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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널리즘이 없다는 이들에게

Job - 만인의 저널리즘, 그래서 우리가 언론이고 제가 기자입니다

by 사월

한 달 전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가장 고민했던 건 과연 내가 이런 강연자, 또는 게임 기자라는 역할에 충분히 걸맞는 권위를 가진 사람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다른 이들은 나를 기자님이라고 불러주지만, 과연 내가 내 스스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서 아는 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냐 하는 고민.

a1.jpg 재미있었던 경험이었죠

이는 내가 이 직업을 얻고나서부터 계속 고민했던 명제이기도 했다. 나는 기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가 기자(Editor, Reporter, Journalist, Columnist 등 그 중 무엇이라도)라면, 내가 이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뭐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같은, 뻔한 고민 말이다. 더군다나, 게임 기자라는 특수 분야에서라면 더더욱. 기자, 언론, 매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운운.


그래서, 내가 강연에서 이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현대에 와서 과연 기자라는 직업과 역할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기자, 그리고 언론? 기자라는 직업에 있어서 이 직업이 사라질 때까지 변하지 않을 본질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정보를 다루고 제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이 정보라는 것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변했느냐가 중요했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 이상 기자, 그리고 언론이란 저절로 생겨난 권위에 기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저마다의 저널리즘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만인의 저널리즘, 이런 논조는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제와 현실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개인 간의 지식의 격차-정보의 격차는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이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함량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 개개인이, 공공이 축적한 지식에 전에 비할데 없이 빠르고 쉽고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접근성(Accessibility) 에서의 혁명인데, 이 혁명의 주요 골자는 이렇다.


1. 정보의 제공자와 수취자의 경계가 없다.

2. 정보의 시차와 공간차가 없다.

3. 정보의 전달 형태가 다양해졌다.

a2.jpg 자간 좀 잘 맞출걸

배경부터 결론까지 죽죽 쓰자면 각 항마다 한타래 씩은 나오겠지만, 어쨌든 간단히 하자면 이 변화는 모두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생긴 변화들이다. 그 화룡점정은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기기 덕분에 우리는 진정으로 물리적 제약에서 해방됐다. 또 SNS의 등장으로 인해서 우리는 모두가 저마다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창구를 가지게 됐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SNS 계정을 스스로의 관보처럼 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을 대표할 지면을 갖고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그 사람의 동의 하에 한 사람을 대표하는 글과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또 이를 전달하는 매질 또한 활자의 한계에서 벗어났다.


고가의 카메라, 통신 장비, 기록용 장비들, 수 시간에 달하는 시차,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하는 물리적 제약들. 이제 이건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 누구나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해서, 약간의 설명을 곁들여, 공공의 커뮤니티에 배포한다. 우리가 21세기 들어서 가지게 된 각종 커뮤니티들은 이전의 지역 커뮤니티에 비해서 훨씬 광범위한 대상에게 즉각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이제 언론과 관중들의 차이는 인위적으로 주어진 접근 권한의 차이들 뿐이다. 이를테면, 기업 출입증 같은 것.


그렇게 되면,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디렉션이다. 얼마나 새롭고 옳은 디렉션을 제안할 수 있는가, 다른 언론이 제공하지 못하는 편집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즉, 취재의 비중은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그 가공의 비중이 올라간 셈이다(물론 여전히, 취재는 중요하다).


더 이상 언론은 정보를 독점하지 못한다. 과거의 기자들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정보를 독점해왔다. 모든 정보는 입수 경로 뿐만 아니라 그를 전파하는데도 매우 좁은, 정해진 방법이 있었으며 모든 정보는 물리적인 형태를 빌려야 했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다. 또 대부분의 정보는 사진 혹은 쓰여진 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래서 이제 언론은 정보의 헤게모니를 모두 쥐고 흔들 수 없다. 아무튼 요지는 그것이었다. 강연의 진행을 맡았주셨던 이경혁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이전까지 언론이란 어딘가에 깃발을 꽂고 저게 옳으니 모두 달려가라고 하는게 당연한 역할이자 사명이었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나는 그 여론이라는 것을 몇 명의 언론인이 호도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는 호도할 것이고 누군가는 거기에 감명 받겠지만 그것이 꼭 언론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42987191_434630353609944_3147701709271203840_n-tile.jpg 새로운 방법, 새로운 형태, 새로운 큐레이팅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다. 언론은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권위를 누리지 못한다.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 여론이 민중을 계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나는 퍽이나 웃기다. 이제 언론의 책임은 여론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만들어내는 여론의 방향성을 가이드하는 역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슷해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 기자가 모두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대변해줄 타성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정리하기 어렵고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말이다. 모든 언론과 매체는 커뮤니티에 근간하고 있고 그 커뮤니티라는 근본, 사람의 모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다만 예전의 언론이 보다 날 것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어떤 형태로, 어떤 방향성을 갖고 전달하느냐’ 에 달렸다. 지금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큐레이팅 매거진이 바로 그것이고, 나는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3가지 변화에 의한 급부로 정제되지 못한 정보가 범람하고 많은 이들이 이를 이용한다. 언론은 이제 그저 사실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그에 대한 분석과 큐레이팅을 제공해야 한다. 또, 정보의 형태 또한 그 정보에 알맞게, 관중이 접하기 좋은 최적의 형태로 변화해야 한다.


