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
사랑이라는 신비가 출현하는 순간, 모든 곳은 길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는 어느 곳으로도 걸을 수 있다. 바람 날리는 들판으로도, 어떤 길로 나 있을지 모르는 숲속으로도, 벚꽃이 흩날리는 꿈 같은 밤속으로도, 하늘을 덮고 있는 희색빛 눈보라 속으로도. 도시의 안개 낀 골목으로도.
그가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저기, 당신이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닿아야 한다. 그때 당신은, 세상의 모든 풍경을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게 한다. 당신이 저기 있기에, 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걸을 수 있다. 당신을 향한 길이 아니다. 당신 자체가 길이다. 모든 풍경이 배경으로 물러나는가, 모든 땅이 길이 되는가, 이것의 여부는 중요하다. 모든 연애가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이런 무모한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사랑이 연애로 현실화 되지는 않듯이 , 모든 연애 역시 사랑의 순도에 이르지는 못한다.
4연으로 된 시는 모든 연에서 '아름다운 나타샤에 대한 나의 사랑'과 '푹푹 내리는 눈'의 연관성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인간사와 자연현상 간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겠는가. 허나 정말 그러한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에게,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이 그와 그들을 감싸고 있을 때, 아니 사랑으로 그와 그들이 현존할 때, 사랑은 늘 폭설로 내린다. 사랑은 푹푹 빠지는 것이다. 진눈깨비는 없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미 그/그들은 설원의 한복판에 있다. 설원의 한복판에서 모든 풍경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세상은 오직 흰 것으로, 순백으로만 나타난다. 세상이 사라지고, 오직 그들만의 '순수'가 그 자리를 메운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나린다". 사랑하므로 설경이 펼쳐진다.
히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설원의 한복판에 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하므로 세상이 순식간에 순백으로 변하는 존재 전환이 일어났으나, '가난한 나'의 현실 조건까지 변하지는 않는다. 내면의 순결한 정황에 외적인 정황은 호응하지 않는다. 주관적 상태와 객관적 정황은 어긋난다. 2연의 "푹푹"은 그래서 사랑의 신비에 따르는 존재의 고난을 암시한다. 정념passion은 그 말 자체에 열정과 더불어 수난의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물러설 수도 없다.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설원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너와 내가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원에 주체적으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설원의 신비요 고난이다. 우리는 이미 존재의 현실 정황에 "푹푹" 빠져 있다. 모든 곳이 길이 되었으나, 어떤 사랑의 정황 속에서, 그곳은 '길 아닌 길'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판명되기도 한다. 나타샤와 내가 흰 당나귀를 타고 가는 깊은 산 속 오두막을 향한 길에서 '눈'은 장애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시의 정황은 사랑의 순도와 열도에 이르지 못한 연애이거나, 연애로 실행되지 못한 사랑의 관념주의가 아니다. 이 시에 관한 가장 지배적이면서도 잘못된 상투적 독법은 이 시를 '낭만적 사랑에 기초한 환상'으로 읽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사랑에 관한 그 자신의 '아름다운' 에피소드 한편을 회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은 푹푹 나리고" (그래도)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설원의 한복판을 걷는다. 그 걸음 자체가 사랑의 과정이고 사랑의 길이다. 그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맹목(盲目)적이다. 길을 보지 않고,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나타샤에게 맹목(盲目)은 장님이 된 그들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의 현실 정황 대신, 그들은 그들만의 순백의 존재 정황에 몰입하는 강력한 상호집중 상태가 된다. 폭설, 아름다운 나타샤와 나,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는 순결한 사랑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만 집중되어 그 외의 것은 지워진 지복의 세계 속 아이콘들이다.
그렇다. '그저 좋아서'라는 맹목이 아니라면, 누가 눈이 푹푹 쌓이는 밤의 한복판을 기쁨으로 함께 걸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신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이런 맹목의 신비가 지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모든 지상의 존재는 '그저' 태어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 자체가 맹목적이다. 백의 순수에서 존재가 탄생하듯이,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사랑의 길도 어느 순간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난다. 그 길 위에 당신이 서 있다면, 이미 당신의 걷기는 시작된 것이며, 선택의 여지없이 최소한 얼마간 걷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맹목의 걷기가 지속되는 동안, 꼭 그만큼만 사랑도 지속된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미학적 전위와 정치성을 결합한 문학ㆍ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문학평론에 집중해 왔다. 시민의 일상성과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하여 새로운 경험적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과 시민교육에 대한 관심 때문에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했고 대표를 지냈다. 진화한 미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고민을 실천하기 위해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 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문학, 예술,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 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이 '국립중앙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2018ㆍ2019 여름의 책'으로 연속 선정되었으며, 『사물의 철학』이 ' 2016 문체부 책의 달 인문서'로, 스탠포드대학 폴김 교수와의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가 '책따세가 뽑은 2017 교육 부문 상반기 인문서'로 선정되었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예외들』『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를 출간했다.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고려대문인회 신인작가상, 서울문화재단창작기금, 대산문화재단창작기금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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