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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엄마의 주량을 늘리자

<두 여자의 집>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아옹다옹 일상돋보기

 술은 참 좋은 친구이다. 술을 한 잔씩 마시다보면 여러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날 한 말실수가 부끄러워 자책하는 사람, 누구나 그런 실수는 한다고 다독이는 사람, 같은 계절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람, 아무 것도 없으면서 괜히 내일을 자신하는 사람, 마냥 즐거운 사람. 내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술은 '혼술'과 '낮술'이다. '혼술남녀'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박하선처럼 혼자 맥주캔을 따서 꼴깍꼴깍 마시면... 난 그 순간을 위해 사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혼자 마시지만 항상 누가 찾아왔다 가는 느낌이라 그런가 딱히 외롭지도 않다. 낮술은 낮의 치열함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아한다. 사람들은 일할 때 나만 여유로운 것 같아서도 좋다. (같은 이유로 주말근무가 있어 금요일에 쉴 때 좋다) 이상하게 밤에 마시는 술보다 죄책감도 덜하다. 밤이 되면 술이 깨니까, 아침에 멀쩡하게 일어나기 그리 어렵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한동안은 집에서 혼술, 낮술하는 걸 엄마에게 숨겼다. 이상하게 보일까봐 그랬다. 특히 엄마에게 술로 도피하고 싶은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혼술, 낮술을 집에서 잘 한다. 물론 엄마를 내 편으로 만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내가 술 마시는 걸 매우 싫어했다. 대학 때부터 꽐라가 된 적이 몇 번 있어서인데 그것뿐 아니라 술은 왠지 사람을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하는 괜한 믿음 때문이다. (이제는 꽐라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데 대신 체력이 저질이라 너무 빨리 졸음이 밀려온다) 더욱이 엄마는 나와 달리 술을 잘 못 마신다. 무조건 한 캔만 먹으라고 한다. 그건 엄마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져서라는데, 나는 결국 엄마가 술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게서 술잔을 뺏는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난 엄마의 주량을 늘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엄마, 나 맥주 마실 건데 좀 줄까? 나 이거 양이 많아서."

 "얼굴 빨개지는데. 안되는데. 조금만 줘."

 양이 많다고 거짓말을 하면, 딸이 먹는 술을 좀 줄이기 위해, 엄마는 순순히 컵을 꺼낸다. 나는 컵에 졸졸졸 맥주를 따른다. 꽤 많이 따른다. 벌컥벌컥 금세 남은 맥주를 다 비운 딸과 달리 엄마는 홀짝이기만 한다. 이때 엄마가 좋아하는 마른 안주를 꺼내온다. 상황은 달라진다. 안주발을 세우던 엄마가 이미 두번째 캔을 딴 딸에게 맥주를 조금만 더 달라고 한다. 그럼 나는 조금만 따라드린 뒤 세 번째 캔을 딴다. 이후는 내 맘대로다.  

 "엄마, 이건 밀맥주인데 꽃향기가 나.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지. 어때. 맛있지?"

 "음. 정말 그렇네.'

"엄마, 이건 라거인데, 맑은 맛이 깔끔하지 않아?"

 "음. 그런 것도 같네."

 나는 엄마에게 맥주에 대한 지식과 요즘 술 문화에 대해 다 설명하며 맥주 타임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안의 친구들뿐 아니라 술 앞에 수줍은 엄마라는 또다른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함께 다녀온 일본 삿포로 맥주 공장 이야기로 넘어가면 엄마는 어느새 술 마시는 걸 반대하던 걸 잊는다. 엄마도 엄마 마음 속에 있던 친구를 불러오는 것처럼 보인다. 

 "삿포로 맥주 공장간 거 생각나네. 너 조금만 마셔. 그리고 안주 좀 먹어."

 "원래 술은 빈속에 먹어야 해. 그래야 딱 기분좋게 취하거든. 삿포로 맥주 또 마시고 싶다. 그치? 근데 엄마는 왜 술 안 마셔? 좋지 않아?" 

"에이, 얼굴 빨개져서 안 돼. 그만 먹을래."

 그렇게 조금씩 엄마의 주량을 한 캔 가까이로 늘렸다. 엄마도 마트에서 맥주나 와인, 소주 등을 카트에 싣는 딸을 더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맥주를 싸들고 집 앞 한강에 나갔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서쪽으로 빨갛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엄마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내 안의 친구들, 엄마의 친구들 모두 함께 나와 조금은 선선해진 바람과 아직은 뜨거운 땅을 몸으로 느끼며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냉장고에 있던 넛츠와 초콜릿 등을 잔뜩 챙겨 나온 모습. 같이 짠 하던 순간, 엄마가 남은 맥주를 돗자리에 조금 흘린 것 등이 기억난다. 뭔가 뿌듯한 저녁이었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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