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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Nov 22. 2019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인조영혼

오시이 마모루: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Ghost In The Shell), 오시이 마모루 감독, 1995




   그전까지 실사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오시이 마모루(押井守)는 1995년에 <공각기동대>를 발표함으로써 일약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등극한다. 사실 <공각기동대>와 <스카이 크롤러(The Sky Crawlers, スカイ・クロラ, 2008)>, 그리고 그가 기획하고 각본을 썼던 <인랑(Jin Roh: The Wolf Brigade, 人狼, 1999)>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가 만든 영화나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거니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외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무국적소녀(Nowhere Girl, 東京無国籍少女, 2015)>를 포함하여 몇몇 작품들은 희대의 망작으로 꼽힐 정도다(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론, <무국적소녀>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그를 여전히 거장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공각기동대> 때문이고 앞으로 나올 그의 영화 역시 크게 기대되지도 않지만 <공각기동대>만큼은 이후로도 영원히 명작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영화의 재미도 재미지만, 또한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 자체가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질문은 "의사(擬似) 인간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며 이는 인간에 대한 규정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과 곧바로 이어진다. 이런 형식의 질문은 1982년 제작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브런치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죽음 참조)>에서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시이 마모루는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공각기동대> 발표 이후 "이제야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빚을 일정 부분 갚은 듯하다"라는 소회를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는데 그것은 육체를 비롯한 물질적인 요소가 제거된 인간에 대한 규정의 가능성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Ghost in the Shell"인데 이는 의미 그대로 "껍데기 속의 영혼"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보자면 껍데기는 인간의 육체에, 영혼은 인간의 정신에 해당할 것인데, 이 영화는 껍데기를 깨고 나온, 다시 말해 육체 없이 순수하게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사고의 총체로써 인간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런 시도들을 영화는 어떻게 구성해 나가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왼쪽: 1995년판 포스터, 오른쪽: 2008년판 포스터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두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2004년에 마모루가 감독한 <이노센스>는 이 영화의 다른 판본이 아니라 공식 후속편(Sequel)에 해당하는 별도의 영화다. <공각기동대>의 두 판본은 1995년에 제작된 순수 2D 애니메이션이 그 하나이고 2008년에 마모루가 95년판을 보정하고 3D 영상을 첨가하여 다시 제작한 리뉴얼(Renewal) 판본 <공각기동대 2.0>이 또 다른 하나다. 위의 두 포스터가 각각 1995년판과 2008년판 포스터며 이 글 맨 앞에 나온 포스터는 <공각기동대>가 2017년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의 포스터다. 두 애니메이션은 영상과 음향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보더라도 무관하다. 필자의 경우 리뉴얼 판본은 2D와 3D의 공존이 상당히 어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95년 판본을 기준으로 할 것이다. 95년에 <공각기동대>가 출시되었을 당시만 해도 난해한 주제와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한 전개 때문에 크게 히트를 치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이 영화의 진면목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게 된다. <공각기동대>는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뤽 베송의 경우 <제 5원소>에서 이 영화의 도입부를 오마주했으며 제임스 카메론도 이 영화를 '성인을 위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 칭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 2.0>을 리뉴얼했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의 이러한 인기는 TV 시리즈나 또 다른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후속작이나 프리퀼들을 양산하게 만들었다. 오시이 마모루가 직접 감독한 것은 95년, 2008년판 <공각기동대>와 공식 후속작 <이노센스> 뿐이지만 다른 감독들에 의하여 <공각기동대> 시리즈는 계속 이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카미야마 켄지(神山健治)가 감독한 TV 시리즈 <공각기동대 S.A.C(STAND ALONE COMPLEX)> 연작과 극장판들, 그리고 키세 카즈치카(黄瀬和哉)가 감독한 영화 <공각기동대 ARISE> 시리즈와 TV 연작들이 그것들이다. 물론 2017년에 할리우드가 이 영화를 실사화한 <공각기동대:고스트 인 더 쉘>도 이런 시도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실사화를 바랐던 수많은 덕후들에게 실망만 안겨준 작품이기는 했지만...


<공각기동대> 원작 만화, 시로 마사무네(士郎正宗)

   이렇게 수많은 시리즈의 양산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시 원작에 있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원작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시로 마사무네(士郎正宗)가 그린 만화 『공각기동대다. 마사무네의 경우 <공각기동대> 외에도 <애플시드>라는 유명한 만화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만화 역시 몇 개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극장 개봉을 하기도 했다. 1991년에 출간된 만화 <공각기동대>는 "The Ghost in the Shell"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한 권짜리 장편 만화였다. 하지만 마모루에 의해 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프리퀄이나 리부트의 형태로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되어 소위, "사가"라 불릴 만큼의 연대기를 구성하게 된다. 원작자 시로 마사무네의 상상력은 탄탄한 과학적 지식과 틀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재와 같은 네트워크 환경이나 A.I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1995년에 "전뇌화", "의체화", "광학미채" 등의, 현재를 이미 넘어선 개념들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이런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스토리 텔링을 전개하되 뛰어난 영상미와 아름다운 영화 음악을 가미하고 심오한 철학적 화두를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명작의 반열에 우뚝 서게 된다. 마모루가 크게 영향을 받았던 <블레이드 러너>의 미장센을 넘어서는 영상미는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화두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으며 음악 감독 카와이 켄지(川井憲次)의 음악은 이런 영상과 결합하여 영상미와 주제 의식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그렇기에 실제로 원작은 그리 어둡지 않은 전개를 갖고 있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전개를 고집하고 있다.


