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적대가 공존하는 시간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2003)의 엔딩신은 공항 풍경이다. 사람들은 입국자가 들어오는 입구에서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은 설렘이다. 가벼운 긴장감 속에서 모든 얼굴들은 설렌다. 하나의 얼굴은 아직 입국장으로 들어서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을 기다리고 있다. 입국장의 문이 열릴 때마다 그들은 자신이 기다린 그 얼굴이 아닐까 등장하는 이의 얼굴을 쳐다본다. 여러 시선은 문이 열리는 그곳을 향해 하나로 모인다. 마치 런웨이에 등장하는 모델의 패션쇼 워킹을 보는 것처럼. 기다린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다소 실망하는 얼굴들, 얼굴들, 얼굴들. 이 실망에는 자기보다 먼저 기다림의 대상을 확인하게 된 이에 대한 약간의 시기도 깃들어 있다. 그러나 결국 한 얼굴은 다른 한 얼굴을 찾게 마련이고 얼굴들은 이내 기쁨에 젖는다.
공항에 얼마나 다양한 얼굴들이 또 다른 얼굴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의 엔딩신은 잘 보여준다. 공항은 인종적 다양성, 성별의 다양성, 세대적 다양성, 계급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이 난만한 복수성의 특이점이다. 얼굴들은 도처에서 왔다. 얼굴들 자체가 '세계'다. 하늘을 날아온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그 지리적 다양성만큼이나 사연들도 제 각각이다. 이 사연은 비행기라는 교통편이 지닌 특수성을 고려할 때,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도착한 사람들의 사연과는 많이 다르다. 이 공간적 거리 자체가 그들의 만남이 상대적으로 지상교통편으로 만날 수 있는 얼굴들의 그것과는 다른 사연의 깊이와 정도를 지녔음을 암시한다. 입국장의 긴장과 설렘과 감격이 배가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내가 미국 중부의 한 공항 입국장에서 경험한 시간도 그렇다. 나는 그 공항에 처음 방문했다. 미국으로 이주한지 50년 된 친척 아저씨에게 나는 고향나라에서 자신의 거주지로 찾아온 첫 번째 친척이었다. 50년 동안 딱 세 번 고향나라를 찾았던 아저씨는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조카를 맞는 그의 얼굴은 한창 팔팔한 젊은이가 가질 법한 기운의 홍조로 가벼운 흥분이 느껴졌다. 이런 종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항의 입국장은 서로 매우 다른 드라마가 조우하는 장이라고 해야 한다. 꽤 긴 시간 비행기로나 도착할 수 있는 장소의 격절감은 지금까지 유예된 만남의 시간만큼이나 그 순간에 존재의 밀도를 압축하고 있다. 입국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순간은 서로 다른 인생이 악수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느꼈던 반가움은 단순한 기쁨 같은 것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복합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한 개체가 지닌 인생의 고립성이 다른 개체와 연결되면서 비로소 열리게 된 공간감을 서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공항의 입국장은 이렇게 수많은 스토리들의 목록, 곧 스토리북(story book)이다. 스토리들이 모이면 히스토리(history)가 된다.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는 얼굴들로 구성된 세계를 보여준다. 얼굴들이 내포하는 스토리들의 지도,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는 여러 얼굴들로 모자이크된 지도를 보여주면서 모든 곳에 사랑이 사랑이 있다(Love is all around)며 낭만적인 음악을 틀며 끝나지만, 이 얼굴들의 개인사에는 참으로 격렬한 삶의 우여곡절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 입국장에 들어선 모든 이가 자신을 기다려주는 이들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니며, 누군가는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낯선 땅에서 생각보다 강력한 적의를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적의는 단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 현실이 동반되어 있어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공항의 입국장은 불안한 파도를 예감하는 첫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공항에서 겪는 체험의 특이성을 잘 보여주는 곳은 입국장으로 나오기 전 거쳐야 하는 입국심사대다. 입국심사대를 지나는 시간은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문화적 맥락으로 진입하면서 겪는 당혹스러움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이 당혹스러움은 위에서 진술한 입국장의 설렘과는 전혀 상반되는 경험이다. 공항의 입국심사대를 지나는 시간은 우리가 동류의 ‘인간’으로 환대받는 시간이 아니다. 한 사회체계의 치안시스템이 적의를 가지고 다른 개체를 노려보는 차가운 정치적 심사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인간(human/humanity)'이란 단어가 현대가 추구한 계몽적 추상이나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증상적 체험이다. 이곳을 지나면서 입국자는 ‘인간’이 아니라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우선 분류되어야 한다. 외국인 입국심사대로 분류된 이들은 경찰관과 다를 바 없는 제복을 입은 검시자들에게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는 '심문' 과정을 매우 수동적이고 굴욕적인 태도로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관문에서 입국자-외국인에게 가중되는 큰 어려움은 몸과 정신의 일부이자 어쩌면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로 검시자의 위압적 언어에 응대해야 하는 고통에서도 나온다. 정신분석은 엄마말을 쓰던 아기가 살기 위해 자기 말을 사회적 언어문법으로 변용하는 성장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자기를 깎아내는 자살에 가까운 고통이라고 분석한다. 억압의 '자진' 수행으로 인한 주체-문명의 신경증이 기본적으로 이 과정에서 생긴다고 해석한다. 어쩌면 입국심사대야말로 어른이 된 후 이 과정을 빠르게 반복하는 시간이 아닐까.
