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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Mar 04. 2020

약점을 마주하는 자세

세 번 째인가, 네 번 째인가. 원고 수정을 하고 있다. 작년 11월쯤에 출간 계약을 했으니 벌써 4개월이나 흐른 거다. 

출간 계약을 할 당시만 해도 나의 글이 책으로 출판된다는 것에 대해 무척 자긍심을 느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수정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뚝뚝 떨어진다. 진정 종이 낭비가 아닌가 하는 알 수 없는 죄책감까지 더해지니 일에 진전이 없다.

며칠밖에 걸리지 않을 일인데도 이 주를 넘게 붙잡고 있은 적도 있다. 자꾸만 붕붕 뜨는 내 마음을 다잡아줄 데드라인이 없다는 것도 일의 속도를 늦춘 것에 한몫했지 싶다.   

출판사에서 들으면 "핑계도 가지가지다."라고 할 것 같다. "어차피 초보 작가의 글에서 대단한 무언가를 바란 건 아니라오!"라고 질타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했던 건 사실이지만 일을 멈춰버릴 만큼의 엄청난 것은 아니지 않냐고. 

무려 계약까지 맺은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나의 우선순위 제일 위에 있었어야 한다. 온갖 글을 쓰고, 티브와 책을 보고, 늘어지게 잠을 자던 그 시간에 우선 이 일부터 처리했어야 했다. 

진정 흔들리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저 나의 지독하고 쓸모없는 습관 때문인 것 같다. 어느샌가 내 몸에 철썩하고 달라붙어 나를 제멋대로 조정하는, 일부러 상기하지 않으면 잘 떠올리기조차 힘든, 마치 내 발바닥에 굳은살처럼 내 몸 구석구석에 배겨 당장이라도 뜯어내버리고 싶은 케케묵은 나쁜 습관. 

그 나쁜 습관은 어느순간 나의 약점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수정 요청이 온 지는 일주일도 지났다. 이제서야 수정해야 할 것들을 하나 둘 체크했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 일인데 말이다. 

"야, 넌 왜 그렇게 끝심이 없냐?" 나를 채근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불현듯 생각난다. 

꼭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면 귀찮아지거나, 하기 싫어지거나, 자신감이 떨어진 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슬그머니 피하거나, 혹은 대충 마무리하고 넘어가려고 했던 나의 태도가 하나, 둘 상기되었다. 끝내지 않으면 죽음뿐인, 그 데드라인 앞에서 아슬아슬 일을 마무리하곤 했다. 

쌓인 원고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던 건 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나의 오래 묵은 태도 때문인 것이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도, 집에서 살림을 하는 지금도 끝맺음이 야물지 못했다. 일의 첫 시작은 그렇게나 의기양양, 곧 무슨 일이라도 낼 듯 덤벼들지만 이내 그 불꽃이 사그라들어 마지막쯤엔 근근이 일을 마무리하는 나 스스로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때마다 핑곗거리를 찾느라 바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 덤터기를 씌워야 종종걸음 치는 마음에  위안이 돼 곤 했으니깐. 

하지만 급한 일이 마무리되고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면 "넌 끈기도 인내심도 책임감도 없냐?" 하고 스스로를 야단쳤다.   

쌓여있는 원고 더미를 보고 있자니 괜히 머쓱해졌다. 머쓱한 김에 떠올려보자 싶어 내가 가진 못난 구석을, 약점을 하나 둘 들춰보기 시작한다. 

끝 심의 없는 인간이 된 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떠한 사건들이 하나, 둘 쌓여 만들어진 그러니깐 태어나고 나서 생긴 습관일 것이다. 

처음엔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일 때문에 마음 어딘가에 물집이 잡혔을 테다. 그 물집은 보기에도 흉했거니와 만지면 쓰라리기까지 했겠지. 

아물었다 싶으면 또다시 물집이 잡히고, 또 아물었다 싶으면 물집이 생기는 일이 반복되면서 굳은살로 변했을 것이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일을 바라보며 '내가 원래 그렇지'라고 무심히 넘겨버릴 수 있을 만큼 감각도 고통도 없는 굳어버린 살이 되어 어느샌가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갖고 태어난 나의 미운 구석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제일 싫은 것이 바로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이라는 것도 본디 타이밍이라는 것에 맞춰 흘러줘야 본인도 타인도 당혹스럽지 않을뿐더러 나의 절절한 감정까지 곧잘 전해질 텐데 내 눈물은 그런 것이 없다.