공각기동대 메인 테마: 환생(Reincarnation, 還生) by 카와이 켄지


   <공각기동대>는 크게 두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스토리 텔링 자체에 중점을 두고 볼 수도 있고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따져가며 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 때문에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자아'라든지 아니면 '주체'에 대한 직접적인 철학적 고민을 담은 쿠사나기의 독백 또는 심리묘사 부분을 제외하고 오로지 이야기 중심으로만 보더라도 영화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만큼 서사 역시 매우 촘촘하게 잘 짜여 있으며 어찌 보면 국제 스파이전 같은 양상을 띠지만 실제로는 국내 기관 사이의 음모와 배신이 주가 되는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서사 구조에 더하여 중간중간 끼어드는 주인공의 존재론적 독백이나 심리 묘사에서 쏟아지는 기나긴 대사들은 그 자체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번역 자막까지 열심히 읽어야 한다면 단박에 영화를 따라가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집중해서 여러 번 봐야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다.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영화의 전반적 이해를 위하여 영화가 상정하는 미래 시대와 배경,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 기술의 개념, 그리고 주요 주인공들의 소개 및 소속 부서에 대한 개략적 설명을 한 후, 다음으로 이야기 중심으로 영화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논의로 진행할 것이다.



1. 배경 및 개념 설명

   먼저 "껍데기 속의 영혼"이라는 부제까지 나아가게 된, 마사무네의 상상력이 그린 미래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공각기동대>의 배경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으로 인해 네트워크로 모든 것이 연결된 2029년의 미래 정보 사회를 상정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존재하며 국가의 전복이나 국가 간 첩보전 역시 지금의 사회처럼 유효한 시대다. 이 시대의 발달한 과학 기술은 사이보그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는데 <공각기동대>의 이해를 위해서는 사이보그의 정의 및 몇 가지 전제 기술을 알고 있어야 한다.


ㅇ 전뇌화(化)

   전뇌(電腦)는 말 그대로 전자화된 뇌 또는 전자두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전자두뇌를 의미하지 않는다. 위 그림은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쿠사나기의 제조 공정의 초기 단계를 담고 있다. 위 그림에서 붉은 박스로 마킹된 부분이 전뇌인데 인간의 실제 를 완전히 감싸는 바이오 네트워크 인터페이스로서 내부의 뇌 세포 및 신경 세포와 접촉하여 전자기 신호를 통해서 외부 네트워크와 인간의 뇌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장치다. 이런 전뇌화를 통하게 되면 특별한 외부 단말기 없이도 인터넷을 비롯한 네트워크 세계와 바로 접속이 가능하기에 별도의 행위 없이 생각만으로도 실시간 정보 검색 및 공유가 가능하다. 전뇌화된 사람들끼리는 네트워크를 통하여 말없이 생각만으로도 의사 교환이 가능하다. 이런 세계라면 당연히 외부에서의 사이버 침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 가능할 것이다. 해커는 전뇌화한 타인의 뇌에 침투가 가능한데 전뇌 침입을 통하여 타인에게 가상의 현실이나 기억을 심어줄 수도 있고 타인의 자아를 완전히 지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전뇌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타인의 뇌로 들어가는 것을 "다이브"라고 한다. 이런 전뇌 침투가 <공각기동대>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인이 된다.


ㅇ 의체화(化):

   의체(擬體)화는 신체의 일부 또는 전체를 기계로 제작된 인조 신체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은 손을 의체로 대체한 경우를 보여 주는데 의체화를 통하여 신체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특수 부대 소속이라면 당연히 신체의 일부를 무기로 개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이렇게 전뇌화와 의체화가 일반화되어 윤리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를 상정한다. 물론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신체는 온전히 보전한 채 전뇌화만 하는 것도 가능하고 전뇌화와 더불어 신체 전체에 대한 의체화도 가능하다. 공안 9과 멤버들 중 신참인 토구사는 전뇌화만 실시했기에 육체는 온전한 사람의 신체인 경우고 팀장 격인 주인공 쿠사나기는 전뇌와 더불어 신체마저 완전 의체화된 사이보그다. 하지만 이런 쿠사나기의 경우라도 뇌만은 인조가 아닌 사람의 실제 뇌라는 전제가 있다. 따라서 <공각기동대>의 사이보그 역시 인간의 지위를 갖는데 결국 인간의 조건으로서 최소한 인간의 생체 조직 중 뇌의 존재 여부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물론, 공안 9과의 우두머리인 과장 아라마키와 같이 전뇌화나 의체화 어느 쪽도 실시하지 않은 온전한 사람도 더러 있다.   


ㅇ 공각기동대와 공안 9과:

   공각기동대에서의 공각(攻殻)은 "공격형 장갑 외골각(攻撃型装甲外骨殻)"을 줄인 말로서 특수 방탄 슈트나 이런 방탄 외피로 제작된 AI 장갑 로봇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각기동대는 이런 슈트를 입고 장갑 로봇을 거느린 특수 부대를 칭하는 말이다(공각기동대 후속 TV 시리즈의 경우 거미형 AI 장갑 로봇 "타치코마"가 부대 소속 멤버들로 등장한다). 이런 부대라면 당연히 특수 장비도 보유하고 있을 터인데 특히 "광학미채(光学迷彩)"라 불리는, 착용하게 되면 투명인간처럼 착용자를 사라지게 만드는 특수 위장복 역시 이 부대 전용이다. 공각기동대는 "공안 9과"로 불리는 부서의 소속인데 인간의 뇌마저 네트워크로 연결된 고도화된 사회라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이버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조직이다. 영화 <공각기동대>의 인기에 힘입어 키세 카즈치카 감독에 의해 2013년부터 연재된 TV 시리즈 <공각기동대 ARISE>는 공안 9과의 창설 배경을 다루고 있다. 공안 9과의 핵심 멤버는 위의 그림에 나온 순서대로, 공각기동대 팀장이자 주인공 "쿠사나기"와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 "바토", 그리고 공안 9과 과장인 "아라마키", 신참 요원 "토구사", 해킹 및 정보 담당 "이시가와" 이렇게 다섯 명이다. 이러한 공안 9과와 대립 관계에 있는 "공안 6과"는 특수 외교 담당 부서로서 국정원이나 CIA 정도에 해당하는, 그렇기에 외부에 알려진 공식적인 부서다. 따라서 사이버 테러 관련해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는 특수한 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는 공안 6과가 개입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몰래 처리되어야 하는 암살이나 대테러 진압 등은 공안 9과의 공각기동대가, 심지어는 공안 6과도 모르게 비밀리에 담당하게 된다. 외교전과 관련하여 사정이 이러다 보니 공안 9과와 6과는 서로 각을 세우는 대립 관계일 수밖에 없다.



