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무엇을 보는가
그 해 서울(경성)에도 봄꽃은 만개했다. 광화문 뒤편 경복궁에도 봄꽃은 피었다. 오래된 길의 동선을 따라 창덕궁 비원에도, 창경궁에도. 다만 창경궁의 이름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동물원과 공원으로 바뀐 궁에는 맹수의 우리가 생겨났고, 커다란 새장이 만들어졌으며, 궁을 공원으로 바꾼 이들이 심은 벚꽃으로 봄의 성을 이뤘다.
광화문 주변에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통 외에는 큰 길이 없던 궁 주변에는 남대문을 마주한 큰 길이 생겨났다. 경복궁 맞은 편 멀리 있는 관악산이 ‘불 산’이라고 하여 길을 내는 일을 꺼렸던 방향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남대문 밖에는 사람과 마소의 자연력으로 움직이지 않는 기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역이 생겼다. 그 역에는 해시계와는 다른 기계로 만든 시계가 생겼다. 광화문 남쪽으로 새로 생긴 도성의 남북 축 도로에 횡측으로도 도로가 연이어 생겨났다. 동대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생긴 동네는 황금정(을지로)과 본정통(충무로, 명동)이라 불렸으며, 남산골 샌님의 거주지는 일본인들 중심의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최초의 백화점(미쓰꼬시 백화점)과 현대식 은행(조선은행)과 우편국(조선우체국)이 생겨났다.
광화문 일대 서울의 거리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공원과 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의 벚꽃놀이를 보기 위해 매년 봄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밤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궁을 부수고 연 박람회를 보려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민지 백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경성의 명물이 된 백화점 엘리베이터는 ‘승천하는 기구’로 불렸으며, 일본인들이 주인이 된 서울 곳곳의 상업지구에도 조선 사람들은 가득 차서, 1930년대 경성 거리는 나라를 잃기 전보다 더 활기에 넘쳤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 이상, 「오감도시제일호」(1934) 중에서
윌리엄 워즈워스는 그의 시 「무지개」(1802)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는 문장 뒤에 나오는 이 시구는, ‘아이’라는 동심에서 훼손되지 않은 인간 순결성의 중핵을 본다. ‘아이’는 사물을 둘러싼 복합적 맥락을 고려하는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사물 자체에 충실하여 사물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즉시 인지하는 감각적 개방성과 예민함을 지녔다. 워즈워스는 '아이'를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는 ‘미성년’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늘 회복하고 돌아가야 할 원형적 시간으로서 훼손되지 않은 세계 감각과 존재 유연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아이의 시간은 어른을 예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진정으로 성장할 때만이 회복할 수 있고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시간’이다.
워즈워스의 ‘아이’는 가혹한 시대를 살던 한 식민지 시대 젊은 시인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무지개’를 보며 설렜던 아이는 “도로”를 무서워하는 아이로 바뀐다.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커다란 해석적 스캔들을 낳은 이 시를 이해하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도로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반복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해석의 핵심이다. 시 해석의 초점을 아이에 맞춘다면, 도로를 무서워하는 존재가 ‘어른’이 아닌 “아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아이들이 서 있고 달리는 이 도로를 어른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정황을 강조해서 드러내고 있다. 어른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그 "도로"는 어떤 도로인가.
바로 저 식민지 시대 서울의 도로다. 오랜 왕조가 외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고, 궁이 동물원으로 바뀌고, 이 땅 사람들의 집터가 식민지 통치국의 국민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도로다. 식민지 백성이었던 ‘어른’들은 총독부가 버티고 선 그 지배적 장소에서 벚꽃놀이를 즐기고, 박람회 유람을 다니며, 쇼핑을 즐긴다. 어른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 시간의 본질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지만, 어른의 시간 감각에 현재 시간의 실제 의미는 거세되어 있다.
이상의 「오감도시제일호」의 난해성은 시 자체의 난해성보다는, 어른(독자)들은 보려하지 않는 또는 보지 못하는 지금 시간의 핵심, 현재 시간에 포개진 역사의 중층성에 아이들만이 정직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아이들만이 시간의 중핵에 닿아 있다. 어른들은 무섭지 않은데,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데, 아이들만이 무서워하고, 무서워 할 줄 안다. 무서울 때 무서움을 느끼는 것, 이 상황이 공포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은 그 자체로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아이들은 무서운 것을 무서운 것으로 느낄 줄 ‘안다’. 공포는 아이들의 능력이며 고유한 힘이다. 아이들은 꽃피는 물리적 시간에서 퇴폐적인 정치의 시간을 감지한다. 아이의 살갗은 여리지만, 그 여린 살갗은 존재의 현재 시계를 정확히 지각하는 예민한 촉수이자 피부다. 아이들이 세계 폭력에 유난히 예민한 것은 그들이 힘이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른들보다 폭력의 실체를 예민하게 감각하기 때문이다.
