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간, 자연의 시간
제가 갔을 때의 미야자키는 정말 미치도록 날씨가 좋았습니다. 아무리 옛날 율령국 시절 이름이 휴가(日向, Hyuuga)였다지만, 이렇게 해가 쨍쨍 내리쬐면서도 덥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니니기가 미야자키에 내려온 건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놀러 와 봤는데 기분이 좋아서 눌러앉은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야자키에 대해 소개하는 페이지마다 무조건 보여주는 곳이 도깨비 빨래판(鬼の洗濯板, Oni no sentaku ita)이었습니다. 원래는 아오시마 신사(青島神社, Aoshima jinja) 앞에 펼쳐진 파도 모양의 파식대(波蝕臺)를 지칭하는데 제 눈엔 다 비슷하게 생겨먹어서 호리키리 고개(堀切峠, Horikiri touge)에서 바라본 게 도깨비 빨래판인 줄 알았습니다. 뭐 어때요 도깨비가 빨랫감이 많았나 보죠.
도깨비 빨래판은 미야자키 앞바다의 역동적인 지형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바닷속에서 쉽게 깎여나가는 이암(진흙이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돌)과 상대적으로 잘 깎이지 않는 사암(모래가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돌)이 층층이 쌓여 기반암이 만들어집니다. 그 기반암이 지각활동에 의해 융기하되, 수평선과 살짝 엇나갈 수 있습니다. 바다는 수평선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깎아내므로, 수평선 위의 모든 지형은 (언젠가는)깎여나갑니다. 바닷물이 닿는 부분 중에서 잘 깎이는 돌이 먼저 사라지고, 단단한 부분만 남으면 이런 파도 모양의 지형이 생성됩니다. 여기에서는 잘 깎이는 이암과 단단한 사암이 번갈아가며 쌓였기 때문에 이렇게 파도 모양의 돌이 남게 되었죠. 세월이 아주 오래 지나게 되면 저 단단한 부분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도깨비 빨래판은 미야자키 앞바다에서 '지질학적으로' 최근에 지각활동이 있었다는 걸 증명합니다. 그래도 빨라봤자 1500만 년 전이니 자연의 스케일을 실감하게 됩니다.
호리키리 고개에서 바라본 도깨비 빨래판은 하늘과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하늘 아래 렌터카 안에서, 미야자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순간은 필연과 우연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의 큰 틀을 따라 움직인 건 필연이겠지요. 하지만 우연히 들어간 온천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우연이었고, 트래킹을 하다가 사슴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키리시마 신궁이 니니기를 모시는 신사였다는 것도 가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계획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연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구가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균열이 미야자키 앞바다에 나 있는 건 우연입니다. 도깨비 빨래판의 형성 과정은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게 왜 하필 미야자키 앞바다에 있는지는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들면 그냥 우연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질투가 났습니다. 우연이라는 게 1500만 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이라니!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을 살자고 아둥바둥하는 인간의 눈에 저 찰나는 영원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건, 자연은 꽃이요 바위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영원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한순간의 덧없음이라 겸손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덧없음의 덧없음만이라도 어떻게 더 살아볼 수 없을까,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없음을 느끼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남은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서, 더 오래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왜 하필 제 뇌연수막에 암이 옮겨온 걸까요. 왜 하필 저일까요.
무의식 속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터져 나오던 순간이었습니다.
도깨비 빨래판의 형성에 대한 설명 http://visit.miyazaki.jp/?p=24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