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apocalypse, '엔딩'이라는 시간의 뚜껑이 열릴 때
자연의 온갖 사물이 서로 조응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다는 하늘을 비추고, 은하수는 대지의 천정이었으며, 꽃들은 들판의 표정이었다. 사슴의 뿔과 숲의 나무와 거북의 등껍질이 동류의 무늬였던 그 세계에서는 창공의 별자리도 지상 무늬의 변형이었다.(미셸 푸꼬 『말과 사물』) 사람 역시 우주 사슬의 일부였다. 사람의 동공이 창공의 창이었으며, 몸은 음양과 오행의 세계운행을 압축하고 있는 소우주였다. 종종 인간의 목소리 중에는 우주의 목소리를 매개하는 것들이 있었으며, 문자는 우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존재 사슬로 묶여서 고리 하나를 흔들면 만상이 함께 흔들렸다. 존재의 한 기미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알리는 징조였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 공동체를 휩쓰는 전염병은 존재의 이상 증후가 된다. 전염병은 인간계를 넘어 자연과 우주가 오염되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가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증상이다. 전염병은 늘 가뭄 같은 자연의 불모성과 불임 같은 인간계의 수난을 동반한다. 공동체에 창궐하는 전염병은 인간 삶이 신의 궤도에서 이탈한 죄를 묻는 증거다.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인간 역시 이 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한다. 인간은 비로소 '죄'의 연루를 자문한다.
기원전 5세기에 쓰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도시에 창궐한 전염병 상황으로부터 시작되는 드라마다.
그대 자신도 보시다시피, 도시가 이미 너무나 흔들리고 있고 죽음의 물결 밑에서 아직도 머리를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받침에도 목장에서 풀을 뜯는 소떼에게도 부인들의 불모의 산고에도 죽음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을 가져다 주는 신이 가장 사악한 전염병이 내리덮쳐 도시를 뒤쫓고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카드모스의 집은 빈집이 되어 가고 어두운 하데스는 신음과 눈물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불을 가져다 주는 신이” 보낸 “가장 사악한 전염병”은 “대지의 열매를 맺는 꽃받침” “목장에서 풀을 뜨는 소떼” “부인들의 불모의 산고”와 더불어 도시를 덮친다. 공동체를 뒤덮은 “죽음의 물결”에는 자연도 예외가 없다. 전염병이란 순리의 이탈을 뜻하는 우주적 표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들은 존재의 사슬로 묶여 있기에 동시에 흔들리고 함께 파탄을 맞는다. 이토록 심각한 죄의 표지가 죄에 연루된 자를 찾아 신속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주의 법이 회복될 수 있는 수준의 숭고한 희생제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죄의 원천은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은 모두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우주적 죄였다. 공동체 법의 상징이자 신의 뜻을 대리하는 왕이 법을 교란시키고 오염시킨 것이다. 그의 행위는 세계의 순리에 역행한 것이었다. 반전은 이 드라마가 자연과 공동체의 불모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회복의 계기를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성취하는 장면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드라마에서 죄에 대한 처벌은 자발적인 자기 처벌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전이라는 점에서, 이 처벌은 공동체의 전염병이라는 정치적 메타포를 한 인간의 실존적 결단이라는 차원으로 돌려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웅적인 것'이라고 치켜세운 비극적 위대함도 바로 이것이었다. 신이 만들어 놓은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운명, 그것은 인간의 비극조차도 우주의 일부라는 고대적 숙명론을 의미하는데, 오이디푸스의 자기 처벌은 오히려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뜻한다. 신이 미리 써 놓은 각본이 완성되어 가는 마지막 무대에서, 한 인간의 고유한 실천이 드라마를 신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인간의 공동체와 자연은 이 처벌로 다시 생명의 궤도로 복귀하겠지만, 이 회복된 질서는 더 이상 신이 주관하는 시간일 수 없다. 인간의 영웅적 결단에 의해 회복된 세계에는 '인간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신이 써놓은 각본을 인간이 제 방식으로 상연하는 변증법적 드라마다. 이 시간은 휴머니즘(humanism)의 탄생을 예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까뮈는 소설 「페스트」(1947)에서 가공할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현대도시를 몇 가지 차원의 시간경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도시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때는 도시의 폐쇄라는 행정명령을 불러온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의 행정은 치안권력으로 바뀌며, 우선 특정한 도시를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반응은 기계적이다. 재난에 대응하는 행정 메뉴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닫힌 시간성으로도 경험된다. 죽음이라는 정해진 시간성 외에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자체가 질식 상태인 도시 모습은 내부에 갇힌 사람들에게 세계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인식하게 한다. 전염병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시간이 죽음을 향해서만 나 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방향성에 폐쇄된 도시의 누구도 저항할 수 없어 보인다. 전염병의 시간은 재난의 느닷없음과 불가항력적 측면, 예외 없음을 통해 주체의 무력을 드러내면서 비현실적 형이상학을 마주하게 한다. 