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함'의 반대말은?

늙어가는 이슬이에 대한 소회

by 양은우

이슬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이 2006년 11월이었으니 벌써 해수로 만 12년이 넘었다. 개의 나이를 사람처럼 세는지 아니면 만으로 세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이슬이의 나이를 물으면 애써 12살밖에 안 됐다고 말하곤 한다. 한 살이라도 더 어려 보이게 말이다. 12년이 넘는 세월동안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이슬이지만 재작년 말부터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슬3.jpg 나이 들면서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이슬이


노화의 증상이 나타나는 이슬이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귀가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식구 중 누구라도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달려 들어 손가락을 깨물며 반갑게 맞아주던 아이가 이제는 사람이 들고 나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래도 깨어 있으면 달려와 반가운 티를 내지만 잠이라도 자고 있을 때면 옷을 다 갈아 입고 흔들어 깨울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이슬이에게 택배 기사는 공공의 적이었다. ‘띵동’하는 초인종 소리만 들리면 득달같이 현관문 앞으로 달려나가 정신 없이 짖어 대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했건만 이제는 그 모습도 사라지고 말았다. 밥을 먹을 때면 늘 옆에 와서 ‘한 입만 나눠 먹자’며 조르던 아이가 이제는 종종 밥 먹는 줄도 모른다.

잠이 늘고 움직임이 줄어든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이다. 싱크대 서랍을 열고 비닐봉투를 꺼낼 때면 산책 나가는 줄 알고 좋아서 큰 소리로 짓던 아이가 이제는 산책 나가는 것을 귀찮아 한다. 억지로 끌고 나가도 집 앞 백미터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마다 않고 신이 나서 돌아다니던 아이지만 이제는 사정사정해야만 겨우 인심 쓰듯 걸으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햇살 따뜻한 봄이 오면 너른 잔디밭에서 달리기를 하곤 했는데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나를 제치던 아이가 이젠 뛰는 걸 포기했다. 재미 삼아 신나게 쫓아다니던 까치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관심 없이 그냥 지나치고 만다. 대신에 잠이 늘었다. 하루 중 상당히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낸다.

이슬1.jpg 꼬질이 대장 이슬이. 미용을 해야겠구나


편해지는 나의 삶


이슬이는 유독 내게 집착을 했다. 마치 껌 딱지처럼 찰싹 내 곁에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슬이의 잠이 늘고 귀가 어두워지면서 내 삶은 편해지고 있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옷도 갈아입기 전에 달려드는 통에 귀찮았던 것도 사라졌고, 택배 기사가 오면 서둘러 이슬이를 안고 작은방으로 건너가야 할 일도 없어졌다. 이제는 마음 놓고 문을 열어도 걱정할 일이 없다. 어디를 가든 졸졸 따라 다니지 않으니 그것도 편한 일이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며 산책을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것도 요긴한 핑계거리가 아닐 수 없다. 깨어 있는 동안 장난감을 던져 달라며 조르지 않으니 그것 역시 편해졌다. 이슬이의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나의 삶은 점점 편해지고 있다.
하지만 몸이 편해지면 마음도 편해져야 하건만, 몸이 편해질수록 내 마음은 마치 칼에 벤 손가락이 욱신거리듯 자주 아려 온다. 나의 편함이 바꾸어 말하면 이슬이의 기력이 점점 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에. 때로는 하루 종일 옆에 붙어 놀아 달라, 안아 달라 귀찮게 굴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젠 먼저 나서서 놀자고 해도 이슬이가 귀찮아 한다. 아무리 추워도 하루 한 번씩은 이슬이를 데리고 나가려 하지만 오히려 나가지 않으려는 이슬이를 보면 마음이 아파 온다.

이슬5.jpg 얼굴의 종기도 꽤 커졌다


'편함'의 반대는 '서러움'


어느 순간인가부터 이슬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직은 이별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 건 아니지만 몇 년 안에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 것만 같아 무섭기만 하다.
이슬이가 나이 들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내가 이슬이로 인해 겪었던 사소한 불편함이 진정 불편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건 불편함이 아닌 행복한 기억의 파편들이었음을. 서로가 따뜻하게 나눌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자락임을. 그래서 나의 삶에서 이슬이가 빠져 나감으로 인해 생기는 상대적 편함이 내게는 진정한 편함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편함’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불편함? 아니다. ‘편함’의 반대는 ‘서러움’이 아닐까 싶다. 이슬이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무엇인지 모를 서러움이 느껴진다. 내 몸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이슬이와 같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나는 이슬이가 만들어주는 내 삶의 편한 공간들이 전혀 반갑지 않다.

이슬2.jpg 그래도 여전히 천사같기만 한 이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