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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Oct 05. 2023

쓸모없음의 쓸모를 찾아

우리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고, 절실함도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시간을 만지러 한적 없으나, 시간은 늘 나를 만졌다. 시간이 무섭지 않았으나, 시간이 나와 같이 흘러간다는 것이 싫었다” 고 하더군요. 


시간이 기울어 갑니다. 시간이 나를 만진만큼 정글에서 저는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이 익숙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고인물의 증거입니다. 저는 사람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일에 익숙해졌고, 시간에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 요구하는 익숙한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밤의 여행자들’ 이라는 소설에는 ‘요나’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정글’이라는 여행상품 프로그램 기획자입니다. 오랜 시간 회사를 위해 일 해왔지만 점점 신선한 프로그램을 담당하기 보다 허드레 일만 떠안게 됩니다. ‘요나’에게 회사는 실적과 숫자로 움직이는 곳이었습니다. 소설 속 회사는 사실적이면서 상징적입니다. 이름이 ‘정글’ 이니까요. 홧김에 내민 사표에 팀장은 오히려 출장을 빙자한 재난여행 프로그램 참여를 제안합니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찾으려 하는 것일까요?


그녀는 출장지에서 ‘의도된 재난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집중하고,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지만 회사에서는 소위 ‘사일로(Silo)’현상이 만연합니다. ‘사일로(Silo)’는 곡식과 목초를 쌓아 두는 창고를 뜻하지만, 조직내 또는 부서간 장벽, 부서이기주의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안에서 나만의 성을 쌓은 채 주변인과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쫓는 현실은 인간의 쓸모만이 회사내 남은 공간을 소유하는 작금(昨今)의 현실이 투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강유정 문학평론가는 ‘밤의 여행자들’에서 보여주는 회사라는 세계는 ‘감수성’이 사라진 현실이라고 얘기하더군요. 감수성’이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맥락을 이해하며 관계를 공감하는 능력을 말하지만, 이른바 ‘감성’은 뇌에서 감정과 기억이라는 정보를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적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감성’과 ‘감수성’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회사는 ‘감성’만 있고 ‘감수성’이 부재한 공간이라는 평론에도 공감이 갔습니다. 비단 회사만 그럴까요? 우리가 처한 삶과 현실도 이익만을 따지는 회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존재하고 숨쉬는 이 공간 마저도 ‘감수성’이 사라진 ‘정글’일지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헌 책방을 찾았습니다. 빈틈없는 공간에서 헌 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귀에서 맴돌았습니다. 저는 얼룩지고 구겨진 책갈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풀내 나는 지식더미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낙낙한 공간에서는 여름날의 푸른 숲 냄새 가득한 설렘과 울림도 발견했습니다.

문득, “낡음은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라는 문장이 뇌에서 여름 햇빛처럼 이글거렸습니다. 풀내 나는 이 곳에서 스스로 쓸모없음의 쓸모를 입증해 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마주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표정 없는 사람들 얼굴 사이로 저는 영락없는 흑백 무성영화에 등장하는 이방인이 된 것 같습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 속 의도된 재난프로그램과 영화 트루먼 쇼처럼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 짜인 시나리오속에서 기획된 삶과 주어진 역할만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정글’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이 내 운명을 결정합니다. 시간이 기울어 가는 동안 내 삶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아마 회사였을 것이고, 회사에서 ‘그 손’은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의도된 재난프로그램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기획된 시나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쓸모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정글’에서는 쓸모없음에서 쓸모를 입증해야만 살아남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오직 자신의 역할만을 수행했지만, 그녀는 ‘감성’에서 ‘감수성’의 세계로 삶을 바꾸는 선택을 했습니다. 요나’는 아마 스스로 다시한번 쓸모없음에서 쓸모를 입증하려 했나 봅니다. 


시간이 기울어 가면서 정글에서 저의 쓸모도 곧 다할 지 모르겠네요. 김훈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늙은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를 잡고, 젊은 것은 외곽 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중심에 있는 늙은 것은 말라서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수 백 년의 세월을 이어가지만, 그 굳은 단단함으로 나무를 지탱한다. 젊은 나이테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안쪽으로 밀려나고 다시 나무의 외곽은 젊은 나이테로 교체된다”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니 이 문장이 가을볕에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거리며 다가왔습니다.  


누군가 이런 글도 보내주었습니다. 일에 능숙한 사람이 여유를 부리는 것이 참 멋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에 능숙한 사람이 절실함이 보일 때 더 멋있어 보입니다” 쓸모없음의 쓸모를 찾는 저와 여러분은 필시 일에 능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절실함도 있는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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