이 형이상학의 내용은 ‘부조리(不條理)’다. 주체가 경험해 보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여 먼저 힘없이 쓰러져가는 병든 육신들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제 죽음의 임박한 환영을 여기저기에서 목격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런 시간에는 인간성에 내재한 다양한 얼굴들이 드러난다. 갑작스러운 재앙에서 신의 뜻과 인간의 죄를 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란을 틈타 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있다. 후자에게는 재난의 시간이 기회의 시간이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재앙을 피해 도망하려는 이가 있으며, 재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초월과 회피와 자포자기와 이기심과 야만과 제사장의 얼굴이 한꺼번에 실체를 드러내고 공존하는 시간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도시는 온갖 인간성의 전시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또 다른 방식의 인간성을 확인하게 한다. 무력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목숨들이 힘을 합쳐 죽음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사회공동체의 관점에서 이는 우선 인간의 연대로 보이지만, 좀 다른 시야로 해석해 보자면 죽음에 맞서는 생명, 무한자에 맞서는 유한자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까뮈는 소설 속에서 이 태도를 “이미 창조되어 있는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윤리라고 표현한다. 이 반항적 태도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인간적’ 항의다. 동시에 이 항의는 전염병의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결과인 죽음뿐만 아니라, 이 상황이 초래한 공동체의 야만적 상황, 예컨대 비겁한 인간성과 집단적 광기, 도시를 뒤덮고 있는 온갖 과잉 상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반항은 전염병의 시간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전염병이 초래한 인간성의 여러 페르소나들과 마주한 저항인 동시에 신이 창조한 무한성과 부조리 세계에 저항하는 인간의 싸움이 그것이다. 까뮈에게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간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반항적 인간」)라는 명제가 도출되는 철학적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항의 연대기가 승리를 확신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강조해야겠다. 까뮈에게 이 저항의 연대기는 부조리 자체의 제거를 확신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재앙에 임하여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의 증언 같은 시간이었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2013)에서 폐쇄된 분당은 페스트로 폐쇄된 프랑스의 오랑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염병의 시간이 오늘날 갖는 이미지를 의미심장하게 제시한다. 이 시간의 본질은 ‘방제복’을 통해 간명하게 드러난다. 도시는 방제복을 입은 정부군에 의해 통제되고 완전히 장악된다. 방제복이라는 낯선 옷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 오염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표지다. 이 옷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침투를 완강하게 막아내는 방어막인 동시에, 방제복을 입지 않은 이들이 구제될 수 없으며 제거되고 폐기 되어야 할 ‘오염물’임을 보여준다.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예외 없이 ‘오염물’의 제거에 일사불란하고 완강한 폭력을 행사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대상을 선별하고 분리하며 배제한다.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외계인처럼 낯설다. 그들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계처럼 자동적이며 물건처럼 반응이 없다. 방제복을 입은 이들은 의사지만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염물’을 분리하고 폐기하기 위해서, 군인이지만 시민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고 살처분 하기 위해 투입된다.
까뮈의 시대보다 의료기술이 현저히 발달된 21세기에 발생한 전염병은 다른 방식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부조리는 전염병이라는 자연-신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전염병을 진단하는 과학지식-의료기술이며, 이 지식과 결부된 완강한 행정권력의 최종심급으로서 '국가'라는 '기계'다. 영화에서 전염병의 창궐은 언제나 어떤 도시든 간에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 국가에서 헌법적 원리가 중지되는 시간이며, 시민권의 예외상태가 발생하는 시간이고, 시민-인간이 폐기되어야 할 오염물로 순식간에 추락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시간이다. 영화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이때다. 방제복은 과학기술 문명의 무도함, 법의 허울과 국가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정말 공포스러운 것은 전염병이 아니라 국가이며, 합리성에 의해 조직되고 규제되고 있다고 믿었던 국가제도의 어처구니없음이다. 비상사태에 처해 문명은 지나치게 무력하며, 제도로서 국가는 맹목적일만큼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까뮈에게 전염병의 시간은 우주의 부조리와 그에 반항하는 인간의 윤리를 드러내는 철학적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심쩍은 신종 플루의 확산으로 방제복이 도시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때, 부조리는 국가라는 폭력기구를 통해 예상치 못한 현대적 얼굴을 드러낸다.
