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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Apr 12. 2020

낡은 양말 한 쌍처럼

에이슬링 월시: 내 사랑(Maudie)

내 사랑(Maudie), 에이슬링 월시 감독,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주연, 2016





   다양한 영화를 접하다 보면 별 기대 없이 봤다가 건지게 되는 예상 밖의 수작들이 있다. 필자가 소개했던 영화들 중 <원스(브런치 글: "원스, 또 다른 형태의 뮤지컬 영화" 참조)>가 그랬고 <별빛 속으로(브런치 글: "시간의 파괴마저 거부하는 이 사랑은" 참조)>가 그랬다. 물론 오늘 소개할 영화 <내 사랑> 역시 별 기대 없이, 순전히 "샐리 호킨스"라는 배우 때문에 본 영화였지만 보고 난 후의 감흥은 그저 몇 마디로 정리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 떠오른 느낌은 미국판 <오아시스(문소리, 설경구 주연, 이창동 감독, 2002)>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장애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그 성격은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우선 <내 사랑>이란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 주된 이유이겠지만, 영화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후천적 차이가 필자에게는 다름으로 다가왔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장애의 관점에서는 금기시되었던 사랑이란 주제를 과감하게 다룸으로써 영화적 감동뿐만 아니라 그저 눈물샘만 자극하던, 장애를 다룬 기존의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참신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에이슬링 윌시 감독의 <내 사랑> 역시 장애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실화라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장애라는 요인을 두 주연 배우의 탁월하면서도 절제된 연기를 통해 자연스레 어필함으로써 감동은 물론이겠거니와, 다른 관점으로 이 영화가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둔다는 사실이다. 다른 관점이란 것은, 이 영화가 정신과 육체라는 고전적 주제를 특이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더 나아가서 정신과 육체라는 두 대립항의 단순 대립이 아니라 교감과 소통이라는 지평 위에서의 공존을 드러낸다는 해석 말이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굽어버린 손가락으로 겨우 움켜쥔 붓, 힘겹게 팔레트에 색을 섞어 누가 보더라도 안타까움을 자아낼 몸짓으로 벽 한켠에 느릿느릿 붓질을 한다. 초록으로, 주황으로, 떨리는 어눌한 손짓으로 그렇게 한 땀 한 땀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영화는 사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 여인의 힘겨운 창작 과정을 잔잔한 음악과 함께 도입부로 그려낸다. 그렇다, 영화 <내 사랑>의 주인공 모드(샐리 호킨스 분)는 소아 관절염으로 어릴 때부터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다. 세상은 자연스럽게 편견의 시선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다르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종종 있거든요...", 길을 걸어가면 아이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진다는 모드의 이 대사처럼 세상은 그녀를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물론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부모도, 오빠도, 친척도 모두 그녀를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그래서 돌봐 줘야만 하는 대상으로, 그렇기에 부끄럽고 귀찮은 존재로 말이다. 그런 그녀의 유일한 낙은 그림이었기에 그림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없이 그 불편한 몸으로, 홀로 그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빠는 그녀를 캐나다의 어느 작은 어촌 마을에 있는 고모 집에 맡기고는 사업을 한답시고 한참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고모는 오빠가 일정의 양육비를 제공했기에 모드를 돌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도 모드는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모드는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성숙한 여인이다. 주변의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홀로 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모의 눈을 피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가 클럽에서 홀로 맥주를 마신다든지 물감을 사러 홀로 잡화점에 들러기도 하며 정상인처럼 살고자 한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모에게는 달갑지가 않다. 