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인터뷰를 마치고 대강의 촬영스케줄을 잡았다. 총 3번 촬영할 계획인데 한 번은 부부 인터뷰, 한 번은 가족여행, 한 번은 워킹맘의 일상을 위주로 촬영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1. 첫 촬영_ 부부 인터뷰(우리 집)
첫 촬영인 부부인터뷰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막상 카메라 수를 보고 우리는 얼어버렸다.
커다란 카메라가 한대 들어오네 했는데,
두대,
세대,
네 대?
그렇게 커다란 카메라가 계속 들어오면서 하나도 둘도 아니라 네 대나 눈앞에 설치되는 걸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커다란 카메라 렌즈들이 우리를 향해 켜지고 카메라들 틈에 의자를 갖다 두고 피디님이 앉으셨다. 어디를 보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피디님이 먼저 자기를 보고 대답하면 된다고 하셨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피디님은 내가 상상하던 '방송국 사람들' 이미지 같지 않게 수수하셨다.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는 어느 아이친구엄마들과 비슷하게 친숙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역시나 그녀도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워킹맘이셨다.
내게 마이크를 끼워주시며 그녀 자신도 일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브런치 글이 많이 공감되신다고 속삭여주기도 하셨다. 내가 긴장하고 있어서 그렇게 긴장을 풀어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막상 카메라가 돌고 인터뷰가 시작되고는 입이 자꾸만 말랐다. 윗니가 자꾸만 아랫입술이 붙어서 웃겨 보일 것만 같았다. 물을 중간중간 마시기도 하고 남편 쪽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어찌어찌 부부인터뷰를 마쳤다.
그 전날 무슨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각자 자기만의 대답을 해서 웃기기도 했고 제대로 말을 한 건지 몰라 걱정되기도 했다.
대본도 없고 정답도 없는 질문에 대해 두 시간이 넘게 대답을 하고 촬영을 끝나고 나서 거울을 보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망했다.
이게 방송에 나가다니... 흑역사가 생성되었다.
이날이 첫 촬영이라 뭐라고 말했는지 잊고 있었는데 방송이 나온 날 보니 우리가 했던 말 중에서 '대한민국에서 다둥이 가족으로 사는 것'과 '아이를 낳고 나서 확장된 부부의 세계'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뽑은 것 같았다.
2시간이 넘는 인터뷰 중에서 키워드를 뽑아 3분 정도 방송에 나오는 걸 보며 감탄했다. 다큐란 정말 날것 그대로 찍고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키워드가 될 만한 부분을 뽑아내는 거구나.
2. 두 번째 촬영_ 가족여행(여수)
두 번째 촬영은 우리가 부부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이었던 '다둥이 가족이 여행을 가면 겪는 불편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일정을 잡게 되었다.
우리가 5인 가정이라 4인 기준인 호텔은 예약이 어렵다는 점, SRT 같은 교통수단에서도 어린아이가 여럿이라 항상 긴장하고 탄다는 점 등을 인터뷰 때 이야기 했는데 전혀 몰랐던 고충이라면서 우리의 여행을 따라가도 되냐고 물으셨다. 그렇게 여수여행을 촬영카메라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아침 8시 집에서부터 시작된 촬영은 카메라와 함께 수서역까지 가며 차차 실감이 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카메라를 두대나 달고 다니는 우리 가족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민망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애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SRT를 타고 아이들과 여행을 간 건 부산과 경주에 이어 여수는 세 번째였다. 첨에 부산에 갈 때만 해도 아이들이 기차에서 힘들어해서 의자에 앉은 시간보다 열차 칸들 사이에 서서 밖을 같이 내다보고 달랬던 시간이 더 길었었다. 이번엔 7살 5살이 되어서인지 전보다는 잘 앉아서 갔다. 그럼에도 혹시나 아이들이 큰 소리를 내거나 소란을 피울까 봐 단도리를 시키긴 했다.
여수까지 가는 기차에서 아이들은 카메라감독님과 많이 친해졌다. 커다란 카메라를 구경하기도 하고 간식도 나눠먹기도 하며 우리 가족 여행에 카메라감독님들도 함께 가는 것에 익숙해진 듯 보였다.
여수에 도착해서도 우리의 일정인 오동도와 해상케이블카까지 카메라와 함께 다녔다. 우리는 차 없이 기차와 택시를 이용해서 여행을 다녔기에 우리를 따라다니시느라 카메라 감독님들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 저 무거운 카메라를 이고서 오동도 꼭대기까지 같이 올라갔다 내려오고 해상 케이블카도 같이 탔다.
종종 아이들을 찍는 카메라를 뒤에서 몰래 보기도 했다. 커다란 카메라 속에 잡히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매번 여행 때마다 아이들이 훌쩍 크는 걸 느끼는데 이번 여행은 어쩌면 그렇게 금세 커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순간을 붙잡아둘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겠단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다.