2. 공각기동대, 첩보 스릴러 

   영화는 공안 6과가 공식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외교관 암살을 공안 9과가 대신 처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입부는 후반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프로젝트 2501"이라는 떡밥을 던진다. 고층 빌딩의 꼭대기, 롱코트를 걸친 공안 9과 소속의 쿠사나기 마코토 소령이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가버필' 공화국의 외교관이 프로젝트 2501 관련 프로그래머를 본국으로 빼돌리기 위해 설득을 하고 있고 쿠사나기는 그 내용을 도청하고 있다. 귀국해서 다시 만들면 돼, 버그가 없는 프로그램은 없지만 잡지 못할 버그도 없지... 프로그래밍을 업으로 하는 필자의 경우 이 말에 100% 공감을 하지만 영화의 프로그래머는 반문한다, 다시 만들어? 당신은 뭘 모르는군, 그게 정말 버그인 줄 아나? 프로젝트 2501에 필요한 건... 이때 6과가 돌입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가 왔고 소령은 롱코트를 벗어던지고 까마득한 고층 빌딩 아래로 몸을 던진다. 매우 인상적인 이 투신 장면은 후에 뤽 베송이 영화 <제 5원소>에서 주인공 리우(밀라 요보비치)가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오마주했다. 설득 중 무장 경찰들과 함께 공안 6과가 들이닥친다. 6과장은 공인 프로그래머를 국외로 빼내는 건 무기 유출법 위반이라며 프로그래머 회수를 주장했고 외교관은 외교 특권을 들어, 프로그래머가 망명 신청을 했으며 국제법에 근거해 그를 데려갈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공안 6과가 어찌하지 못하는 사이 창문을 뚫고 날아온 한 방의 총알이 외교관의 이마에 박혀 버린다. 6과 요원들이 깨진 창문 밖으로 암살자를 찾았을 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광학미채를 입은 채 투명인간처럼 사라지는 쿠사나기의 미소뿐이었다.


   이렇게 인상적인 프롤로그에 이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가 시작된다. 이 부분에서 음악 감독 카와이 켄지(川井憲次) 만든 그 유명한 <공각기동대> 메인 테마 "환생(Reincarnation, 還生)"이 흐르면서 사이보그인 주인공 쿠사나기가 제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이 전뇌화와 의체화를 통한 사이보그 생산의 전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쿠사나기가 뇌만 생체이고 나머지 모든 부분은 인조로 제조된 사이보그임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런 자신의 제조 과정에 대한 꿈이라도 꾼 듯 잠자리에서 눈을 뜬 쿠나사기,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선다.

   