어느 날 한참을 떠나 있던 오빠가 모 집을 찾았다. 모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던 모드는 집으로 돌아가길 바랬고 이제 그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오빠를 맞이했지만 집을 팔았다는 말만 남기고 또 떠나가는 그를 보며 좌절감만 느낄 뿐이다. 그래도 모드의 의지는 대단하다. 비정상적이고 불편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런 육체에서 비롯되는 주변의 비뚤어진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든 홀로 서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한, 충분이 성숙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어느 날,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날도 물감을 사러 잡화점에 들렀다가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에버릿(에단 호크 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건장한 신체에 지저분한 옷차림을 한 전형적인 노동자로 보인다. 가게에 대뜸 들어서자마자 주인에게 가정부 구인 광고를 내달라고 하는데, 말투나 행색을 봐서는 글도 모르고 매우 거칠어 보인다. 가게 주인이 대신 써준 구인 광고 쪽지를 게시판에 붙이고 나가버린 에버릿, 모드는 재빨리 그 쪽지를 뜯어서 주머니에 넣고는 무작정 그를 따라간다. 손수레를 밀고 성큼성큼 달아나는 그를 좇아 힘겹게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낡고 지저분한 그의 집에 도착한 모드는 과감히 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고 에버릿이 나왔다. 구인 광고를 보고 왔노라고 했지만 삐쩍 마른 몸매에 이상한 걸음걸이, 누가 보더라도 낡은 이 집을 관리해야 할 가정부 일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기에 에버릿은 퉁명스럽게 거절한다. 그래도 이상한 걸음걸이 때문에 애들이 돌을 던진다는 모드의 말에 그녀를 마을 입구까지 배웅해 주는 순박한 마음 씀씀이도 갖고 있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란 에버릿은 어릴 적부터 노동으로 점철된 험한 삶을 살았다. 그는 퉁명스럽고 말이 별로 없다. 아니, 사실 말을 잘할 줄 모른다.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고, 그래서 아는 단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력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 대화의 창을 닫거나 쉽게 택할 수 있는 상스러운 표현들, 아니면 그 한계를 어찌하지 못하여 표출되는 폭력적 성향은 그로 하여금 사회적 교감의 기회도 앗아가 버렸다. 가진 것이라곤 오직 건장한 신체뿐인 이런 그가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이지 않고 이 험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는 방법은 육체적 노동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그저 닥치는 대로 일만 하며 험하게 살아온 결과, 자신이 자란 고아원에서 일하며 생선을 파는 동안 대신 관리해 줄 가정부가 필요한 지금의 작고 낡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할 수 있었다. 런 에버릿의 삶은 마치 짐승들이 자신의 좁은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듯 타인들과 거리를 두고 오로지 자신의 세계를 방어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한 성인이다. 그런 정신적 미성숙 상태의 성인이라면, 거기에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거칠고 무식하다는 세상의 편견이라면 그 역시 타인들의 시선에서는 장애인일 것이다. 이런 시선은 그를 더욱더 본능적 상태로 몰아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하고 바깥으로는 더 거칠게 세상과 맞설게 할 뿐이다. 그렇기에 에버릿은 일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이상한 여자를 자신의 영역에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하나 두는 것도 좋을 거라는 고아원 원장의 충고에 에버릿은 모드를 자신의 영역에 들인다. 육체는 불완전하지만 정신은 충만한 여자와 육체는 충만하지만 정신은 미성숙한 남자의, 다시 말해 정신만의 존재와 육체만의 존재라는 두 대립물의 기묘하고도 불안한 동거가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정신과 육체라는 교감 불가능한 두 존재의 동거가 순탄하게 이어질 리는 없다. 첫날부터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모드는 집 밖으로 쫓겨났다.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회색빛 집안이나 마당은 에버릿 스스로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랐기에 모드가 알아서 맞춰야 했지만, 그 맞춤이 어긋날 때는 어김없이 그의 불같은 호통과 함께 절름발이라는 비난까지 들려왔다. 