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불확실한 먼 미래가 너무 가까운 내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 중 가장 무방비한 순간에 찾아오는 불안감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서 쉽게 잠이 들 수도 없다. 그런 날이면 거대하고 실체 없는 벽 앞에서 막막한 기분이 든 채로 잠이 드는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이 벽을 밤마다 자주 만나고 있다.
당장 이 달에 수입이 끊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새롭게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평생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을까?
현재가 안정되면 이 안정감이 끝날까 봐, 불안하면 이 불안감이 영원히 계속될까 봐 전전긍긍하게 한다.
고약한 불안감은 가면만 바꿔 쓰고 불쑥 찾아와 당장 어찌할 수도 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막연한 불안감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노력, 선택, 운’이다.
미래가 불안할 땐 불안한 만큼 많이 배우고, 실력을 쌓는 노력을 해야 한다. 훗날 나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선택하고 도전하면서 나아간다. 여기까지는 어쨌거나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노력과 선택보다 더 큰 요인은 언제나 ‘운’이라는 점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노력과 선택만 있다고 한들 운이 없다면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달하고자 하는 미래가 100이라면, 운이 60, 노력이 20, 선택이 20 쯤 되지 않을까.
물론 운의 영역이 절대적이라고 해도, 운만으론 절대 100이 될 순 없다. 적당한 시기에 너무 좋은 기회가 찾아와도 노력과 선택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역시 좋은 결과에 도달하긴 불가능하다. 노력을 했어도 도전하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고, 노력 없이 도전만 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긴 힘들 테니까.
그러니 미래가 불안하다면 노력과 선택에 좀 더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어차피 운의 영역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니 말이다.
삶에서 운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곤 한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 하나쯤 있어야 훗날 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탓하지 않을 수 있다. 운이란 빠져나갈 수 있는 고마운 구멍이자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밧줄인 셈이다.
밤마다 걱정하는 부정적이고 막연한 미래는 운의 영역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밤잠 설쳐가며 미래의 운에 대해 걱정해 봤자 도움이 될리는 만무하다. 먼 미래의 나에게 기회라는 운이 주어질지 아닐지는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오히려 먼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내일이라는 가까운 미래에 저조한 컨디션을 만드는 원인이 될 뿐이다.
현재에 충실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안한 질문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내가 당장 취해야 할 자세는 현재를 최선을 다해 즐기고, 계획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상황이라면, 안정적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순간을 즐기면서 현재에 대해 곱씹어야 한다. 반대로 불안정한 상황이라면, 현재 주어진 이점을 찾아 지금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걱정하던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불행은 인파 속에서 정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들떠서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뒤로 다가와서 등에 칼을 꽂는다.
최근 장항준 감독이 불행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불행이라는 놈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니 끝없이 두리번 거린다.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가상의 부정적인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땔감처럼 태워버린다. 그건 현재를 즐기지도, 미래를 대비하지도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행동에 불과하다.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대비책을 세우는 건 엄연히 다른 행위다. 미래가 불안하다면 대비책을 세워야 하고, 대비책을 세울 수 없는 불안함이라면 미래의 운에 맡기고 현재에 집중하자.
아마 이렇게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안함은 또다시 불쑥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땐 불확실한 운을 미리 걱정하고 있진 않은지, 대비책이 없어서 불안한 감정인지 파악해야 한다.
불안감의 종류를 분류하고 대비책을 세워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면, 불안함은 분명 흥미를 잃고 어느새 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