14세기 중반 절정에 달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던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30~60%를 죽였다. 최소 7천500만에서 최대 2억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14세기 이전 4억 5천만 명 정도였던 세계인구가 페스트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는 것은 17세기에나 되서의 일이었다.(《위키백과: 흑사병》)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발달된 문명을 구가하고 있던 잉카와 아즈택은 불과 수백 명 수준의 유럽인들에 의해 정복당하는데, 이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천연두라는 전염병이었다. 어떤 추정에 따르면 불과 몇 달 만에 당시 아메리카 인구의 95%인 1천 9백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전염병이 도는 동안에 사람들은 문명의 종말을 예감하며, 실제로 어떤 문명은 종말을 고했다. 구대륙 옛 문명의 종말은 유럽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전염병(세균)에 의한 것이었다. 그 문명에 속한 이들에게 이는 세상의 종말과 다른 게 아니었다.
재난 영화들의 범주에서 '좀비' 영화가 끊이지 않는 것은,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 문명이 아주 간단히 빠르게 '완전히'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인류의 멸종에 대한 불안은 예전에는 핵전쟁 같은 것으로 예감되었는데, 최근에 이보다 더 자주 모티프로 이용되는 것은 전염병(바이러스)이다. 핵전쟁의 상황도 끔찍하지만, 죽은 것들이 죽지도 못한 유령도시의 상황은 더 기괴한 풍경을 자아낸다.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전쟁 Z』(2006)를 각색한 영화 《월드 워 Z》(2013) 에서는 피를 흘리고 신체를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며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산 자들을 향해 돌진하는 좀비가, 무산소 상태와 심해수압을 견디고 고농도 방사능에도 끄떡없으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리를 듣고, 벽을 기어오르고 마침내 국경까지 넘어가며 엄청난 속도의 달리기 실력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퍼 울트라 파워다. 맹목적이고 강력하며 대단히 빠른 확산성을 지닌 좀비 자체가 전염병의 물리적 현신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이다. 좀비가 일단 나타난 도시는 전체가 좀비로 변한다. 한 좀비가 공간적으로 출현하면 그 도시는 다른 가능성 없이 무조건 좀비화라는 한 방향의 닫힌 시간성만 남는다. 한 도시의 오염은 다른 도시로 확산되며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번져간다. 이것의 끝은 문명론적 종말이다. '문명론적 종말'은 사회위기나 경제위기나 국가몰락 따위의 말과는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닌다. '종말'은 인간 개체 자체의 '엔딩'을 뜻한다. 인간이 만든 '시간의 끝'이라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국가 단위를 넘어선 속수무책의 UN이나 WHO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좀비 영화의 유행은 영화의 유행만큼이나 전염병이라는 모티프가 지닌 '세계적인' 설득력을 보여준다. 인간의 평균적 기대수명이 백살이 되고, 인간의 지능에 육박하는 인공생명체가 등장하는 시대다. 지식의 축적을 통한 무한한 진보와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유럽적 계몽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거의 소멸된 것으로 보였으나, 디지털데이터 경제의 출현과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진화는 그 계몽주의를 오히려 이 시점에 부활시키고 있으며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진화란 시간의 축적과 질주와 고양과 다함 없는 무한성을 뜻한다.
그러나 문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허약하고 보잘 것 없어서, 새가 앓는 독감, 쥐의 똥, 가벼운 호흡기 질환을 통해서도 순식간에 절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직감한다.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할 때 인간은 그 절멸의 시간, 자신들이 만든 인공적 시간이 느닷없으며 허망한 엔딩으로 마감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은 실체가 없는 망상이나 과장이 아니라,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없는 인간적 무력감의 산물이다. 그럼 점에서 전염병의 시간은 '존재'가, 즉 어떤 확인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실재(the real)'가 문명에 고지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잉카나 아즈택의 원주민들은 이 시간을 '신의 손길'이 나타난 시간이라고 여겼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외교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삼성디자인멤버십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융합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현재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 대표, 서울자유시민대학 전문가위원, 삼성디자인멤버십 자문위원,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기획위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스승이자 친구로서 뜻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 준비위원장이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 여름의 책'으로,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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