투철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모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모든 상황을 인내하며 버텼다. 이런 둘의 이상한 동거에 사람들은 모드를 에버릿의 성노예라고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둘의 극한적인 상황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에버릿은 모드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말았지만 아이와 같은 본성을 지닌 그는 미안한 마음에 그저 주빗거릴 뿐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회색빛의 냉랭하고 우중충한 둘 사이의 관계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림을 통해서 더욱 가속화된다. 낡고 지저분한 회색의 공간을 모드는 조금씩 그림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에버릿은 퉁명스럽게 그런 채움을 허용했고 그렇게 무채색의 세계는 점차 천연색의 세계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발맞춰 둘의 관계에도 조금씩 색깔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시선은 모드가 에버릿의 성노예라고 했지만 사실 그들은 한 침대를 쓰면서도 한 번도 몸을 섞은 적은 없다. 그래도 에버릿은 신체 건장한 사내다. 온전치 않은 신체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어찌 되었든 여자가 옆에 누워 있는데 동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에버릿이 모드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모드는 조건을 달았다, 그 조건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드에게는 털어놓기 어려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이전에 딸을 낳았지만 기형이 심했고 모드가 잠든 사이 가족들이 아기를 묻어버렸다고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에 에버릿은 말없이 옆으로 누워 버린다. 하지만 에버릿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로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 막았지만, 그래서 모드의 침투를 잘 막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이미 그 세계의 경계 안에 위치해 버렸고 조금씩 그곳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인내의 시간에 답을 하듯 행운이 찾아왔다. 멋진 옷에 좋은 차를 몰고 에버릿의 집을 찾아온 산드라(캐리 매쳇 분)라는 여자, 선불로 생선을 주문했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에버릿 때문에 직접 항의차 방문한 것이다. 뉴욕에서 미술 관련 일을 하는 산드라는 우연히 집 안 벽에 그려진 모드의 그림을 보고 그녀를 눈여겨 보게 된다. 모드에버릿의 미성숙을 긍정했고, 언제나 골목대장이 되고자 하는 그의 치기 어린 투정을 이해했다. 그렇기에 그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달래야 한다는 것을 모드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낮춰 조근조근 달래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기록해야 함을 설득시켰다. 설득의 결과, 그가 받은 주문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녀가 기록하기로 했다. 기록지는 모드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 뒷면이었고 그것을 주문 명세서로 사용하기로 했다. 산드라의 집으로 생선을 가져다주면서 명세서를 보여줬지만 산드라는 명세서 앞면의 그림에 더 관심을 보였다. 모드의 그림 카드를 앞으로도 장당 10센트에 사겠다고 한다. 그림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에버릿에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다. 그때부터 모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조금씩 많아진다. 모드가 그린 그림 카드는 꽤나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산드라가 직접 집으로 방문해서 모드의 그림들을 꽤나 좋은 가격에 구매하겠다고 나섰고 더 많은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구했다. 모드는 에버릿의 미성숙을 잊지 않았고, 판매될 자신의 첫 작품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에버릿의 이름도 같이 명기했다. 이제부터 모드의 주요 일과는 그림 작업이 된다. 에버릿은 계속 툴툴거렸지만 츤데레의 전형을 보여주며 모드의 작업에 방해되는 여러 잡다한 일들을 대신했다.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조금씩 역전된다. 처음에 모드는 에릿을 보조하는 역할로 이 세계로 왔지만 이제는 에버릿모드를 보조하는 역할이 되어갔다.


