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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Jun 19. 2024

[독후감상] 책 읽어주는 남자_베른하르트 슐링크

책을 읽고

1. 마트료시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듯이 나는 1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이 소설이 서른여섯 여자와 열다섯 살 소년의 용납하기 어려워 보이는 연애 소설인 줄 알았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2부와 3부를 거치며 작가의 놀랍도록 치밀한 계산 하에 관능적이고 외설적인, 하지만 문학 특유의 우아한 문체를 잃지 않는 장면(love affair)들이 1부에 포진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계산에 따라 독자는 한 사춘기 소년의 황홀하고도 강렬한 로맨스에 흠뻑 젖어 들었고, 그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애 상대였던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이 처했던 역사적인 사건과 직면하게 된다. 소년을 만나기 전 여자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감시원으로 복무하며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영국군의 공습으로 교회당에 갇혀 있던 포로들이 모두 불에 타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그 속에서 생존한 엄마와 어린 딸의 증언으로 인해 전범자로 기소되어 재판장에 서게 되어 처벌받는다는 내용이 2부와 3부에 나온다.


나는 소설을 모두 읽고 문득 러시아의 민속 인형인 '마트료시카'가 떠올랐다. 겉에 큰 인형을 벗기면 그 안에 똑같은 모양의 중간 인형이 나오고, 중간 인형을 벗기면 역시 그 안에 똑같이 생긴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공예품 말이다. 이 소설의 외향은 개인의 인생(로맨스)이지만, 한 겹을 걷어내면 국가의 역사(나치 전쟁)가 드러나게 된다. 둘은 다른 스토리를 병렬로 각각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트료시카 인형들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소년이 자기보다 연상인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며 치명적인 섹스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시점에 묘사된 심리를 살펴보자.


"나는 생각을 하여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결론에 집착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행동은 별개의 것이며 결정을 따를 수도 있지만, 꼭 결정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도 많았고 또 하기로 하고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행동한다…. (중략) 물론 나의 생각과 결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행동은 행동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은 나름대로의 원천을 갖고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p.31~32)


그는 어쩌면 아직 미성년인 자신이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벗어나서 일탈하면 안 된다는 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성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결정까지 할 수는 있겠지만, 그와는 정반대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개인이다. 동시에 그것은 집단에도 적용되어 나치 정권을 용인하고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고 추앙했던 독일 국민들의 행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이다. 작가는 1부에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면서 자연스럽게 2부와 3부에서 등장하는 사람들,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의 일탈을 가리키고 있다.


갑자기 떠나버린 여자 때문에 소년은 죽음과도 같은 실연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많은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소년이 택한 방법은 마비되는 것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무의식의 영역으로 현실의 의미를 욱여넣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죽음보다 더 괴롭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 세대들이 취한 방법도 동일하게 마비되어 무자비하고 무관심을 지닌 채 지난 과거에 대한 불감증으로 버티는 일이었다.


"범행자들의 간헐적인 언급에서도 가스실과 화장용 화덕은 일상적인 주변 환경으로 등장했다. 범행을 저지른 자들의 삶 자체 역시 몇 가지의 기능으로 국한되었고, 그들은 마취되거나 술에 취한 듯한 무자비와 무관심, 불감증을 보였다. 내가 보기에 피고인들은 여전히 이러한 마비 증세에 사로잡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아 보였으며 그러한 상태로 거의 화석화되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널리 번진 마비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마비가 범행을 저지를 자들과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즉 나중에 판사나 참심원, 검사나 의사록 기록자의 자격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게 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아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던 당시에, 그리고 내가 동시에 범행자들과 희생자들,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을 서로 비교하던 당시에,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p.134)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운명에서 더욱 빠져나오기 힘들고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슬쩍 넘어가기도 힘든 것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내가 당시에 나의 세대에 대해서 공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나는 훨씬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p.216)


이렇듯 인생과 역사의 공통점을 탁월하게 관측한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통렬하고 심오한 영역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더 이상 벗겨지지 않는 마지막 마트료시카를 놓고 독자들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각자의 메시지를 찾아내기를 바라는 듯하다.



2. 사건의 지평선


최근에 윤하라는 가수가 실연의 아픔을 의연하게 이겨내는 심경을 얘기하는 '사건의 지평선'이란 노래가 좋은 호응을 받으며 히트한 일이 있다. 여기에서 그녀가 언급하는 '사건의 지평선'이란 말은, 원래 현대 물리학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블랙홀의 경계면을 넘어가면 빛마저 빠져나오지 못하고 관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블랙홀의 안쪽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알 수 없게 된다. 개인에게도, 대중에게도 어떤 사건들은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이 존재한다. 소년에게 그것은 한나를 배반했다는 죄책감이었고, 독일 국민들에게는 나치의 이름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해야만 했던 치욕적인 행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마트료시카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블랙홀 내부에서는 우리가 인지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분명히 자기만의 이유로 어떤 현상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좇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진실과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운 것이다. 자신에 대해 늘 약간은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안타까운 진실이요 안타까운 정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싸움이 그녀의 싸움이었다." (p.170)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너무나 궁금하지만, 그래서 오해를 가지고 혹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인생과 역사에서 벌어지는 불가역적인 사건들을 해석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밝히는 우주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운영(작동) 원리, 즉 자연과학적 진리가 '우연'과 '불확정성'으로 귀결되는 추세는 이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다.


"한나가 실제로 나의 고향 도시를 떠나게 된 이유와 당시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 사이의 괴리가 내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놓았다.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뀌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p.171)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 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그들은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겐 그들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요." (p.193)


그러나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 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p.200)



3. 오디세이아


우리에게는 사건의 지평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사건들이 각각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평상시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그 기억이 다시 의식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경험도 한 번쯤은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소설 속의 소년처럼 누군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가 그이가 이유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떠나버린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건 마치 칼에 찔리며 내 안의 모든 것들이 찢기며 흩뿌려지는 느낌이었는데, 회복하는 과정에서 내가 예전에 누군가의 마음을 똑같이 난도질했던 수십 년 전의 기억이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랐던 일이 있었다. 최근에는 불안하고 거친 일상을 지나고 있는 이십 대 중반의 아들 녀석의 방황을 지켜보며 과거 비슷한 시기에 내가 똑같은 짓을 저지르며 지냈을 때 가슴 졸이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천체 우주에서는 빛이 블랙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의 인생에서는 가끔 갇혀 있던 기억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과거에서 현재로 개입하며 시간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곤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이 사실만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접하여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 (p.273)


인생과 역사는 온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인을 분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하게 이해되고 설명되는 사건들이 중단되지 않고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별들이 운행되는 놀랍고도 장엄한 서사이자, 동시에 가치를 부여하기 이전에는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진공 상태의 에너지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언어를 배워 읽고 쓰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고 기록을 남겨 후대에 전하며 우주의 수수께끼를 언젠가는 누군가가 풀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비밀이 완전히 밝혀지기 전이어서,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문맹자이다. 글자는 보이지만 읽을 수도 없거나 의미의 해독이 불가능하기에 그렇다는 뜻이다. 한나가 자신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뜻을 과연 어느 누가 헤아리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또한 중단되지 않는 항해를 영원히 반복하는 방랑자기도 할 것이다. 광활한 우주와 무심한 역사와 난해한 인생의 한복판에서 귀향과 출항을 결코 멈추지 못한 채 영원히 반복하는 창백하고 푸른, 그리고 아름답게 흔들리는 작은 점 點처럼 말이다.


"나는 당시에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었다. 나는 <오디세이아>를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읽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귀향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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