서서 잠드는 아이들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달빛 속에 어는 들판을 질러 올 때
말없이 ‘우리’를 이루는 아이들.
서로 깊은 생각에 잠겨
시내를 건널 때
얼음이 든든한가 두드려보지 않았다.
약속이 두드려지지 않았다.
손, 발, 발가락, 달고 있는 것들이 모두 얼었다.
앞산에 산불이 인다.
옆의 아이가 잠자며 노래 부른다.
다른 아이는 잠속에서 소리없이 웃는다.
꿈에 함께 놓여나며
우리는 그 웃음이 노랫소리임을 알아 맞힌다.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서서 노래와 울음을 끝내는 아이들
끝내지 않으려고
함께 서 있는 아이들.
앞산에 산불이 인다.
그대 나를 신나게 벗고
내 탈 벗고
흔적 없이 그대를 벗을 때까지
옷과 함께 얼굴도 벗고 춤의 탈도 벗고
춤의 핏줄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서 잠드는 아이들.
앞산에 산불이 인다.
- 황동규, 「서서 잠드는 아이들」(1978) 전문
이상의 아이들이 무서워 하는(무서워 할 줄 아는) 아이들이라면, 황동규의 아이들은 “서서 잠드는 아이들”이다. 이 잠은 ‘눕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잠들지 않은 주체의 긴장된 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서서 잠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잠을 자는 밤에도 깨어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른들은 눈뜨고 서 있어도 잠든 정신처럼 산다. 그런 어른들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가 ‘사회’라는 이름의 공간을 이루고,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일상’이라는 안온한 시간 감각을 구성한다. 어른과 아이는 한 공간에서도 다른 세계를 살며, 다른 시간을 산다.
예컨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속담은 오래된 지혜를 담은 말의 세계다. 이 말들의 세계가 자신하는 '지혜'는 생존의 도모와 안전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어른들의 세계 시간을 함의한다. 반면 아이들은 속담이 지시하는 안전규범의 지혜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성향을 지녔다. 즉 아이들은 “시내를 건널 때/ 얼음이 든든한가 두드려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성향을 모두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존본능'이라면 아이도 어른 못지 않다. 아이들의 바깥으로의 성향은, 전승된 속담의 지혜처럼 목숨의 부지에 모든 걸 거는 생존 방식에는 ‘너머’의 시간이 없다는 걸 감지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속담이 과거에 지향된 삶의 본능이라면, 아이들의 삶의 본능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맞춰 있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얼음이 든든한가 두드려 보지 않"는 용기와 순진한 무모함이 아이들의 "우리"를 어른들이 구축한 ‘사회’와 구별되는 공동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사회에 내포된 협소한 개인 생존지상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성년이 아니라) 비성년’ 연합체다.
“옆의 아이가 잠자며 노래 부”르고 “다른 아이는 잠속에서 소리없이 웃”고, 서로가 그 웃음과 노랫소리를 알아맞힌다는 말은, “잠드는 아이들”이 미래 시간에 속하는 ‘꿈의 공동체’ 일원이며, 서로 공감의 시간에 있다는 뜻이다. “서서 잠드는” 것은 ‘꿈꾸는 정신’을 뜻하며, 다른 시간을 사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현재 세계 시간 속 “노래와 울음을 끝내는” 정신인 동시에, 울음에 깃든 비극적 세계 인식과 노래에 스민 자유로운 놀이충동을 “끝내지 않으려”는 정신이다. 울음과 노래는 고통의 현재 시간에 대한 비탄인 동시에 억압 없는 미래 시간에 대한 비원을 담고 있다. 극도의 억압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황을 노래하는 해방가는 둘 다 숭고하고 아름답다.
아이들의 순진한 노래와 솔직한 울음은 끝내야 할 세계에 대해 저항하고 끝낼 수 없는 비원을 반복한다. 이것이 미래로 열린 아이들의 본능이고, 생명의 충만한 감각이다. 이 미래 충동이 인간 역사의 길을 연다. 이 역사는 “산불”처럼 일어나는 존재의 고양과 영감을 담고 있지만, 과거에 붙들린 안전제일주의형 어른들은 결코 보지 못한다. 꿈에 환하게 일어나는 “산불”을 본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 어른들의 시간을 살면서도 이 미래적 영감의 노래와 울음을 끝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꿈에서 불렀던 노래와 울음이 극복하려고 했던 사회적 시간을 끝내려고 애쓰게도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시'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아이들이 현재로 소환한 미래의 노래와 울음이다. 많은 아름다운 시들의 화자는 말 너머를 말하려고 애쓰는 아이들이며, 이 아이들의 꿈과 기도가 다른 역사의 비전을 이룬다. 워즈워스의 시에서 아이들을 설레게 했던 그 무지개 역시, 이미 미래에 살면서 '서서 잠드는 아이들'이 꿈에서 본 산불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5915883527
시민행성 https://www.facebook.com/citizenplanet.or.kr/?ref=br_rs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DMZ Creative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