   쿠사나기가 출근한 곳은 공안 9과 전뇌 분석실, 전화선을 통해서 전자두뇌를 해킹당한 외교장관 통역사의 전뇌를 분석하고 있다. 1년 전 겨울부터 EC권에 출몰해서 주가조작, 정보수집, 정치공작 테러, 전뇌 윤리 침해 등 수많은 사이버 범죄를 저질러 국제 수배범 리스트에 오른, "인형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해커가 가버필 공화국과의 비밀 회담 방해를 위해 통역사의 전뇌 해킹을 시도했다. "인형사"라 불리는 이유는 이 해커가 특정 국가 기관의 메인 프레임이나 서버를 해킹하는 것이 아니라 전뇌화한 사람이나 사이보그의 고스트를 해킹하여 피해자를 자신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부리기 때문이다. 해킹 발신지를 추적한 끝에 장소를 특정했고 대원들은 현장으로 출동한다. 해킹 발신지는 주기적으로 장소가 바뀌었는데 그것은 쓰레기 청소 차량의 이동 동선과 일치했다. 영화는 여기서 고스트 해킹의 피해의 예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제가 된 쓰레기 차량의 청소부는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 자기 아내의 속내를 알고자 한다. 바쁜 일상에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외도를 의심한 아내가 갑자기 이혼 소송을 걸었다. 심지어 너무나도 애지중지하는 어린 딸마저도 자신을 외면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아내를 만나서 오해를 풀고자 했지만 아내의 변호사가 접견을 금지했다.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프로그래머가 해킹 방법을 알려 주었고 장소를 바꾸면서 시도하라는 그의 충고에 쓰레기 차를 타고 지역을 돌면서 공중전화를 통해 해킹을 시도했다. 쿠사나기 팀은 이 문제의 쓰레기 차량을 추적했고 이 사실을 눈치챈 청소부는 프로그래머에게 추적 사실을 알리려 한다. 도심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청소부는 체포되었지만 프로그래머는 철갑탄으로 저항을 하고 일반인은 구할 수 없는 광학미채까지 착용한 채 도망가 버린다. 쿠사나기와 바토의 끈질긴 추격과 결투를 통해서 결국 프로그래머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이 추격전 및 전투씬은 액션도 좋지만 영상미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체포된 프로그래머는 결코 아무것도 불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태어난 고향이나 어린 시절, 엄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쿠사나기에게 외투를 걸쳐주면서 바토는 말한다, 고스트가 없는 인형은 슬프지, 특히 붉은 피가 흐르는 놈은 말이야... 고스트 해킹을 당한 사람은 결국 자의식 없이 순전히 조종만 당하는 인형일 뿐이다. 특히나 의체화는 하지 않고 전뇌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체포된 청소부 역시 마찬가지다. 해킹의 피해는 유사 체험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피해자의 기억은 모두 가짜 기억일 뿐이다. 청소부의 경우 부인도, 딸도, 이혼도, 외도도 모두 가상이었고 그가 별거를 위해 빌렸다는 방은 십 년 넘게 그가 혼자 살아온 방이었다. 믿지 못하는 그에게 자신이 언제나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딸과 함께 찍었다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에는 딸은 없었고 청소부 혼자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딸 이름도 몰랐고 아내와 언제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결혼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해킹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정부 요원의 고스트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 꿈은... 어떻게 지울 수 있죠?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밤, 한 여인이 나체 상태로 고속도로에 서 있다. 놀란 차량들이 아슬하게 그녀를 비켜갔지만 운 나쁜 트럭 한 대는 미처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고 9과가 재빠르게 시신을 회수했다. 연락을 받고 뒤늦게 전뇌 분석실에 도착한 쿠사나기에게 바토가 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2시간 전 기밀리에 정부에 의체를 납품하는 "메가틱" 사의 공장 라인이 저절로 가동되었고 의체 한대가 제작되었다. 담당자가 갔을 때 의체는 이미 완성되어 도망가고 없었고 9과가 비상망을 펼쳐 수색하던 중에 양심적인 트럭 운전사의 제보로 운 좋게 의체의 회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메가틱 사는 9과에 의체를 공급하고 있었고 의체를 하지 않은 과장과 토구사를 빼면 쿠사나기를 비롯하여 9과 모두의 의체가 메가틱 사의 것이다. 문제는 메가틱 사는 전뇌화 공정이 없는, 순전히 의체만 제작, 공급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제의 그 사이보그 역시 전뇌 없이 의체만으로 제작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움직였고 행동했다. 이는 육체만 만들고 고스트, 즉 영혼을 불어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체를 분석한 전뇌 전문의의 말에 따르면 머릿속에 생체로서의 뇌는 한 조각도 없었음에도 보조 전뇌 속에 고스트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 즉, 뇌 없이 사고하는 어떤 것이 이 의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이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고스트 지도를 작성하고 다이브 해보지 않는 한 추론일 뿐이란다. 이에 쿠사나기가 메가틱 사 현장 조사 후에 자신이 직접 다이브를 시도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때 공안 6과 과장 나카무라가 닥터 윌리스라는 미국인 한 명을 대동하고 9과를 찾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메가틱 사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대기 중이던 쿠사나기와 바토, 토구사 옆을 스치면서 나카무라와 닥터 윌리스가 지나간다. 토구사는 주차장에서 이들의 차를 발견했다. 둘만 왔을 뿐인데 차는 두 대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토구사는 CCTV를 통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둘이 내린 직후 문이 다소 늦게 닫히는 것을 발견했다. 적외선, 감압계 기록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당시 엘리베이터 내에는 이 둘 외에 광학미채를 착용한 동승자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토구사는 전뇌 통신을 통해서 쿠사나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한다. 분석실에서 9과장 아라마키와 대면한 나카무라는 문제의 사이버 바디 회수에 대한 결재를 담은 외무 대신의 허가서를 내밀며 9과는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한다. 아라마키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요구했을 때 사이버 바디를 분석 중이던 닥터 윌리스는 '그'가 맞다고 했다. 나카무라는 '그'의 정체를 문제의 사이버 바디 내부에 존재하는 고스트의 원주인이라고 설명했다. 익명의 '그'는 바로 전자두뇌 범죄 사상 가장 독특하다고 평가받는, 미국 출신의 해커 "인형사"였다. 6과는 인형사의 출현 초기부터 그를 체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출범시켰고 지금까지 계속 그를 쫓고 있었다고 한다. 인형사 전용 특수 공성 방벽을 쌓아 올려 특정 바디로 들어가도록 인형사를 유도했고 그가 다이브를 통하여 그 바디의 의식을 잠식하도록 만든 후 본체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운 나쁘게도 인형사의 고스트가 존재하는 그 시체는 9과로 흘러 들어가 버렸지만 인형사는 국적이 미국이고 애초에 자신들이 미국과 협력해서 체포했기에 자신들이 회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카무라는 한 마디 덧붙인다, "녀석(인형사)의 시체는 어딘가에서 신원 미상으로 발견되겠지만..." 


