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마레지구 아트 갤러리 미셸 랑(Michel Rein)
지난 2월의 어느 화요일, 파리의 3구에 위치한 미셸 랑(Michel Rein) 갤러리를 방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날 총 5개의 아트 갤러리를 방문했다. 일주일에 한 번. 날을 잡고 다수의 갤러리를 방문하는 그 단 하루, 머릿속은 복잡해지지만 그다음 날부턴 작가의 이름 대부분이 기억에 나질 않곤 한다. 그래서 난 오늘, 작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영영 사라지기 전에 이 기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곳은 한국에서 소위 마레지구로 통한다. 17세기의 거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코로나 사태로 인한 봉쇄 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어떤 구역들보다 낮밤 가리지 않고 흥이 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말이 필요 없는 화려한 LGBT BAR나, 유대인 구역, 피카소 박물관으로 유명한 곳. 그림, 조각, 가구, 장식품들을 판매하는 갤러리들이 줄을 서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갤러리를 나와 몇 발자국 걷다 보면 또 다른 갤러리가 눈에 띄고 또 몇 걸음가 길 건너 다른 갤러리를 만나게 될 정도로 아트 갤러리 천국이기도 하다. 이처럼, 파리의 3구의 구역 전체가 마치 커다란 하나의 전시 공간으로써 자리 잡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앞으로 대부분의 방문기는 이 파리 3구를 배경으로 할 예정이다.
갤러리 미셸 랑(Michel Rein)은 지난 1월 말부터 프랑스 작가인 프랑크 스쿠티(Franck Scurti)와 베네수엘라 작가인 마리아나 부니모브(Mariana Bunimov)의 작품을 공개했고, 이번 주 3월 20일 날 전시를 종료한다. 미셸 랑 갤러리는 92년 프랑스 지방 Tours에 설립되었고 2000년 파리로 이주했으며, 현재 파리와 브뤼셸 두 도시에 위치해있다. 또, 이 아트 갤러리는 오늘날까지 페미니즘, 생태학, 역사 등에 몰두하는 아티스트들을 중점적으로 노출시켜왔다.
Premier Soleil, Franck Scurti
전시 타이틀, 첫 번째 태양(Premier Soleil)의 프랑크 스쿠티의 조각들이 갤러리의 1층을 채웠다. 갤러리의 정문 너머로 보이는 모서리가 무딘 사각형의 녹색 기념비는, 그 이름도 기념비(Le monolithe)이다. 기념비 위엔 뚜껑이 열리지 않은 하이네켄 두 병이 놓여 있다. 손 뻗으면 닫을 거리, 음주가의 부재가 주는 특별한 시음 기회는 어떠한 강요 없이 음주를 방해하고 있었다.
기념비로 시작하는 전시의 첫인상은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 의도를 한층 발전시킨다.
한색이 독보를 이루는 조각들은 갤러리의 높은 천장만큼 차가운 인상을 준다. 전시실 도처에 놓인 새장들과 알록달록한 모형들이 인상적이다. 이 교활한 새들(Oiseaux malins) 시리즈는 작년 2020년 여름 그랑 팔레(Grand palais)의 Au jour le jour 프로젝트 동안 제작된 작품들이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새로운 형식의 창작물들은 놀랍게도 비슷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흡사 숨은 보물 찾기를 연상시키는 새장 속의 서로 다른 크기의 피다 만 듯한 담배는, 새의 부재와 동시에 흡연자 없는 흡연을 나타내고 있었다.
속삭이듯, 조심스러운 의도가 전해지는 순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흡연에 대한 경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담뱃갑 위에 그려진 경고문과 함께 삽입된 이미지는 어떠한가. 경고의 수준은 진즉 넘기진 않았나.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이 전시를 통해선 결코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의 부재란 결코 한시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이 남긴 흔적은, 뚜껑을 채 따지 않은 병들과 피다만 담배일 뿐이다.
