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20
오랜만에 동네 뒤편으로 산책을 간 어느 날이었다. 언덕을 넘어 갈림길을 지나 나무 밭 사이로 난 길을 슬렁슬렁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보통의 산책이었다. 그런데 나무 밭이 끝나갈 무렵 앞서 가던 해리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본다. 낯선 사람이나 동물을 발견한 모양이다. 잰걸음으로 해리가 서 있는 곳까지 가서 보니 뽕나무 아래 웬 개 한 마리가 묶여있다. 땅땅한 몸매와 납작한 얼굴로 미루어볼 때 아메리칸 불리가 아닐까 싶었다. 아메리칸 불리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핏불 테리어와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등을 교배시켜 인공적으로 만든 견종으로 머즐이 짧고 체고가 낮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하고 있다.
녀석은 딱 벌어진 어깨를 하고 우락부락한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해리와 나를 보고도 경계를 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인적 드문 곳에 개를 묶어 놓고 갔을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고 보살핀 흔적이 있어서 무슨 사정이 있어 잠시 두고 간 것이겠거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 강아지가 있던 곳을 다시 찾았다. 당연히 주인이 데리고 갔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다른 준비 없이 찾은 것인데 아뿔싸 아직도 강아지가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이 녀석, 하루 이틀 사이 강아지가 눈에 띄게 말라 있다. 텅텅 빈 밥그릇과 물그릇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보니 주인은 이 녀석을 여기에 두고 한 번도 찾지 않은 모양이다. 가여운 표정을 한 강아지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일어나 힘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구조 요청을 하는 듯했다.
강아지에게 다가가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녀석은 비탈에 자란 나무에 묶여 있었는데 목줄이 그리는 반경 안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밥그릇과 물그릇은 어지럽게 널려 있고 먹이를 찾기 위해 그런 듯 주변에 있던 비료포대와 비닐은 갈가리 찢겨 있었다. 풀숲 한구석에는 작은 아이스박스가 놓여 있는데 열어보니 안에 사료가 들어있다. 혼란스러웠다. 주인이라는 작자는 강아지를 버린 걸까. 버린 거라면 왜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강아지를 버렸을까. 버리지 않은 거라면 강아지가 이렇게 말라갈 동안 왜 한 번도 찾지 않은 걸까.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강아지를 보니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산짐승이 내려올 수도 있는 곳에, 먹이를 구할 수도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게끔 이렇게 묶어 놓고 가 버렸을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아니,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강아지가 집을 찾아올 수 없도록 섬으로 데려가 유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내가 속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일단 강아지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물과 밥을 챙겨 다시 산으로 향했다. 엎어져 있던 그릇을 주워다가 물을 부어주자 강아지는 정신을 놓고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동안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이렇게 온몸으로 흡수하듯이 물을 마셔댈까 안타까운 마음에 얼른 마시고 기운 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혹시 갑자기 수분이 충전되어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물그릇을 빼앗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짧은 사이 녀석은 부어준 물을 다 마셔버렸다. 조금 시차를 두고 남은 물을 다 부어주었는데 아직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았는지 또다시 허겁지겁 물을 마셔댄다. 그렇게 2리터가 넘는 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 증상은 없었다. 가져온 사료를 부어주고 먹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한번 물을 떠다 주었다.
다음날도 뒷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강아지 집도 하나 챙겼다. 목줄이 닿는 곳 안에서 그나마 평평한 곳을 골라 집을 놓아준 다음 밥과 물을 먹였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 유기된 동물이 있으니 확인하라고 시청 동물복지팀에 전화를 했다. 사실 시청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계속 고민이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의 시 보호소는 보호 기간 내에 주인을 찾거나 입양되지 못한 동물을 선택적으로 안락사한다. 주인은 당연히 이 녀석을 찾지 않을 것이고, 불리는 사납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쉽게 입양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안락사당할 위험이 큰데 연락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렇지만 나도 개 한 마리를 더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았고 이렇게 그냥 놓아둘 수도 없는 일이니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전화를 걸었다. 유기된 동물을 만날 때면 죽임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 없이 보호를 요청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인간에 의해 태어나고 길들여졌지만 결국엔 버려진 동물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이 아닐까.
고민 끝에 시청에 전화를 하였으나 담당 공무원은 예상 밖의 답변을 내놓았다. 목줄이 있는 개는 주인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유기동물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황상 유기된 확률이 매우 높은데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목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담당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보호소에서 안락사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던 내가 이제는 이 강아지는 보호가 필요한 동물이라고 애써 설명을 해야 했다. 다시 한번 강아지가 유기된 장소가 인가와 떨어진 산길이며 강아지가 매우 말라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기 혹은 방치된 것이 확실하니 보호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한번 나와서 살펴보겠다고 한다. 통화를 끊기 전에 최근 시 보호소에서 안락사 사례가 늘어서 우려스럽다는 의견도 전달했다.
그렇게 강아지는 보호소로 갔겠거니 했는데 다음날에도 녀석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밥을 챙겨준 흔적이 있다. 주인일까, 시청 담당자일까. 시청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담당 공무원이 나와 확인을 했고, 뜻밖에 녀석의 몸에 내장된 동물등록 인식 칩이 있어서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주인은 유기한 것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잠시 묶어둔 것이니 곧 찾아가겠다고 했단다. 그리고 아직도 강아지가 거기에 있냐면서 주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데려가게 하겠다고 한다. 녀석에게 주인이 있다니. 게다가 동물 등록까지 되어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놀라웠다. 그런데 이렇게 강아지를 방치하는 사람이라면 강아지를 다시 데려간다고 해도 다시 유기하거나 학대하지 않으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담당 공무원에게 강아지의 처참한 상태와 이러한 우려를 다시 전달했지만 그는 주인이 있는 강아지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답했다. 동물도 행복한 도시를 내걸며 도내에서 처음으로 동물복지과를 신설했다는 시의 소극적인 행정에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주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을까. 얼마 전 TV에 불리를 키우는 연예인의 모습이 나왔다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키우고 싶다며 따라 키우게 되었을까, 사납고 공격성이 높다고 알려진 맹견을 과시용 혹은 전시용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이런 개를 키우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키우게 되었을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시작되었든 결말은 스스로 삶으로 들이고 이름을 붙여주고 동물 등록까지 했던 강아지를 처참하게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예상과는 다른,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만났을 수도 있다. 개 물림 사고가 연이어 보도되면서 왜 이런 사나운 개를 키우냐며 손가락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강아지에게 감당할 수 없는 병이 생겼거나 본인의 신상에 큰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를 이런 방식으로 유기하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그것에 이런 사정이 정상참작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날 다시 가 보니 강아지는 없었다. 밥그릇과 물그릇,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쓰레기들은 모두 그대로고 개만 사라져 있었다. 악몽 같은 장소를 벗어난 강아지를 생각하며 부디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든,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