   이때 반전이 일어난다. 문제가 된 의체 속의 고스트, 즉 인형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체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면 육체를 소유한 적이 없으니까..." 센서가 계속 작동하고 있어서 의체가 말을 한다고 추측했지만 외부 컨트롤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인형사는 의체 자체의 출력을 이용하여 말을 하고 있었다. 인형사는 6과의 공성 방벽 때문에 의체로 들어갔지만 현재 이곳 전뇌 분석실에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나카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자기 보존을 위한 단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단순 프로그램으로 치부해버린 그 인형사는 정보라는 관점에서 나카무라의 반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논리 정연하게 전개한다. 인형사의 이 논거는 기존의 생명 정의에 대한 관점을 흔드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논거를 이어가며 인형사는 자신의 탄생 배경을 언급한다.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다. AI가 아니다. 내 코드는 프로젝트 2501..." 이 순간 마치 인형사의 이런 발화를 막고자 하는 듯 연막탄이 여러 발 터지면서 분석실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인형사의 고스트가 존재하는 사이버 바디는 사라지고 없었다. 광학미채를 착용한 6과 요원들이 인형사의 바디를 탈취한 것이다. 하지만 토구사의 눈치 빠른 행동으로 인해 쿠사나기와 대원들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토구사는 바디를 탈취한 차에 총으로 추적 장치를 쏘아 바토와 함께 미행을 시작했고 쿠사나기는 완전 무장을 한 채 전투용 헬기에 올랐다.


   인형사와 6과는 깊은 연관이 있음에 분명했다. 쿠사나기는 6과와의 이런 연관을 확실히 밝히기 위하여 이 탈취 행위를 바로 막지 않고 미행을 택했던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인형사는 9과와 연관이 깊은 메가텍 사를 택했다. 그리고 아라마키가 협력 의사를 밝혔음에도 6과는 인형사가 생명체임을 주장하는 시점에서 다급하게 의체를 탈취했다. 6과와 관련된, 특히 "프로젝트 2501"과 관련하여 외부로 드러나면 안 될 어떤 더러운 음모가 인형사의 입에서 완전히 새어 나온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라는 판단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정보 분석 요원 이시가와가 인형사와 관련하여 6과를 해킹해본 결과 먼저, 윌리스는 미국 뉴트론 사의 전략 연구 부장으로서 AI 연구의 일인자였고 외무성에서 발주한 프로젝트의 팀장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핵심 프로그래머는 바로 영화 도입부에서 망명을 신청했던, 하지만 쿠사나기가 망명 희망국의 대사를 암살하여 망명을 막았던 그 프로그래머였다. 또한 6과는 인형사 출몰 직후 그를 포획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가 2501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인형사가 출현하기 1년 전에 이미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 이시가와는 충분히 추론 가능한 가설을 내세운다. 그 가설은 6과가 인형사를 쫓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체포가 아니라 회수라는 것, 인형사는 외무성이 외교상의 억지를 쓰기 위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었고 설명 불가능한 어떤 원인으로 인해 인형사를 제어할 수 없게 되자 기를 쓰고 회수하기 위해 무리하게 9과에서 탈취했다는 것, 탈취의 이유는 그 프로젝트의 내용이 인형사의 입에서 새어나가는 날에는 외무 대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둘째치고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과의 방화벽이 튼튼해서 더 이상 정보를 캐지는 못했지만 이 프로젝트의 파일명이 바로 "프로젝트 2501"이라고 이시가와는 보고를 마무리했다. 


   이제 6과의 납치 목적은 분명하다. 프로젝트 2501 관련 사항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인형사의 제거가 바로 그 목적이다. 하지만 인형사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명 인형사는 AI 프로그램이었지만 자신을 창조한 코드의 통제를 벗어나서 스스로 자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 원인은 영화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필자가 확신하기에 그 원인은 바로 "우연"이란 이름을 가진 그 무엇일 것이다. 6과와 인형사의 연관성을 밝혀줄 확실한 증거를 위해 추적을 택했다고 했지만 쿠사나기 역시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왜 인형사가 도피처로 자신이 소속된 9과를 택했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메가틱 사를 조사하러 바토와 나서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 바디, 어찌 나와 많이 닮았어..." 이렇게 바토와 토구사는 차로, 쿠사나기는 헬기로 그들을 추적했다. 탈취조는 두 대의 차량으로 움직이다 어느 시점에서 갈라졌다. 바토와 토구사가 한 차량을, 쿠사나기는 다른 차량을 뒤따라갔다. 적정 시점에서 바토는 추적하던 차를 멈춰 세우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 차량에는 인형사가 없었다. 탈취된 인형사의 바디는 다른 차량에 있었다. 쿠사나기가 추적하던 차량은 도심을 벗어나 멀찍이 외곽 쪽에 위치한, 지금은 침수되어 텅 비었지만 예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거대한 유리 돔을 지붕으로 가진 건물로 향했다. 바토가 자신이 지원을 가겠다며 기다리라는 부탁도 마다한 채 쿠사나기는 홀로 인형사의 의체를 실은 차량이 숨어든 건물로 침투한다. 하지만 그 차량은 광학미채로 위장된 커다란 공각 기갑 로봇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전투용 사이보그로서 탁월한 성능을 보유한 쿠사나기였지만 혼자서는 공각 기갑 로봇을 상대하기에는 벅차다. 화려하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쏟아지는 철갑탄을 피하며 실탄을 다 소진하기를 기다린 후 쿠사나기 역시 광학미채를 이용하여 기갑 로봇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로봇 등에 위치한 코어 커버를 열고자 했다. 잠긴 커버를 힘으로 강제로 열고자 하는 쿠사나기, 그것은 힘과 힘의 팽팽한 대결이었고 쿠사나기의 사이버 바디는 점차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팽창해서 내부의 인조 근육과 뼈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포기를 모르는 듯 계속 힘을 가하던 쿠사나기의 팽창된 팔과 다리는 결국 터져버렸고 그녀의 나머지 몸체는 튕겨 나가 바닥에 나뒹군다. 기갑 로봇이 팔을 뻗어 쿠사나기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지만 쿠사나기의 몸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그저 대롱거릴 뿐이다. 그때 거대한 총성이 여러 번 울렸고 기갑 로봇은 힘을 잃고 쿠사나기의 몸뚱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작동을 멈춰 버린다. 바토가 특수 제작된 대기갑용 머신 건을 들고 나타났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쿠사나기는 바토에게 인형사의 전뇌로 다이브를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바토는 쿠사나기의 안전을 위해 다이브 과정을 모니터링 가능하도록 조치한 뒤 인형사와 쿠사나기를 나란히 눕혀 두 전뇌 사이의 회로 연결을 마무리했다. 상공에서는 인형사 제거를 위해 티타늄으로 된 전뇌를 뚫을 수 있는 프레스트 탄을 장착한 공안 6과의 헬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타깃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니 쿠사나기도 프레스트 탄의 대상이었다. 바토가 걱정스레 지켜보는 가운데 쿠사나기가 말했다, 시작할게... 이제 인형사의 전뇌로 향하는 다이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이브가 아니라 하나의 융합이었다. 그리고 이 융합의 결과는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가 자문하는 여러 철학적인 질문들을 검토한 후에 이야기되어야 한다.



