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긍긍 Apr 03. 2021

벌써 1년

- 이사한 지 1년이 됐다.

 '작년 오늘 무엇을 했나요?'

 분주했던 작년 2월에 쓴 일기가 블로그 알림에 떴다.

벌써 1년이구나.

공사를 하면서 매일매일 썼던 일기를 한 번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 많은 일을 내가 했다는 게 또 믿기지 않는다.  과거의 나게 감탄 또 감탄.


이사한 집에서의 1년.

신축 아파트들 사이에서 혼자 낡은 외관의 아파트지 멀리서 보이면 우리 집이구나 반가웠다. 주변 신축 아파트들 사이, 어두컴컴해 보이는 아파트지만 불을 켜고 들어서면 내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삶'을 든든히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거실 창으로 보이는 숲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계속 알아차리게 해 주었다. 봄에는 연둣빛 나뭇잎들이 숲을 채웠고, 길가의 덜 자란 가로수가 기특했다. 여름엔 비바람 숲 큰 덩이로 흔들고, 짙은  녹색의 기운이 느껴졌다. 가을은 금세 지나면서 성글어지더니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날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풍경을 선물했다.


동네를 탐색하는 과정도 즐거웠다. 이쪽, 저쪽으로 다녀보면서 구석구석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분명히 6년 동안 이 동네에 살았었는데, 그때에는 아주 짧은 길도 걸어 다니지 않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고덕천 산책로는 밤에 쓱 나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밤에 산책을 하는지 전에는 몰랐다.

삼겹살이 맛있는 노포를 찾아 그 사이 자주 드나들어서 주인아주머니와 눈인사를 할 사이가 되었고 동네  빵집오후 8시쯤 가서 통호밀빵을 사면 크림치즈빵을 덤으로 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근처 꽃 도매상에서만 오천 원에 예쁜 꽃 한 다발을 살 수 있는 것도 동네 탐방의 결과.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우리 집.  

눈이 닿는 구석구석 있는 작은 역사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부엌의 벽, 베란다의 타일을 보면 타일을 고르려고 논현동에 갔던 게 생생하다. 타일 사러 갔던 곳에서  100각 타일을 보고선, 딱 적당한 광택과 질감을 못 잊다 '에라, 모르겠다' 공비와 자재비에도 불구하고 큰 맘먹고 결정하고,

마침내 완성된 벽을 보고는 맘에 들어했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집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타일 벽을 볼 때 참 좋다.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인테리어에 대해 한 마디 하라고 하면,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나를 생각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면 두고두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 하고 싶다.아무도 몰라도, 나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하나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큰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날, 창고 문을 닫아놨다가 안에 곰팡이가 생겨서 깜짝 놀랐다.환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던 타일 한 반장님의 말이 생각나 문을 열어놓았더니 금방 괜찮아졌었다. (물론, 봄에 흰색 페인트로 다시 칠해야 한다)수리까지는 못하지만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떤 문제일지 추측해 볼 수 있는 수준이 되다니! 내게 힘이 생기는 느낌.


하얀 벽 때문에 조명을 조금만 켜 놓아도 스튜디오처럼 정갈한 느낌이 나는 거실, 비가 올 때는 거실 구석 벽 속에 숨은 우수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참 좋다. 우수관에 대한 서사가 떠오르면 더 귀 기울이게 된다.


코로나 19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집을 좋아 시간도 많았다.창 옆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 좋았고, 내 공간을 가꾸고 싶다는 마음에 청소루틴을 만들던 시간들도. 책장과 책상때문인지 가장 덜 사용하던 작은 방은

겨울에는 작업실로 바뀌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쓰였다.


친구들이  아침에 와서 밤까지 머물 때도 좋았다. 오면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집,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집이라니.

집에 들어와 창 앞에 오래 머물면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빈백 의자에서 뒹굴거리는 친구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와인을 챙기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 날, 어쩌다가 집을 사게 된 일.

그리고 또 어쩌다가 인테리어를 시작하게 된 일.

이 일들은 내가 살면서 한 아주 잘한 일  중에서도 잘한 일이 되었다. 이 집에서 오래 살아가면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 것이다.


이 공간에서 듣게 될 이야기들과 겪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을 상상해 본다. 울기엔 어디가 적당하며, 슬플 때는 어디에서 마음을 달랠까? (물론 집이 크지 않아서 아주 역동적일리는 없) 정말 기분이 좋을 때는 난  어디에서 그 기쁨을 누구와 나눌까?우리집엔 또 어떤 친구들이 놀러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신발장의 신발은 언제 버리고, 새 신발은 또 어떤 걸로 채워질까?10년이 지난 큰 소음이 나는 냉장고는 언제 고장이 나고 는 또 어떤 냉장고를 산다고 설렐까?티브 시청을 줄이겠다고 키우지 않았던 32인치 티브이는 제까지 나와 함께 할까?

나도 모르는 일들이  공간에서 어떻게 전개될까?


이제, 집에 대한 긴 글을 마쳐도 될 것 같다.


나와 같이 나이 들어갈 집에서

좀 더 좋은 노래를 듣고,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과 시간의 곁을 걸어갈  일만 남았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 동네 전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