   그렇게 모드를 외조하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밤, 이번에는 모드 쪽에서 에릿의 몸을 가만히 건드린다. 에버릿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지만 몇 번 시도를 하다 포기하고 돌아눕는다. 모드가 다시 시도를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몸짓을 거부하는 에버릿,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이 에버릿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은 거칠고 험하다, 인생에 기어들어올 생각인가 본데 착각하지 마, 마치는 대로 집에서 꺼져, 너랑 하느니 나무토막이랑 하지. 다음날 아침, 토라진 모드가 앞에 말없이 앉아 있다. 버릿끓여다 차도 거부하는 모드, 같이 살고 같이 자는데 결혼은 안돼요? 찾아오는 여자가 없다고 아무나 잡고 결혼하나? 같이 산지 됐잖아요, 이러면 사람들은 결혼해요. 사람들이 싫어. 사람들도 당신 싫어해요. 하긴 그래...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이제 에버릿은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거부해도, 그녀를 타인으로 계속 밀어내더라도 그것은 그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의 세계에 대한 궁색한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그녀는 그 세계의 익숙한 일부가, 곁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소중한 그 무엇이 되어 있었다.


   이제 장면은 바뀌어 에버릿은 면도를 하고 있다. 곧이어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에버릿이 보인다. 다른 방에는 역시 예쁜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드가 있다. 에버릿이 일하는 고아원, 원장의 주례 하에 아이들의 축복 속에서 조촐한 결혼식이 치러진다. 이제 둘은 그렇게 정식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된 첫날밤, 둘은 조용히 부루스를 춘다. 신발을 벗은 모드의 양 발은 에버릿의 두 발 위에 올라가 있다. 모드가 속삭인다, 낡은 양말 한 쌍처럼... 에버릿이 답한다, 한 짝은 다 늘어나고 한 짝은 구멍 잔뜩 나고 얼룩덜룩한 양말? 그의 품에 안긴 채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드, 아뇨, 하얀 면양말... 에버릿의 말, 당신은 감청색이나 카나리아색 양말이겠네...




   산드라가 꾸준히 모드의 그림을 구매하여 뉴욕에 소개를 하면서, 그리고 집 앞마당에 그림을 전시하고 직접 판매를 하면서 이제 모드는 북미권 전체에서 유명한 나이브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TV나 신문에서 그녀의 소식을 뉴스로, 다큐로 다루었고 미국 부통령 닉슨까지도 그녀의 그림을 구매했다. 둘의 집 앞에는 언제나 기자와 카메라맨,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과 차로 북적거린다. 집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중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위해 동생을 내팽개치고 떠났던 오빠도 있었다. 그렇게 유명해졌지만 그녀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그 낡은 집에서 언제나처럼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을 뿐이다. 물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릿의 역할이다. 이제 그는 완전히 그녀의 조력자가 되었고 TV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그런 삶에 불평을 해댔지만 그래도 여전히 츤데레처럼 묵묵히 그녀의 작업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둘은 황혼기의 초입에 들어섰다. 하지만 끊임없는 창작의 과정은 모드의 몸을 계속 망가뜨렸다. 또한 그런 조력자의 삶을 묵묵히 수용해온 에릿 역시 내적인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당시와 같이 남성 중심주의가 팽배했던 사회라면, 그리고 여전히 아이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라면 그렇게 아내가 이슈의 중심이자 주인공이 되고 자신이 보조 역할로 격하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주변의 소문은 언제나 모드의 편이 되어, 그녀는 착한 사람이고 자신은 항상 불평만 쏟아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쌓여가는 그런 내적 불만에 기름을 부은 것이 모드의 다. 읍내 잡화점에서 우연히 에버릿을 만난 고모는 그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아내 덕에 팔자가 좋더군, 걔만 웃고 자네는 계속 툴툴거리고... 노년에 병치레 중인 고모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소원했던 모드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자 했다. 하지만 고모의 비난에 단단히 삐쳐버린 에버릿은 모드가 모의 병문안을 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걸어서 모의 집까지 갔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생의 막바지를 예감한 는 모드의 딸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모드의 딸이 기형도 아니었고 죽지도 않았으며 자신과의 합의 하에 오빠가 부잣집에 팔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드가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 집에 입양된 아이는 잘 컸다고 하더라... 그 애도 장애인이에요? 아주 건강하단다.