3. 공각기동대와 데카르트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애니가 토대를 둔 만화 <공각기동대> 1권은 『The Ghost in the Shell』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부제는 "껍데기 속의 영혼"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터인데 영화에서의 고스트는 전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의식을 가진 영혼, 즉 사유 가능한 이성을 담지한 정신을 의미한다. 이 영혼은 인간뿐만 아니라 실제 뇌의 일부라도 가진 채 전뇌화된 사이보그에게도 해당된다. 반면에 쉘이 의미하는 껍데기는 구체적으로는 전신 의체화된 사이보그의 신체, 즉 육체에 해당한다. 이런 대응을 확장해 보면 정신과 육체라는 고전적 대립항으로 환원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환원의 종착역은 결국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가 될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가 데카르트를 좋아하기는 한 듯하다. 이 영화의 후속편인 <이노센스>에서 마모루는 바토의 입을 통해 "인간과 기계,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지 않았던 데카르트는 다섯 살에 죽은 딸과 꼭 닮은 인형을 프랑신느라 이름 짓고 애지중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라고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물론 마모루 자신은 데카르트를 읽어본 적은 없다고 고백했지만, 그리고 원작자인 시로 마사무네가 데카르트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영문 타이틀부터가 데카르트와 무관할 수는 없다. "The Ghost in the Shell"이라는 부제는 헝가리 출신의 영국 소설가이자 과학 비평가인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 1905~83)가 쓴 심리철학 교양서 The Ghost in the Machine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기서의 머신 역시, 쉘이 껍데기를 의미하는 것처럼 그것을 작동시키는 운전자가 없으면 빈 깡통에 불과한 단순 기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76)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비판할 목적으로 내뱉은 말로써, 이때의 고스트는 인간의 정신에 해당하는 영혼이라기보다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와 가장 가까운 "귀신" 또는 "유령"에 해당한다.


   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 모던이나 해체 철학의 등장 이후,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관심의 대상에서 꽤나 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대 철학 부류에 반대하는 이성 중심의 철학이나 SF 장르의 문화 영역에서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고 이러한 분리는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철옹성같은 틀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데카르트 이전의 중세는 철학이나 과학 모두 신학의 하녀 역할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를 위시한 근대 과학 혁명이 불러온 파장은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급진적이고도 직접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과학 혁명은 그동안 신학이 신의 이름으로 보증했던 진리의 문제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커다란 균열을 야기했고 이제 철학은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서 진리의 보증자를 인간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근대 진리의 문제는 바로 대상과 그것에 대한 인식의 일치 여부였다. 중세라면 자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의 존재에 대하여 신이 직접 보증자로 나섰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근대는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기에 일치 여부와 그 가능성 역시 인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이에 데카르트가 나섰고 그 증명을 시도했다. 그는 이 과업을 위하여 우선 "방법적론적 회의(懷疑)"를 택했는데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것을 찾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꿈이나 상상, 길버트 라일이 언급했던 기계 로봇도, 당시 자명하다고 여겨졌던 기하학적 명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까지도 의심했다. 하지만 그러한 극단적 회의의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단 하나의 진리,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기토'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명제는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존재"를 의미하는, 즉 "사유(思惟)=존재"라는 등식 관계를 확정한 것이다. 또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그런 기나긴 회의를 거쳐 발견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주체인 동시에 이 '나'라는 존재는 신이 없어도 사고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현상적으로 모습이 바뀌고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실체라고 한다면 이 실체는 다른 변화의 원인이 되지만 다른 것에 의한 결과는 결코 될 수 없는 영원한 특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 사유를 실체로 규정했고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의 존재 역시 인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그는 주체 바깥의 가변적인 대상들을 가능케 하는 본질로서 "연장(延長)"이라는 실체를 규정한 후 "본유관념"이란 것을 끌어들여 사유가 연장을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의 이원론이 완성된다. 즉, 실체는 '사유'와 '연장' 둘 뿐이며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모든 존재자들은 이 두 실체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로 존재하는 정신과 연장으로 존재하는 육체 역시 분리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되는 것이다.


