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결부하여
● 참고 자료
1) 돌봄 노동은 ‘내 부모’와 관련된 문제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585)
2) 돌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47)
‘돌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사실 지긋지긋하다는 정서가 올라온다. 고귀한 마음과 행위를 내포하는 이 단어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너덜너덜해진 듯한 느낌이다. 자신을 돌보기에도 버거운 나에게 ‘돌봄’의 책무가 엄습했던 시기가 있었다. 돌봄의 대상이 한꺼번에 여럿이 되며 엄습과 동시에 중첩이 되어 나의 ‘일’을 고민한다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 다음 차원의 가치를 논의할 수 있듯이, 생명을 다루는 에너지를 떼어서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둘을 도저히 동시에 할 수 없는 물리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의 일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등에 업는 일이었다. 서비스로 대체할 수 없는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돌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돌을 한달여 남겨놓고 있던 즈음, 이때는 즐겁게 자발적으로 1년의 아이직접육아를 선택하여 나의 시간에 대한 계획에 들어맞게 살아오고 있는 때였다. 그때 친정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의료사고와 겹쳐 결국 식물인간이 되셨다 - 이후 8년여 병상에 의식 없이 계시다 돌아가셨다.
이때부터는 나의 계획이 산산히 부서지면서 어느 하나 예측할 수 없었다. 일단 정신이 다 나가버려서 눈앞에 닥친 일을 해내는 것에 급급했다. 이 때 나에게 덮친 돌봄의 맥락은 무엇이었나? 아이를 1년 여 키우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접었고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었다. 이때의 돌봄의 맥락의 속성이 무엇인지, 참고자료의 두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왜 나의 생각과 괴리가 있는지 곰곰이 짚어보고자 한다.
돌봄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나의 일을 위해 돌봄을 외주화 하는 것은 돌봄의 일부만을 외주화 하는 것이다. 나의 아이라는 생명을 마주하는 것이 구성하는 것은 나의 우주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분자가 아이에게 왔다 갔다 하고, 아이와 나를 잇고, 아이를 휘감기도 한다. 외주화는 이와 같은 작용까지 포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산 후에 생긴 아이와 나와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 최우선순위에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시간을 어디에 쓰든 내 정신에서 가장 윗줄에 쓰여 있는 것이 ‘나의 아이’이다.
출산 후 아이 돌봄이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맡겨지는 것이,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여성의 성역할 프레임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당사자 스스로 아이 돌봄의 책임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문제는, 돌봄에 깊이 집중하고, 그러다 집중을 넘어 매몰되는 상태에 이르면, 경제적 활동 또는 사회생활을 위한 성취 내지는 자아실현으로 나의 에너지의 큰 비율을 전환하는 것 앞에 놓이는 심리적 장벽이 너무 높아져 있음을 발견한다. 이때는 이미 ‘누군가 돌봄을 돕는다’, ‘국가가 지원한다’는 개념이 나의 행동의 변화를 근원적으로 가져올 만큼 결정적이지 않다. 결국 돌봄을 우선순위에 둔다. 일터에 나가더라도 정서적으로 여전히 돌봄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 시간의 질감 자체에서 오는 피로감이 상당하다. 결국 이것은 일에 지장을 주는 것, 무능력 등으로 평가되기 일쑤다.
출산 당사자 본인이 아이 돌봄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얘기를 했다. 돌봄의 주체는 성역할 또는 책무로 인해서만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너무 깊게 매몰되기 전에 사회로 서둘러 내보낼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동력이 있어야 여성의 일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아무 일이나 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대부분의 남성이 하고 있는 그 일생활 말이다. 예를 들어 출산 축하금에 더하여 일터 복귀 격려금을 지원하면 어떠하겠는가. 월에 월급여의 50%가량을 반년 동안 지급한다면 주변에서도 또한 스스로도 밖으로 나갈 명분을 충분히 찾게 될 것이다. 나 혼자 의지를 내어 일하기도 어렵다. 주변에서도 떠밀어줘야 가능하다.
돌봄의 책임이 중첩되어 찾아온 나에게 정말 무거운 무엇이 짓눌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황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돌봄 주담당자는 돌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돌봄의 굴레에서 점점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돌봄’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고,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어도 그 값은 결국 여성의 기준이 아니라 이 사회(남성)의 기준에 의할 것이니 와닿기나 하겠는가. 참고자료에서 말하듯 생명을 다루는 돌봄의 가치의 중요함은 끝없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이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돌봄을 온몸으로 감당한 사람들 덕분인 것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나, 여전히 돌봄은 가치로운 것이나 그냥 ‘너’가 하고 ‘값어치는 딱 거기까지야’라고만 얘기된다. 그래서 돌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질 수 있는 장치로서 여성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안하는 것이다. 돌봄의 늪에 한번 빠지면, 아이 돌봄 뿐만 아니라 향후에 집안에서 발생하는 돌봄의 과제와 책임까지 늘 그랬듯 ‘당신’이 하게 된다. 그런 모양새에서 어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생각한다. 엄마 간호를 위해 오랜시간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며 주변의 보호자들을 관찰했을 때, 대부분 긴 시간 투입하며 중환자실을 지키고 각종 요구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여성이었다. 그들끼리도 이야기했다. “결국 딸이 부모를, 가족을 돌본다.”
굳이 남녀가 동시에 나누어 돌봄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길 때는 이런 경우에 찾아온다. 부부중 한쪽이 가정 경제 수입원의 큰 비율을 차지할 때, 그 수입원이 온전하게 보호되는 것이 가정경제의 안정성에 기여한다고 대부분 생각하게 된다. 굳이 회사에 아쉬운 소리 하여 불안한 인력이라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봄에 대한 가치가 공히 인정되고 우선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돌봄을 위해 일에 지장을 초래하면 결국 부적절한 인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돌봄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나 혼자 아무리 떠들어도 그 선택에 대한 희생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돌봄을 선택함으로써 생기는 기회비용을 계속 확보해나가야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