이는 커뮤니티의 의미가 시대를 거치며 변화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과거의 각 언론이 기댄 커뮤니티가 전적으로 지역 사회였다면, 이제 커뮤니티 또한 자기선택에 의한 취향 집단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태어날 때 쥐어진 성별, 지역, 나이 같은 요소가 아니라 자신의 흥미와 취향에 따라 군집한다.


그래서 이제 언론은, 독보적이고 독자적인 커뮤니티 풀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 풀은 차별성에서 온다. 페이스북이 성공한 것도 기본적으로 이 커뮤니티 풀을 빌려주는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매체는 페이스북에게서 커뮤니티 풀을 빌리고 있고, 그렇게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야말로, 각 언론이 가질 수 있는 권위의 근간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커뮤니티를 형성, 유지하느냐에 있다. 이건 매체 그 자체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기자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면 도태된다. 사건의 현장에서 사진 한장과 함께 이런 일이 일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 이 나라에서 5천만 명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절대로 그런 단순 사실 전달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그 다음의 2차적인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그 사건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어떤 배후가 있었으며, 결론해서 우리는 이제 이걸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큐레이팅, 그리고 크리티시즘(Criticism). 이제 이걸 할 수 없다면, 언론, 매체는 사그러진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냐 하면, 모든 것은 우리가 정보와 여론의 선봉에 있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말도 안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이미 그렇게 변했다. 그렇다면 이제 독자적인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받아들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여, 최적의 루트를 통해 제공하여, 트렌드를 창조하거나, 혹은 더욱 세련된 것으로 만들면 된다. 쉽게 말하면, 이제 뉴스 또한 흥미와 취향이 중요한 ‘콘텐츠’ 의 영역이라는 것. 때문에 이 특성은 다른 ‘콘텐츠’ 에도 적용될 수 있다.

a3.jpg https://nyti.ms/2FWQ9Ji
a5.jpg 지구상에서 가장 잘 변화하고 있는 기성 언론이 아닐까 - https://nyti.ms/2n52hff

과거 기자-언론인들은 일종의 계급이었고 계층이었다. 계급이란, 특권에 의해 형성된다. 그 특권은 정보의 접근 권한과 제공 권한이었고, 이제 그 특권은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계급으로서의 기자는 해체될 수 밖에 없다(갑작스런 매우 맑시즘스러운 말투는 의도된 것입니다.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공산당이 싫어요!). 아직까지도 과거의 특권 의식에 얽매인 구시대의 언론인들은 도태된다.


나는 그래서,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커뮤니티와 결합된(혹은 커뮤니티가 리드하는) 매체가 우리가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살아남을 언론의 형태의 갈래 중 하나라고 믿는다. 나와는 결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맥락의 시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어떤 이들은 하루에 5분 짜리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이 분투를 하고, 어떤 이들은 같은 기계를 두고도 자신만이 전달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짚어내기 위해 고민하고, 대자본의 언론들은 변화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한다. 나는 그렇게 잘 해내고 있는 이들이 부럽고 질투를 느끼면서도 또 존중하고 존경하게 된다. 내가 계속해서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렇다.


물론 여전히, 독보적인 취재 역량과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자와 언론의 사명 중 하나다. 이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을 거고 언론의 기틀은 이 취재력과 편집력 위에 설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역할에서 천부적인 우위에 있다는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 이는 읽히지 못하는 글은 쓸모가 없다는 아주 근원적이고 상식적인 명제에서 근간한다. 고상함 떨다가 아무도 읽지도 보지도 않게 된 기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철저히 관중의 입장에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떻게 하면 읽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정보, 커뮤니티, SNS, 취향 등등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번에 정리하려니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략했지만, 결론은 어쨌든 명확하다. 이것이 내가 가진 저널리즘의 근간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게임 기자 주제에 과연 저널리즘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냐고 비아냥대는 구세대 언론인들에게 던지는 반론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앞서있고, 당신들은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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