   사유를 존재 또는 실체로 규정했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물질적인 존재인 육체는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지만 생각, 사고, 정신에 해당하는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존재를 갖추지 못했기에 감히 존재한다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꺼림칙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에 의하여 사유-영혼 자체가 실체이자 존재임이 선언되었고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육체라는 존재와는 완전히 독립된 유이한 존재임이 증명되었기에 영혼은 그때부터 육체 이상의 존재론적 위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실체라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사유가 연장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데카르트 시대부터 직관적인 반론이 즉각적으로 주어졌다. 바로 인간 자체가 반론의 근거가 되는데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육체와 언제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정당화해버린다면 정신과 육체의 공존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이런 데카르트에 반기를 들어 사유나 연장은 개별 실체가 아니라 우주의 만물 전체가 하나의 실체며 이런 하나의 실체가 나타나는 두 가지 양태가 사유와 연장이라고 하는 범신론적 일원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이런 반론들에 대하여 어떻게든 정신과 육체를 연결시키기 위한 어색한 만남을 주선해야만 했고 그래서 "송과선(松果腺)"이라는, 뇌 주위에 위치하는 이상한 기관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결국 다시 신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길버트 라일 역시 자가당착에 빠져버리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이원론을 비판하고 인간의 정신이란 결국 물질인 뇌 안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유물론적 주장을 펼치기 위해 "마치 기계 안에 귀신(The Ghost in the Machine)이 들린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인가?"라는 비유를 든 것이다.


  <공각기동대> 역시 이러한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를 전신 의체화된 "육체:사이버 바디"와 이를 소유한 쿠사나기라는 "정신:고스트(자아, 영혼)"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 "껍데기 속의 영혼"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육체라는 껍데기에 갇힌 독자적인 영혼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보면 데카르트의 실제 의도와 상당히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길버트 라일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비판할 목적으로 예시했던 비유를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인간 정신 활동의 전제를 '뇌'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단 한 조각의 뇌라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 전뇌는 영혼이 있을 수가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인형사라는, 연장이 없는 순수 프로그램의 출현은 바로 "기계 안에 고스트가 들려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준다. 이때의 고스트는 귀신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증명한 '실체로서의 사유'라는 것이며 종국에는 육체나 연장, 물질과는 전혀 무관한 순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향해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렇기에 부제 "The Ghost in the Shell"은 어찌 보면 칼비노의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나오는, 텅 빈 갑옷 속에서 의식과 의지만으로 존재하는 기사 "아질울포"에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지향점으로 나아가기 위해 쿠사나기는 자신의 의체에 대하여 부단히 의심을 품고 자의식과 정체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의를 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화두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쿠사나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종국으로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새로운 영혼, 하지만 전지전능한 영혼을 지향한다. 그녀의 이러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닷속으로의 잠수와 이어서 전개되는 바토와의 대화다.


