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형 인간에게 무계획 여행이란.
이번 여행은 뭔가 시작부터 삐그덕거렸다. 주말에 집에 있는 게 괴로워 충동적으로 잡은 리조트에는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었다. 최소한 사우나라도 있으면 애들이랑 목욕이라도 할 텐데 그 흔한 사우나도 없는 리조트라니... 추워서 밖에 돌아다닐만한 날씨도 아니고 구경할 곳도 없었다. 그나마 놀이공원이 가깝길래 아이들에게 야간개장에라도 데려가야지 마음먹었는데, 남편은 컨디션이 안 좋다며 계속 눕거나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나오질 않았다.
화가 났다.
아이가 아프면 마음이 아픈데 이상하게 남편이 아프면 화부터 난다. 그렇다고 평소에도 남편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부부는 사이가 꽤나 좋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아프면 나는 이상하게 화부터 났다. 이럴 때는 남편이 평소에 얼마나 잘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아이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남편에게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아 쫌, 빌빌대지 말라고.
계획이 어그러지고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는 것. 굳이 멀리 나왔음에도 시간을 버리는 것 같은 어영부영한 시간들, 이런 것들에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조금만 계획을 세웠어도 알차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따라나서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내가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늘 이런 식으로 시간을 어영부영 보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우울하기까지 했다. 계획이 어그러지고 되는 건 없고 쓸데없는 데에 돈만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집에나 있을걸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계획을 세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이 없거나 어그러지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계획이 어떤지 궁금해하지 않고 어딜 가나 자기들끼리 노느라 신났고, 남편은 즉흥적으로 검색해서 들어간 집이 놀이방이 있는 맛집이라며 신이 났다. 나만 이 '계획 없는 일정'에 괴로워하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지나가듯 하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여보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화부터 내더라.
뜨끔했다. 지금도 뜨끔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순도 100% 진실이라.
물론 바로 인정하진 않았다.
여보가 밤에 늦게까지 술 먹고 게임할 땐 쌩쌩하다가꼭 내가 애들 좀 봐달라고 할 때나 급하게 필요할 때 아프다고 빌빌대니까 그렇지.
그러나 말하면서 스스로의 모순을 알아차렸다. 내가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남편은 군말 없이 안방문을 닫아주고 쉬게 해주는 사람이란 걸. 나는 왜 남편이 아플 때 군말 없이 쉬게 해주는 사람이 안 될까. 나는 왜 일정이 흐트러지거나 계획이 없는 여행에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여행을 간다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라서 그럴 수 있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여행을 가면 집에 있는 것보다 하나라도 더 알차게 혹은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욕심이 나서 그럴 수도 있다. 어영부영 집에서 보내기 싫어서 나왔으면 나와서는 빠릿빠릿 움직이고 싶은 거다. 내 욕심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주중엔 일하느라 쉬지 못하고 주말엔 애보느라 몸이 무겁다. 가뿐한 여행이 애초에 불가능한 거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일하는 부모의 삶을 살면서 추억을 만들겠다고 주말에 차를 몰고 나왔으니 피곤할 수밖에. 애초에 여행이 아니라 도피였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생각했다. 망한 여행도 추억이 될까?
여행이 계획대로 잘 안 풀렸을지는 몰라도 추억은 되겠다. 아 그때 리조트에서 아무것도 없어서 산책만 하고 바로 밥 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산속이라 하늘에 별이 쏟아지듯 빛이 났었지. 다음 날에 어린이박물관에서 본 연극에서 막둥이 셋째가 얼떨결에 무대로 올라갔었지. 이런 일들, 예상도 못했고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 이런 것은 나중에 생각이 날 것 같다.
꼭 계획대로 실행된 여행만 추억이 되는 건 아니다. 망한 여행도 추억이 된다. 그리고 망했다의 기준도 내 기준이지 남편과 아이들은 자기만의 느낌으로 각자 서로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삶의 먹구름을 걷어 내 줄 장소라고 기대하며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은 조심하는 게 좋다. 가는 건 가는 거지만 거기선 행복만이 가득할 거라 믿는다면 실망할 것이다. 인간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15분을 넘기기 어렵다.
_ 알랭 드 보통 <나를 채우는 여행의 기술> p25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며 이 구절이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여행 가는 건 가는거지만 너무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거라고. 좋은 여행일지 망하는 여행일지는 가보지 않고서는 모른다고. 인간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15분을 넘기기 어렵다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온전한 15분이라도 행복을 누렸나.
좋은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삶이 여행이라면 완벽한 계획을 짜서 일정대로 움직이는 삶이 꼭 최고는 아닐 것 같다. 때로는 둘러가고 고꾸라지고 고꾸라진 김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그러다가 새로운 길도 가보고... 그때그때 온전하게 15분씩의 행복을 누리며 불안을 벗삼아 살아가는 삶이 더 추억이 많은 삶이 되지 않을까.
이쯤되니 내가 주말마다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여행을 한다는게 인생을 100년짜리 계획으로 살겠다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미션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의 시간에서 최소한의 시간인 15분이라도 누려야겠다.
짜증 내지 말아야지. 피곤할 때 여행 계획을 촘촘히 잡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지. 그냥 가봐야지.
이렇게 또 하나씩 배워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