 빡대가리 새끼는 이런 식으로 살고 이런 식으로 연애해?”


 봉곤은 퀴어 소설로 상을 받은 작가다. 그리고 엄마에게 따로 먼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던 성소수자이다. 그의 엄마는 허리띠를 졸라맨 채로 사는 시장 상인이다. 소설을 그가 아닌 다른 경로로 접한 엄마는 아마도 남을 통해 자식의 커밍아웃을 직면했을 테다. 엄마는 늘 봉곤과 싸워왔고 늘 졌다. 덮어 놓고 다시 전처럼 지내는 일은 사는 내내 반복되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봉곤은 대수롭지 않은 싸움이라고 멋대로 차치해버리지만 그것은 점점 대수로운 일이 되어 간다. 애인과의 설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엄마와의 결말 또한 예측을 빗나가버린다.


 그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버버리 코트를 선물하고 싶어 매장에 가지만 가격을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한다는 엄마와 실랑이를 하다가 “평생 시장 바닥에서 거지 같은 옷 입고 거지같이 살아라”라고 말하며 상처를 준다. 그런 심한 말에도 늘 덮어놓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져줬기 때문이다. 봉곤은 그것을 일상이나 패턴이라고 여긴다. 이 말은 그가 엄마에게 얼마만큼 무심했는지를 반증한다.


 그는 실로 비겁했다. 그가 성소수자이고 오롯이 존중받아야 하는 한 인간이라는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엄마의 욕망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고 엄마가 무얼 원하는지 내비칠 때 모욕을 안겼다. 봉곤이 생각한 패턴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단언하며 이해할 의지를 전혀 갖지 않았다.


 나는 애인의 밑바닥을 마주하고 애인을 모욕한 그를 이해하지만 그전에 그가 구축한 설계가 비겁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다시 안아주는 드라마를 계산하고 실행하는 그의 관계는 실로 용기 없고 비겁하다.


 하지만 애인을 너무도 사랑한 봉곤은 부단히 노력한다. 두 사람 사이를 다시 구축하기로 한다. 동거를 시작하고 욕망을 진지하게 분석하자고 제안한다. 상대를 바꾸려고만 했던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면서 그에게 맞추어 나갈 정성을 보인다.  봉곤의 엄마는 시간이 흐른 뒤 기죽지 말라며 용기 내어 전화를 걸어온다. 엄마에게 미칠 자신의 영향을 너무도 차갑게 축소했던 그는 엄마를 경이롭게 여기고 안도하게 된다. 


 그의 예측과 설계가 무참히 어그러진 뒤에 그는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말하면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일, 그가 하고 싶은 일, 그러나 아주 어려운 일. 


 “니 진짜로 그 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라고 전에 엄마가 물었다. ‘그런 생활’이라고 돌려 말한 그 혐오와 편견이 뒤섞인 문장은 이 작품의 제목이 된다. 봉곤의 그런 생활은 부단한 일상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어 간다. 평범하고 밋밋하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 숱한 노력을 하는 생활, 고민하고 분석하는 생활, 재단이 아닌 제안을 하며 사랑하는 생활,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간간히 행복하고 간간히 몹시 화가 날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생활, 그런 생활이다. 


 ‘내가 봉곤이라면 애인과 헤어졌을 것이다.’라고 섣불리 생각했지만 사실 안 그랬을 확률이 높다. 몹시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해해 보겠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빙빙 돌려가며 드라마를 쓰던 그가 피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서로를 이해할 궁리를 한다. 애인의 제안을 수락하고 그를 위해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떼어 내려놓기도 한다. 봉곤은 이제 비겁함의 정반대에 서 있다. 나는 그의 그런 생활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가도 어느새 이해한다. 진부하다고 생각하다가 경이롭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가 그의 엄마를 보며 생각하듯이.


 나도 그처럼 상황을 예측하고 설계하곤 한다. 곰과 싸울 때, 어떻게 하면 그를 교활하게 상처 줄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런 단어만 골라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때로 곰에게 상처 주기 위해 안달일 때가 있다. 하지만 곰은 자주 내 예측을 무너뜨린다. 봉곤의 애인처럼 무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당황하곤 한다. 봉곤의 비겁함을 마주하고 내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겁한 나는 비겁의 정반대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필히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안에 곰도 포함시켜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셰익스피어 <햄릿>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