몸과 정신이 사물화 되고 심지어는 얼어붙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이 특수한 체험은, 오늘날 지구화/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점점 더 강박적인 통과의례로 강요되는 경향을 띤다. 원시사회에서 발생한 통과의례란 한 개체의 문화적 동일성을 상징적으로 인증하고 이를 통해 개체의 환대를 사회적으로 공증하는 시간이었다. 세계화/지구화 시대의 아이러니는 공항심사대라는 통과의례에서 '휴머니티'를 동일성의 표지로 더 이상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본래 동류의 인간성을 뜻하며 동전에 새긴 '인간'의 (보편적) 얼굴을 뜻했던 그리스어 '캐릭터(charicter)'는 세계화 시대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동전이다.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정말 사라졌는가. 그것은 지구 어디에서든 달러라는 화폐가 교환되고, 값싼 노동력으로 운영될 수 있는 공장이 지어질 수 있으며, 자본이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시장이 열렸다는 말이지 세계시민국가가 출현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입국심사대에서 한 시민적/국민적 정체성은 다른 시민적/국민적 정체성과 동등한 지위에 있지 않다. 한 정체성은 치안권력의 위상에 있으며, 다른 정체성은 잠정적인 범죄 선상에 놓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답게 다소 우스꽝스럽고 지나치게 로맨틱하게 묘사되기는 했지만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던 《터미널The Terminal》(2004)이라는 영화는 공항의 입국심사대가 무엇인가 하는 특이성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엿볼 수 있게 한 작품이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에서 뉴욕으로 입국하던 평범한 시민 빅터 나보스키는 입국심사대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정부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황당한 상황을 맞는다. 정부가 보증했던 국제 신원보증서인 여권과 입국국가인 미국이 그 정부와 체결한 일시적 여행허가증인 비자는 효력이 말소된다. 여권과 비자가 효력 말소된 그는 입국심사대로 들어갈 수 없다. 정부가 사라진 그는 쿠데타가 일어난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공항은 그를 추방시키려 하지만 그는 버틴다. 출국지인 고국에서도 입국지인 미국에서도 그는 ‘시민’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 공항은 여행객에게 지나가는 시간, 즉 여정의 일부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여정을 끝낼 수 없으며, 무국적자ㆍ무시민권자로 살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 말이 지니는 정치사회적 함의는 그가 어떠한 법적 지위도 지니지 못한 '비인간'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프로 했다. 영화에서 '겨우' 9개월로 표현되었으나 실제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국제공항에서 18년 동안 국적 없는 자로 살았던 유학생 정치 망명객이다. 그가 겪었던 공항에서의 인생유전은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예전에 ‘망명객’이라 표현되었던 이들은 오늘날 ‘세계화/지구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흔히 ‘난민(refugee)’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된다. 난민의 지위는 ‘망명’이라는 말이 예전에 내포하고 있던 정치사회적 존엄성에 비해 크게 존재론적 지위가 격하되어 있다.
‘난민’은 단지 그의 고국에서 집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 가도 집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 인식은 도피한 그의 고국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피하여 찾아온 동네의 사람들이, 어쩌면 이제는 세계화된 세상의 거의 모든 (국민국가의) 시민들이 그들을 그렇게 인식한다. 국민국가의 시민들은 또 다른 국민국가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해 엑소더스를 감행한 난민을 자기 국민국가를 오염시킬 수 있는 '세균'이나 '벌레'처럼 생각한다. 다른 국민국가에서 그들은 그 나라 시민과는 똑같은 인간의 권리를 누릴 자격/가치가 없는 이들로 여겨진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생존'과 '삶'을 각각 'zoe'와 'bios'로 구분한 그리스적 사유를 통해 '삶'이 거세된 권리 없는 생존자를 '호모 싸케르(Homo Sacer)'라고 명명한다. 호모 사케르는 '법의 예외상태' 자체를 정상적인 기율로 강제당하며 사는데, 난민이야말로 오늘날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다.
정부가 사라져 입국심사대로 들어올 수 없었던 빅터는 물론 안쓰럽지만, 설령 그가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고 한들 그의 가나안이 그 땅에 있을 것인가. 하지만 빅터를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큰 착각도 없다. 관람객은 관찰자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지구화 시대의 입국심사대를 지나면서 겪는 가장 경이로운 체험은 우리 모두가 다른 국민국가-좀 더 정확히는 서구자본주의 발전국-의 시민/국민과 치안권력에게 잠재적 난민처럼 취급되는 시선 경험이다. 지금 난민은 실제 드러난 현실보다 폭넓게 존재한다. 국민/시민의 잠재의식 속에서. 입국하는 나라에서 일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많은 외국인들, 그 나라 내부에서도 충분한 소비능력을 지니지 못한 무능한 (비)시민권-소비자들이 후보군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세계화/지구화 시대의 이방인이다.
공항의 입국장에서 누군가는 그를 기다리는 반가운 얼굴과 만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낯선 불안과 조우해야겠지만, 누구든 예외 없이 그 이전에 통해야 하는 곳은 입국심사대다. 그 시간을 환대의 시간으로 경험하는 외국인은 오늘날 별로 없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기획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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