'섬집 아기' 노래만 나오면 세 살 아기가 그렇게 통곡을 하였고, 남이 울면 꼭 지가 더 슬프게 울더라는 엄마의 증언에 비춰본다면 눈치 없는 눈물샘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분명하다. 나의 눈물샘이 싫은 이유가 슬플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감격스러울 때도, 너무 좋을 때도, 억울할 때도, 분할 때도,누가 울고 있는 걸 보기만 할 때도.. 그러니깐 다른 무언가가 나설 틈도 주지 않고 눈물부터 무작정 흐른다. 

해야 할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삽시간에 얼어붙게 만들고, 어떤 때엔 꼭 무기처럼 쓰고 있다는 인상을 남길 만큼 내 눈물은 시간, 장소, 상황 같은 것과 무관하게 제멋대로였다. 

그게 그렇게나 싫다. 서른이 훌쩍 넘었으면 눈물샘이 마를 법도 하련만. 

나보다 훨씬 감성적인 친구도 있고,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와 타인의 슬픔에 몇 날 며칠 아파하는 친구도 나만큼 울진 않는 것 같다. 난 그들처럼 마음이 그다지 곱지도, 감성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눈물만큼은 '장인'수준이니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주목하면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도, 아주 가끔 지랄스러워지는 성질머리도, 의외의 구석에서 아집스러워지는 것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것도... 이참에 생각해 보자 하고 판을 벌린 건 맞지만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의 못난 구석이 엮여 올라오다니. 

우연히 알게 된 동네 동생이 있다. 그 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얼굴이 예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미소가 내 눈엔 너무나 고와 보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흔히 짓는 '눈은 웃고 입은 경직된 그런 미소'가 아니라 단전부터 끌어올린, 활짝 핀 꽃 같은 미소에 마음속으로 놀랐다. 늘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하에 먼저 다가가는 걸 꺼려 하는 나와는 달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언니! 밥 좀 주세요" 하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데 그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나였으면 절대 못했을 그런 말을 하는데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우리 집에선 할 일만 척척하곤 유유히 가시는 택배아저씨가 그녀의 집 대문을 여는데 그 모습부터가 너무나 달라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녀의 집 강아지를 마치 자신의 집 강아지처럼 반갑게 안아주었고, 그녀 역시 "아저씨 이거 지금 막 깐 바나나에요~ 먹고 가세요!" 하고 거리낌 없이 말을 나누는 그 모습에 입이 헉하고 벌어진 것이다. 

관계를 맺을 때 조심스러움이 항상 앞서서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와는 정반대인 그녀가 얼마나 부럽던지. 도무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녀의 꽃 같은 미소가 무척 탐나는 동시에 마음과는 달리 표현을 제대로 못해 다가가기 어렵다는 인상을 먼저 주는  나의 못난 구석이 더 돋보여 조금 비참하기까지 했다. 

물론 고쳐보려 노력한 것들도 있다. 눈물이 날 땐 허벅지를 마구 꼬집었고, 얼굴이 빨개질 것 같은 발표가 있을 땐 '제 얼굴이 원래 잘 빨개지니 놀라지 마세요.' 인사말로 미리 알리곤 했다. 인간관계를 위한 책을 읽기도 하고,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했을 때 모습을 상상하며 추진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약점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상태가 나아진 것이 있긴 하지만 끝내 완벽하게 없어지진 않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느라 가진 것에 귀함을 놓치는 삶은 살지 말자 다짐했는데 이럴 때면 나의 약점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가진 이가 부러워진다. 예전엔 부러움을 속으로만 느꼈다. 그렇게 내 안에서 키워진 부러움은 가끔 질투나 시샘이 되었다. 그러한 감정은 참으로 피곤한 게 질투와 시기같은것이 계속 쌓이면 결국 스스로를 무너트린다.  물론 적당한 질투는 나를 변화 시키는 데 동력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할 테지만, 질투는 언제나 넘쳐흘러 버리곤 했다. 갖지 못해 안달이 나고, 가진 이가 미워보이기도 하고.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이젠 질투와 시기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낼 주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눈부시게 빛나는 장점이 있다' 

물론 늘 먹히는 절대주문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데,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 데 분명 한 몫하는 말이다. 

여전히 나의 약점이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속에서 시기와 질투나 좌절과 같은 것으로 바뀌지 않도록 약점마저 돌봐줄 생각이다. 그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가 눈물이 좀 많아서요"라고 솔직히 말하고, "표현을 잘 못해서 그렇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라고 먼저 드러내는 것이다. 또 일은 무조건 마무리한다!라고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걸며 주변 이에게 나를 좀 채근해 달라 부탁하는 것.

"저 사람은 저런 점이 별로더라"라는 평판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저 사람은 저런 점도 있더라"라고 편안하게 받아들여주는 이도 늘지 않을까. 결국 약점마저 나의 일부다. 나부터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주는 거다. 

물론 고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과감하게 고쳐보는 것도 좋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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