   충격적인 소식을 안고 집으로 오는 길, 에버릿이 차를 몰고 마중 나왔다. 울먹이며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했지만 에버릿은 예의 그 아이와 같은 투정이 먼저다.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어, 아침에 일어나면 사람들 천지고 퇴근해서 와도 사람들 천지고, TV에 얼굴 팔려서 사방에 비웃음만 싸고... 모드가 힘겹게 아기 이야기를 꺼냈지만 에버릿은 이미 삐친 상태라 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신과 엮인 후로 삶이 괴로워졌어, 당신이 없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야... 모드는 울면서 차에서 내렸고 에버릿은 맘대로 하라고 소리치며 차를 몰고 떠나 버린다. 모드는 산드라를 찾아갔다. 산드라는 그녀에게 방을 내어 주었고 그렇게 모드와 에버릿그녀가 그의 집에 발을 들인 후 처음으로 따로 살게 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에버릿은 그녀의 부재를, 그리고 그 공허와 허무를 느낀다. 결국 에버릿이 산드라의 집으로 왔다. 집 앞마당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 에버릿이 둘러댄다, 당신은 여기선 못살아, 가게에서 너무나 먼 거리잖아, 개보다 보살피기 힘든 사람이라니까... 모드가 조용히 답한다, 그보다 나아, 개보단 낫다고... 저 구름 보여? 저거, 엉덩이가 펑퍼짐한 여자 같아, 머리 한쪽은 대머리 같고... 퉁명스런 에버릿의 말, 안 보여... 하지만 당신은 잘 보여. 모드가 미소를 띠며 물어본다, 뭐가 보여? 서툴지만 진솔한 에버릿의 대답, 내 아내가 보여,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날 떠나지 말아 줘... 모드의 반문, 내가 왜 떠나? 다시 에버릿의 대답,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니까... 모드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아니야, 못 떠나, 당신과 있으면 바랄 게 없어, 아무것도... 둘은 손을 꼭 잡았다. 집으로 가는 길, 에버릿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아담하고 깨끗한 2층 집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운 에버릿, 그 아이의 집이란다, 아기, 모드의 딸... 집 앞에서는 밝게 자란 듯 보이는 10대의 여자 아이가 가위를 들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모드는 그저 먼발치에서 하염없이 그 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모드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매일 아침 에버릿과 함께 하던 산책도 이젠 불가능하다. 의사를 불렀지만 그저 뻔한 소리를 할 뿐이다. 모드: 개를 더 키워. 에버릿: 개 필요 없어. 모드: 개 좋아하잖아? 에버릿: 난 당신이 있잖아. 모드: 그래도, 개를 더 키워... 모드는 이제 예감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날 밤, 힘겹게 작업을 이어가던 모드는 기어이 쓰러지고 만다. 에버릿이 급하게 그녀를 병원으로 옮겼다. 다음 날 아침, 병원 침대 위의 모드는 생의 마지막을 겨우 부여잡고 있다. 그런 모드를 그저 바라만 보는 에버릿... 점점 악화되는 건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내가 물어보면 늘 거짓말을 했지. 후회하듯 에버릿이 덧붙인다,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했을까?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모드가 말한다, 이리 와... 침대 맡으로 다가간 에버릿. 난 사랑받았어... 난 사랑받았어, 에브... 이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에버릿, 그녀가 그리다 만 그림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작은 도구함 속에서 오래되어 낡아버린 쪽지 한 장을 발견한다. 그 쪽지는 그녀와의 인연의 출발이었던, 가정부를 구한다는 자신의 구인 광고였다. 밖으로 나온 에버릿, 팔기 위해 내다 놓은 모드의 그림들을 안으로 들였고 그렇게 모드의 흔적들을 담담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드가 산드라에게 했던 말,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바로 저기..." 이 대사가 내레이션으로 흐르면서 그렇게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 <내 사랑>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의 민속 화가인 "모드 루이스(Maud Kathleen Lewis, 1903 ~ 1970)"와 남편 "에버릿 루이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온 그대로 선천적 장애를 안고 있던 모드는 정규 미술 교육도 없이, 화단과의 교류도 없이 홀로 그림을 그렸던, 소위 캐나다 나이브 아트(Naiva Art)의 대표적 인물이다.


