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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l 25. 2021

36- 생존본능

 반자동적인 어떤 집중은 사 년 전 콜센터 상담사로 일했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당시 내 직업은 불만사항을 듣고 해결하는 일이었다. 하루 종일 안 좋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온 몸으로 억울함을 떠안고 지냈다. 그 시절 나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출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가까스로 보이는 창밖을 응시하다가 ‘서울시 감정노동자 무료 심리상담’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포착했다. 빠르게 번호를 외우고 전화를 걸었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으로 심리 상담사를 찾은 것이다. 누구라도 내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어 앉아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오래 울었다. 그다음에는 억울함과 화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이유를 직시하고 고객에게 그러하듯 나에게 너그러워지려고 했다. 이것은 생존본능이었던 것일까, 그 이후에도 위태로울 때마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집중력으로 길을 찾았다.


 지난 팔 개월 또한 그랬다. 사 년 전의 경험으로 다행히 나는 스스로를 보살피는 법을 알았다.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고고하게 나의 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집중했다. 조금 으쓱해지는 일이다. 사실 특별하게 고고하지는 않았다. 나는 반자동적으로 살 궁리를 했다.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레스토랑 서빙과 청소를 병행하면서 하루에 적게는 여덟 시간, 많게는 열세 시간씩 노동하느라 심신이 녹초가 되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정성스럽게 살아야만 했다. 보살피는 일을 대충 하면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늦지 않게 잠들고 땀 흘려 운동했다. 우울감이 차오르는 날이면 유튜브를 켜고 요가소년 채널에 접속하여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을 회복하는 요가’를 재생했다.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양 팔로 나를 꼭 안으며 호흡했다. 이 모든 집중이 소홀해지면 어떤 검은 기운이 서서히 차올랐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떠올리며 비교하기 시작했고 더 과거의 나를 후회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은 바로 가까운 미래의 나였다. 당장 다른 시간의 나들을 지금의 나로 끌어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지 못한 밤에는 실체 없는 후회와 불안과 채찍질에 시달려 너덜너덜해졌다. 위태로울 때 현재 그러니까 지금과 나에 집중하는 일은 지구에서의 삶을 지속하게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것은 생존본능이 아닐 수 없다.


 사 년 전 나의 억울함과 화의 근원을 살펴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면 가만히 거울을 보듯 감정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직시를 시작하면 최소 몇 분 내로 감정이 작아졌다. 실로 냉정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자타 모두에게 조금 더 너그러울 수 있었다. 이것은 본능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의 생존을 돕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연습을 귀찮아 하기는 했지만 관두지는 않았다. 나의 분노는 월경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법 잘 작아졌다. 궁금증이 일었다. 분노가 아닌 다른 것들도 작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 이를 테면 울적함이나 돈 없음이나 멋져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을 작아지게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무작정 시도해 볼 일이었다.


 울적할 때 나의 울적함을 정면으로 보았다. 휩쓸리지 않도록 지금 여기 울적한 나를 끌어 앉혀 살폈다. 반자동을 넘어 이 일은 그 자체로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의식적인 집중력을 요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울적함은 좀처럼 작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위로는 그것을 작아지게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돈 없음’ 같은 사실에 근거한 불안이나 ‘멋져지고 싶은 욕망’처럼 불타는 감정의 경우에는 작동하였다. 하지만 울적함은 그저 나를 꼭 안아줄 일이었다. 왜 울적한 지 내게 묻기 시작하면 작아지는 건 울적함이 아니라 나였다.


 파도치는 감정을 향한 정공법은 스스로를 진단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를 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했다. 나는 조금 발전하였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사는 일은 반자동적 생존본능과 수동적 자가발전으로 지속되는 걸까. 오늘도 지금에 집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움직여 삶을 굴린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숱한 페달의 힘으로 자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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