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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Jul 11. 2020

용기를 쓰는 글방

어제도 모집 글 하나를 블로그에 올렸다. 반응 무. 

백여 명이 매일 같이 블로그에 들어오지만, 나와 함께 글을 쓸 글 벗을 찾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유명하지 않아서일까, 모임을 이끌어가는 실력이 부족한 탓일까, 마케팅에 미음도 모르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딱 그 순간 ‘실패’라는 단어가 내 눈앞에 선명히도 새겨진다.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팍 위에 얹힌 것 같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 것일까 싶어 고개가 숙어진다. 손님이 없는 가게를 근근이 운영하는 주인이 된 것만 같다. 

여러 사람에게 쓰는 삶의 기쁨과 쾌락을 알려주고 그 대가로 읽고 싶은 책 몇 권 정도는 사 볼 수 있는 돈을 버는 글방 주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은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저만치 멀어진다.    

  

글방을 운영한다. 거리 한쪽, 늠름하게 간판을 달고 서 있을 것 같지만 실은 모임 이름일 뿐이다. 실체 같은 것은 없다. 내가 있는 그곳이 곧 글방이며, 내가 글방의 주인이자, 글방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스텝인 것이다. 

글방, 그 자체가 곧 나인 셈이다.

그래서 글 벗이 하나도 모이지 않은 날이면 꼭 내 존재를 거부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반대로 몇몇 글 벗이 함께하기로 한 달이면 정반대의 상태로 웃음 짓곤 했는데,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일희일비하는 인간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마저 나 인 것을. 글방 하나로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오가는 이유는 그곳에 내 존재가, 나의 무게가 온전히 실려 있기 때문인 것을.


운영비를 제외하면 모임 하나를 끝내고 난 후 남는 돈은 사실 몇만 원도 안 된다. 몇만 원은 무슨. 제로이거나 장소비를 내기 위해 되려 내 주머니를 뒤져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모임을 진행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글방(나)’이 출동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기쁨이었다.

그건 소비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깐. 먼지 같은 영향력이지만 나의 에너지가 세상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고. 

그것은 엄마로만 살아가는 삶이 어딘가 모르게 나를 부대끼게 한다는 느낌을 받고 난 후 가진 아주 작은 삶의 변화였다. 아, 나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가냘픈 희망 같은 것.

비록 몇 명밖에 모이지 않는 글 모임을 진행하고 있지만, 어쨌든 나로서 세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전에 결코 갖지 못한 삶의 풍요이자 설렘이었다. 


쌍둥이 엄마가 되고 난 후, 아이와 내가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곳에 꼭꼭 숨어 지내기만 했다. 엄마로 사는 삶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나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아이 둘과 함께 보내는 일은 몸과 마음이 무척 고달팠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는 인간의 쓸모를 증명받는 기분이었다. 나 없인 물 한 모금조차 먹지 못하는 아이 둘을 보며 이 일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언제까지나 엄마로서의 삶은 굳건하리라 생각했다.

허무, 공허, 무상 따위의 단어가 들어올 틈은 없다고 여기며.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세 살.

‘엄마 없이 다섯 시간 정도는 우리끼리 있을 수 있거든요?’

자기보다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2년 남짓, 24시간 내내 한 시도 떨어져 있지 않던 두 아이로부터의 해방. 그때 나는 상당한 자유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다. 몸에 구멍이 난다면 꼭 이런 느낌일까. 멀쩡하던 영혼이 시름시름 앓는 이유가 무얼까. 


아이가 없는 다섯 시간. 도대체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 보는 것 말곤 난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더라.'  

그때부터였다. 책상 앞에 앉아 읽고 쓰며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악했다. 

‘나, 뭐하는 인간이었더라?'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읽고 쓰는 일에 치열하게 매달렸고,  엄마로 사는 삶이 나에게 전부가 되어선 안 되는 이유를 차근차근 나열할 수 있었다. 그 모든 답은 다정한 일침이 되어 삶의 위엄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니깐 ‘아이’가 없어도 내 삶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아이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시간, 오히려 완전한 내가 되었다. 


꿈. 

애 둘 아줌마에겐 망상이 될 것이라 여겼던 단어가 내 삶을 선명히 밝혔다. 지금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를 뛰어넘기 위한 모든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내 한계로 인한 처절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지언정 고여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보잘것없고 초라한 삶의 민낯과의 대면은 슬프면서도 한편으로 희망찼다. 

막연하면서도 설렜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와락 글방은 지난 삶의 얼룩, 마음의 애 닮음, 그리고 온전한 내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읽고 쓰는 삶을 타인과 나누며 내 한계점을 뚫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와락 글방을 만들기까지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주리라는 다짐이 아우라처럼 글방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깐 글방은 나인 것이다. 꿈의 길목인 것이다. 살아있노라 외치는 몸부림인 것이다. 

매달, 모집 공고 글을 올릴 때면 답답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잘할 수 있을까?' 자기 의심은 덤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지난달보다 더 나아진 것 맞아?’라고 물으며.

아슬아슬 문 두드려 주는 글 벗들 덕에 위태위태 모임을 이어가고 있지만,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말을 남기며 떠나가는 그들 덕에 멈출 수가 없다. 

‘더 나아진 글방’이 되기 위해 나를 갈고닦는 지난한 시간을 가만히 버텨낼 수 있다. 


나에게 글방은 무모함이자 용기인 셈이다. 

두려움인 동시에 삶의 위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나의 쓸모에 대한 인정이 되어준다. 

세상의 먼지 같은 크기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인간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안심인 것이다.


장소비를 내고, 운영비를 제외하니 책 한권 사 볼 돈도 남지 않은 가난한 달. '아! 실패구나.' 외치지만 동시에 두 주먹을 불끈쥔다. 그럼에도 난 이렇게 선명히 존재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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