    모드의 실제 삶은 영화의 내용 그대로며 그녀의 남편 에버릿 루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몇몇 사람들은 영화가 에버릿을 미화했다고 불평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둘은 운명처럼 만나 그 작은 집에서 그렇게 평생을 함께 했던 것도, 그리고 모드가 행복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드는 8살 때부터 턱의 발달이 멈추면서 성장이 느려졌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밖으로 나가기 쉽지 않았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홈스쿨링으로 모드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관찰했기에 창이라는 프레임과 그것을 담고 있는 바깥 풍경은 그녀에게는 이미 그림과 액자가 되었을 것이다. 양친 모두 죽고 나서 딕비에 거주하던 고모가 그녀를 맡았다. 실제 에버릿과의 인연의 출발은 고모 집에서 본 신문 광고, 영화에서처럼 에버릿 루이스가 게재한 가정부 구인 광고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34살에 에버릿과 결혼했고 그와 함께, 그리고 그림과 함께 사랑의 여정을 이어갔다. 모드가 죽고 1년 뒤, 에버릿 루이스는 집에 침투한 강도의 총에 맞아 모드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현재 부부의 그 작은 집은 그대로 복원되어 캐나다 노바스코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이브 화가는 정규 미술 교육 없이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려온 화가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라면 기존의 미술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할 수 있는 폭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모드 역시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는데, 그녀의 경우 자연과 현실의 시각적 대상에 대한 인상을 즉자적으로 잡아내어 그것을 투박하게 변형시킨다. 평론가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경건하고도 소박한 형태로 승화시킨 리얼리즘이 되겠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유아틱'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파울 클레의 그림처럼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기에 영화에서 "이걸 왜들 사나 몰라요, 우리 집 다섯 살 배기가 더 낫겠네"라고 했던 잡화점 주인의 말 그대로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말에 에버릿은 "하지만 그 녀석은 안 그렸죠"라고 응수했고, 그 말 그대로 모드는 그렸다, 그것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나이브'의 특징이라면 투박하지만 생생한 어떤 것이 아닐까? 그것은 대상에 대한 즉자적인 감흥을 순간적으로 포착했을 때 표출될 수 있는 것이리라. 모드의 상황이 밖으로 나가기 어렵기에, 그래서 창문이라는 사각형 내에 존재하는 바깥세상의 풍광을, 시시각각 변화는 그 작은 세계의 변화를 순간적으로 잡아내어 빠르게 그림으로 옮겨야 했을 것이다. 그림이 곧 삶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악조건이 어쩌면 그녀에게 긍정으로 작용한 결과 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악조건을 긍정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불굴의 의지에도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에게 그림이란?"이라고 모드에게 질문한다면 에버릿과 잠시 헤어져 산드라의 집에서 기거할 때 산드라와 나누었던 대화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산드라: 모드, 그림 그리는 거 가르쳐줄 수 있어요?

  모드   : 그건 아무도 못 가르쳐요, 그리고 싶으면 그냥, 그리는 거죠. 외출을 안 해서 기억에 있는 장면을 그려요, 만들어내는 거죠.

  산드라: 우리, 알고 지낸 지 오래됐잖아요, 아직도 그 창작열의 원천이 뭔지 모르겠어요.

  모드   : 글쎄요... 전 바라는 게 별로 없어요,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요. 창문, 창문을 좋아해요, 지나가는 새, 꿀벌, 매번 달라요, 내 인생 전부가...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바로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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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e Islander Cove" Cats by Maud Lewis
"Three Black" Cats by Maud Lewis