하루를 꼬박 함께 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카메라 감독님들은 철수하셨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10시간 가까이 함께한 긴 촬영이었다. 이 길고 긴 하루 중에 어떤 걸 얻어가셨을까. 방송엔 뭐가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다.
3. 세 번째 촬영_워킹맘의 일상(집 근처와 집)
앞의 두 번의 촬영이 모두 다 방학중에 한 거라 부담이 덜했다면 마지막 촬영은 학기 중이었다.
그런데 막상 세 번째 촬영을 앞두고 내가 심한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학기가 얼마나 힘든지 잊고 촬영을 하겠다 한 거였다. 새 학기란 모름지기 우주의 온 에너지를 끌어내어 1년을 버틸 시동을 켜야 하는 건데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다니....
한차례 촬영을 미루고 2주 정도 지나 목소리가 나오길래 일단 촬영을 하긴 했는데 퇴근부터 육아퇴근까지 총 6시간 정도 걸리는 시간을 찍으니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방송에서 제일 많이 나온 부분이 워킹맘의 하루를 찍은 이 날이었고 방송에서 내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유튜브 댓글에도 '엄마 목이 다 쉼'이라고 쓰여있어서 웃겼다.
내가 퇴근해서 어린이집에서 쌍둥이를 픽업해서 놀이터에서 좀 놀리고 친정에 데려다주고 다시 첫째 태권도차 하원을 해서 집에 데려와 저녁을 먹이는 과정에 이어,
남편이 퇴근해서 친정에 있는 쌍둥이를 집으로 데려와 온 가족이 저녁 시간을 갖고 밤에 씻겨 재우기까지 꼬박 하루 반나절을 함께 했다.
방송이 나오고 막상 우리의 일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다 보니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특히 방송을 본 다른 지인들이 말해줘서 알았는데, 우리는 일상에서 발걸음이 엄청 빨랐다. 바통터치하면 바로 달릴 준비가 된 계주선수처럼 일상이 숨가빠보였다.
그럼에도 모두가 집에 돌아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모습은 따뜻해 보였다. 내가 보지 못한 각도로 우리 집안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남편의 표정과 아이들의 모습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4. 촬영을 마치고_방송을 보면서...
방송전날까지만 해도 못 볼 거 같고 이상할까 봐 걱정되고 그랬는데, 막상 방송을 보면서는 그저 뭉클했다. 우리의 일상이 다큐가 된다는 것도 신기하고, 아이들의 모습이 화면에 오롯이 담긴 것도 감동적이었다.
매일을 똑같이 사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커가고 우리 가족 다섯 명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행복을 잘 키워가며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삶에서 힘든 순간들이 올 때마다 다시 꺼내보고 싶은 소중한 순간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들처럼 흩어져 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잠시 멈춰 이 순간을 정지하고 싶은 순간들, 이런 순간들을 조금이나마 붙잡아둔 것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의 삶을 보며 동시대에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도 좋았다.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이 보이지 않는 행복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것,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저출산시대에 출산을 권유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다. 왜냐면 아이를 낳아서 득 될 게 없는 세상이라는 게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실제로 유튜브 댓글에도 이런 말들이 처음엔 많이 달렸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큐를 찍으면서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을 삶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이 가지는 가치는 직접 경험하고 가꾸어가야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고, 직접 그러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것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그저보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5. 백만 번 산 고양이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책이 있다. 백만 번이나 살아보았고 백만 번이나 죽어보았던 고양이가 흰 고양이를 만나고 새끼 고양이를 낳고는 다시는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 책을 읽고 나는 남편에게 내가 당신의 흰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백만 년의 삶을 살고 백만 번이나 죽어보았더라도, 흰 고양이를 만나 새끼 고양이를 많이 낳고 사는 것보다 더 좋았던 삶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고양이가 흰고양이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그 곁에서 숨을 멈추는 이야기가 나는 너무 와닿았다.
어쩌면 나는 이 책에서 내 모습을 본 것일 수도 있다. 냉소적이고, 겁이 많고, 그러나 사랑이 고팠던 고양이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새끼 고양이를 많이 낳고 키워 장성해서 내보내고 결국 사랑하는 흰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하는 걸 보며, 내가 백만 번 태어난대도 나는 내 새끼들과 내 새끼들의 아빠와 인연을 이어 갈 거라는생각이 들었었다.
촬영을 마치고 행복한 고양이 한 가족 같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며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를, 매일에 최선을 다할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차곡차곡 저장해 두고 순간순간 꺼내봐야지. 오늘도 또 하루를 많이 끌어안고 많이 사랑해 주고 쑥쑥 커가야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