전시의 이름이 "첫 번째 태양"이고, 이 전시가 올해 초에 시작한 것을 고려하면, 이건 마치 한 해의 첫 번째 일출을 바라보며 금연과 금주라는 신년 계획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La beauté sera CONVULSIVE, Mariana Bunimov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안쪽의 좁은 공간에서 마리아나 부니모브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불어로 "La beauté sera CONVULSIVE"인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다"라는, 이 다소 독특하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주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 그리고 초현실주의 이론가이기도 한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자서전인 "나자(Nadja)"에 등장하는 구절로, 문장 전체는 이러하다 : La beauté sera CONVULSIVE ou ne sera pas(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결국 이 한 문장은 이 책을 찾아 펼치게 만들었다.
아름다움을 열정의 목표로만 생각해 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 이제 그런 아름다움에 대해 필연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중략) 당신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보았지요. 마치 정해진 시간과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서 이뤄진 당신과 나의 일치된 만남을 경험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은 리옹 역에서 끊임없이 급격하게 덜컹거리면서, 내가 알기로는 출발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출발하지 않을 기차와 같습니다.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는 그러한 급격하고 불규칙한 움직임들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이 움직임들이 필연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된 하나의 발작적인 충격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중략) 역동적이지도 정태적이지도 않은 아름다움. 지진계처럼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 침묵의 절대적인 힘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앙드레 브르통에 대한 설명은 명백하다. 역동적이지도 정체되어 있지도 않은 것. 나비의 날갯짓이 쓰나미를 몰고 오는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와 같은 아름다움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인 것이다.
한 귀퉁이, 압정 혹은 테이프로 투박하게 고정된 그림들이 보인다. 액자란 틀에 의한 보호는 그녀가 추구하는 '원시적'이라는 개념을 깨트리는 거추장스러운 오브제였던 것일까. 벽이 흘러내리는 듯한 충격과 공포. 난 그녀의 그림이 압도하는 불안정에게 몰입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순간, 난 작가의 개인적인 공간에 예고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된 듯한 심정을 갖고 말았다. 작가의 아뜰리에, 작가와 동화된 듯한 느낌이 이질적이다.
이러한 전시 형식이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처음은 아니다. 그녀는 2017년 뉴욕의 Henrique Faria Fine Art에서 위와 같은 원시적인 실험을 강행했었다. 문자 그대로, '틀에 박히지 않은' 이 공간은 새삼 앙드레 브르통이 말한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가 떠오르게 만든다.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딱 들어맞았을 때, 소름 끼치는 발작이 이는 것처럼. 중의적 표현인 '틀에 박히지 않은'이라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킬 때 나타나는 짜릿함. 발작.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하기엔 필연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작품에 '틀'을 배제시킨 것은 아니다. 전시의 주제와는 별개로 그녀의 작품에 담긴 이념엔 부정과 파괴 속, 진저리 나는 현실에 반하는 창조물을 설계해 나가는 작가들, 초현실주의자들의 영광이 담겨 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안젤레스 알론소 에스노사(Angeles Alonso Espnosa)는 그녀의 작품 세계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의 우주의 이질감은 시대정신(독일어: Zeitgeist 차이트가이스트)을 반영한다 : 확산하는 다수의 정보와 이미지의 영구 흐름이 주어진 시간성 혹은 모든 지리학을 추월하는 영구 동시성을 추구하는 분열되고 융합된 세계. 다수의 세계 분열의 변형과 재귀속이라는 축적을 통해, 부니모브는 시민의 대혼란들, 유년시절의 이미지들, 음악, 연인, 풍경, 현대의 잔해, 인격, 순교자(희생자)들, 관습(유행), 오브제, 잡종이 되는 것, 건축, 추억 등이 공존하는 폭넓은 우주를 만들었다.
http://michelrein.com/en/expositions/presentation/279/la-beaute-sera-convulsive
마리아나 부니모브가 구현하는 작품들은 지극히 순수하다. 어린 시절의 추억, 기억, 그리고 현실이 주는 불안감, 두려움,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세계의 복합적인 아이디어를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내걸었다.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커다랗고 견고한 우주를 만들고 대중을 초대했다. 대중이 이 현실이 주는 필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전시를 보면서, 그리고 전시에 대해 연구하면서. 이렇게 두 번의 해석 과정을 거치는 관람객은 내가 혼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전시의 최종적인 인상은 모두 재각각이다. 브런치를 통해 공개하는 내 방문기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내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비평과 생각일 뿐임을 알려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