   영화는 샐리 호킨스의, 샐리 호킨스에 의한, 샐리 호킨스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샐리 호킨스는 주인공 모드의 역할에 제대로 녹아들었기에 그녀가 아닌 다른 모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 더하여 에버릿을 연기한 에단 호크 역시, 유명한 <비포> 트릴로지에서의 수다쟁이 제시를 떠올린다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는, 하지만 교양이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표현을 못하는 과묵함과 투박함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또한 이 영화를 10년 동안이나 준비했다는 감독 에이슬링 윌시의 연출도 영화의 품위를 한껏 추켜 올린다. 부부가 살았던 그 작은 집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세트로 재현하는 것부터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한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부가 머물렀던 작은 공간의 변화를 도드라지지 않게 드러내기 위해 사계절의 순환에 맞춰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 결과 그 집은 시나브로 부부와 함께 늙어가는 공간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특히 아웅다웅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관조하듯 잔잔하게 펼쳐지는 집 주변의 아름답고도 서글픈 자연 풍광을 중간중간에 삽입시켰는데, 경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이 풍광들은 심미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하지만 더 나아가서 영화의 호흡을 조절하여 관객들을 진정시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그런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흐르는, 일관되게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들은 모드와 에버릿의 격한 마찰을 바라볼 때마저도 왠지 관조라는 단어를 차용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에 둔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걸쳐 서로에게 서서히 녹아들 듯 잔잔하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사랑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에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바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정신과 육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이전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브런치 글: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인조영혼" 참조)>를 통해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실제로 존재하는 유이한 두 실체로 내세웠고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모두 이 두 실체가 발현되는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 두 실체를 인간으로 소급시키게 되면 바로 '정신'과 '육체'가 된다. 문제는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 두 실체의 상호 관계를 데카르트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고 이는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 역시 설명이 불가능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남긴 이런 <심신이원론>의 역설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졌고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 철학사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제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던져진 과제였고 데카르트가 이미 정해놓은 정답의 근거를 더욱더 정교하게 맞춰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만년 여당이었던 서구 관념론 철학은 '이성'에서 답을 찾았고 그것은 곧 사유의 승리와 정신의 우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나마 데카르트는 형식적으로라도 연장을, 육체를 존재로서 인정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연장과 육체에 대한 존재 탈색을 시도했고 그 결과 사유나 정신만이 유일한 존재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 이면에는 자연스레 믿을 수 없는 가멸적인 것, 더럽고 불순한 존재로서의 육체에 대한 폄하와 덧씌우기가 이어져 왔다.


   <심신이원론>이 내세운 정신과 육체의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서도 유비 가능할 것이다. 육체적으로 불완전하지만 정신적으로 충만한 존재와 육체적으로는 완성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미완의 존재, 즉 정신적 존재로서의 모드와 육체적 존재로서의 에버릿이라는 두 항을 상정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두 항은 <심신이원론>의 역설을 넘어서서 서로를 보완하며 상호 소통의 장을 만들어낸다. 모드는 에버릿의 정신적 미성숙을 긍정했고 에버릿은 모드의 불완전한 육체를 긍정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몸이 되었고 그녀는 그의 영혼의 지평을 넓혀갔다. 서로 한쪽이 부족한 두 존재가 만나서 갈등하고 화해하고 부대끼면서 대립에서 공존으로, 갈등에서 공감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이 바로 사랑이라는 서사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과정은 어느 쪽이든 불완전한 존재로서 '장애'라는 기표로 붙여진 편견의 딱지를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우위가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으며 종국에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공존의 장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정반합의 과정으로 표현되는, 대립물의 투쟁과 양질 변환을 통해 진일보한 단계로 나아가는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변증법은 지양의 변증법이고 이때의 지양은 언제나 더 나은 상태, 진보적 상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의 지양은 단순한 상승이 아니다. 이들의 변증법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과정일 뿐이다. 정반의 대립을 거쳐 지양되는 새로운 합은 더 나은 상태가 아니라 나을 수도 있고 더 못할 수도 있는, 우열을 비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상태일 뿐이다. 헤겔의 지양은 끊임없는 상승을 낳지만 이들의 지양은 다름을 낳을 뿐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진보의 최종 단계를 향해 나선형으로 상승해야 하는 목적론을 전제하지만 이들의 변증법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는 단순한 원을 그릴뿐이다. 이렇게 차이를 생산하는 지양의 무한 반복이 우리의 삶이고 인생이지 않을까? 모드라는 정신적 존재와 에버릿이라는 육체적 존재 역시 이러한 삶의 변증법을 거쳐서 세월이라 불러도 될 만큼의 기나긴 기간을 통과했다. 그 기간은 소통 불가능해 보이는 두 대립물이 공존이라는 지평 위에서 소통과 공감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며 이제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황지우 시인의 다음 싯구처럼 말이다...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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