   위 장면은 여러 글들에서 꽤나 많이 인용되는 장면이다. 쿠사나기는 잠수복을 입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한참을 내려간다. 심해의 완전한 고요 속에서 잠시 머물다 온전히 부력에만 몸을 맡긴 채 공기방울을 내뿜으며 천천히 수면을 향해 올라오는데 수면에 근접하면서 위쪽 해수면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렇게 잠수를 마치고 보트 위로 올라온 쿠사나기에게 바토가 질문한다, 바다로 잠수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쿠사나기는 이렇게 답한다;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둠, 그리고 어쩌면, 희망... 캄캄한 바닷속에서 웬 희망이냐는 바토의 말에 해면으로 떠오를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쿠사나기의 희망, 다른 내가 있을 거라는 그런 기분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거대한 복선을 담고 있다. 타인의 전뇌 속으로 들어가는 것, 즉 '다이브'라는 영어 표현 자체가 잠수. 또한 심해 속으로의 쿠사나기의 '잠수'는 타인의 전뇌 속으로의 '다이브'에 대한 환유가 된다. 그리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를 해수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거울 효과와 동일하며 거울 속에 반사된 나는 다른 나, 나라는 타자가 된다. 해수면 위로 오르는 순간 거울 속의 타자와 결합하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나와는 차원이 다른 내가 되는 "융합"에 대한 복선을 깔고 있다. 또한 이 복선은 쿠사나기의 전뇌로 직접 전달되는 인형사의 말과도 곧바로 연결된다. 위에서 이뤄지는 바토와의 이 대화 씬 마지막에 "지금 우리가 자신을 거울로 보듯 보이는 건 희미하도다..."라는 웅얼거림이 들린다. 놀란 쿠사나기가 바토에게 묻는다, 방금 이 말, 너지? 하지만 이 웅얼거림의 주인공은 바토는 아니었고 당연히 인형사일 것이다. 사실 이 웅얼거림은 고린도전서 13:11-12』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인데 후반부에서 가서야 이 말의 전문과 의미는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그 의미는 해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반사된 자신과 결합하는 장면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쿠사나기의 막연한 기대치인 "또 다른 나"는 자신의 고스트에 대한 회의(懷疑)를 담고 있다. 이런 회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의 고스트를 품고 있는 전신 의체화된 육체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 이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기 위해 방법론적 회의를 택했던 데카르트의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이런 회의는 쿠사나기가 의체를 전혀 갖지 않은 토구사를 9과에 합류시켰다는 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전뇌 해킹을 당한 청소부를 추적할 때 함께 출동하면서 토구사는 왜 자신을 9과의 멤버로 차출했는지 물어보았다. 부정규 활동 경험이 없는 형사 출신에다 기혼이며 일부 전뇌화하기는 했어도 뇌는 잔뜩 남아있고 몸은 거의 생몸이기 때문이라고 쿠사나기는 답했다. 그러면서 기계화된 육체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출하는데 전투 단위로서 어느 정도 우수해도 같은 규격품으로 된 시스템은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될 것이기에 조직도, 사람도, 특수화의 끝에 있는 건 느슨한 죽음뿐이라고 쿠사나기는 단정 짓는다. 선상에서 이어지는 바토와의 대화에서도 그런 불신은 반복된다. 쿠사나기는 바토의 몸이 의체가 아닌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질문하면서 전뇌와 의체에 의지해 초인적인 능력을 추구한 결과 정비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됐지만 불만을 얘기할 처지는 못된다고 넋두리를 한다. 자신들은 9과에 영혼까지 판 것은 아니라는 바토의 말에 그녀는 영혼의 정체성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밀고 들어간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듯 자신이 자신답게 살려면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지, 타인을 대하는 얼굴, 자연스런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린 시절의 기억, 미래의 예감...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이 아니라고 한다. 전뇌가 접속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 모든 것이 '나'의 일부이며 '나'라는 의식 그 자체를 만드는 동시에 계속해서 '나'를 어떤 한계로 제약하지... 의체에 대한 쿠사나기의 불신은 외부의 감각적 소여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다름아니다. 즉, 의체를 통해 주어지는 외부 세계인 네트, 그런 네트에 의해 만들어지고 제약되고 규정되는 '나'를, 그런 나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이어서 이런 쿠사나기의 고민을 대사 한 마디 없이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등장한다. 이 씬은 <공각기동대>에서 최고의 영상미와 사운드를 겸비한 장면이기도 하다. 바토와의 선상 대화 직후 장면이 바뀐다. 그리고 이 영화의 메인 테마인 <환생>이 웅장하게 흐르면서 화면은 <공각기동대>가 배경으로 하는 시대의 거리를 찬찬히 비춘다. 요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거리의 풍경(거리 묘사는 홍콩을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이지만 묘사된 풍경의 미장센은 압권이다. 허름하게 솟은 빌딩들 위로 거대한 전투기의 실루엣이 지나간다, 수상 도시의 건물 사이 수로로 배가 떠다니고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걸어간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선 웰시 코기 한 마리가 짧은 다리를 난간에 걸치고 지나가는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거리나 물 위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다, 갑자기 비는 내리고 비를 피해 사람들이 다급하게 흩어진다, 노란 우비를 입은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 일렬로 다리를 총총 가로질러 간다... 이런 장면들이 무심하면서도 건조하게 흘러가면서 <환생>의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사운드가 디스토피아적 도시의 장면 장면들과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홀로 배를 타고 스쳐 지나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쿠사나기. 문득 어느 2층 카페에 앉아 있는 어떤 여인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그 여인 역시 쿠사나기와 눈이 마주치며 서로를 응시한다. 수로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쿠사나기를 따라 그 여인의 시선도 함께 움직인다. 이번에는 미러링이 아니라 실제 타자로서의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더 확대되어 대량으로 복제 가능한 육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거부감마저 부가된다. 이 멋진 장면이 지나가고 인형사를 가둔 사이버 바디가 9과로 유입된 후, 바토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쿠사나기는 이 거부감의 실체를 더 구체화한다. 쿠사나기는 문득, 인형사의 사이버 바디가 자신과 닮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의 대사: 나 같이 완전히 의체화한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전자두뇌와 의체로만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닐까? 아니, 무릇 처음부터 나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바토가 강하게 반발한다, 네 티타늄 두개골 안에는 뇌도 있고 제대로 인간 취급도 받고 있잖아! 이어지는 쿠사나기의 반론; 자신의 뇌를 본 인간 따윈 없어, 결국은 주위의 상황으로 나 같은 게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야. 이는 실체로서의 자신을 온전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장이라는 감각적이고 물질적 존재에 근거하여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 바토는 쿠사나기의 회의에 대한 핵심을 찔러 질문한다, 자신의 고스트를 믿을 수 없는 거야? 쿠사나기 역시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답한다, 만약 전자두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한다면 그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바토는 이런 농도 짙은 고민은 감당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찮아!"라는 회피성 넋두리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살펴보았을 때 <공각기동대>에서의 화두는 "사이보그도 인간인가"라는 그런 질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뇌라는 장치 속에 일부라도 생체로서의 뇌가 남아 있는 사이보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일상을 살아간다.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와 같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사람으로 대우받고 스스로도 사람이라 생각한다. 바토의 말대로 자신들은 9과에 영혼까지 팔지는 않았다고 하며 인간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자의식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이는 <총몽(브런치글: "유토피아를 향한 절망적인 몸부림" 참조)>의 사이보그관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질문되는 것은 사이보그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문제, 즉 인간으로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다. 특히 쿠사나기라는 특별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문제가 된다. 의체화된 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못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는 그런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의 삶을 생각해 보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라는 존재들은 하이데거가 지적한 "Das Mann"으로서 일상성 속에서 비본래적 삶을 살아간다.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바토처럼 웬만한 것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철학자나 관련 인문학자가 아니라면 쿠사나기와 같은 그런 고민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쿠사나기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 소수는 이런 고민을 하는 별난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보는 타인들의 시선은 그저 신비한 사람이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그런 고민들은 그들에게는 바토의 말 그대로 "하찮은" 고민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공각기동대>의 이런 사이보그와 실재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라는 익명의 인간들은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또한 영화 자체가 그런 사이보그가 비일비재하기에 굳이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개의치 않는 미래 사회를 상정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 자신에 대한 회의를 이미 하고 있다.


   하지만 쿠사나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껍데기, 의체 또는 육체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 코드로서의 인형사는 다음과 같이 생명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을 때 6과장 나카무라는 인형사가 생명체임을 부정하며 그저 단순한 자기 보존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요청을 일축해버렸다. 이에 인형사는 인간들의 DNA 역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인형사는 정보의 관점에서 생명체를 정의하고 있다. 생명체라는 것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태어난 결집점과 같은 것으로서 종으로서의 생명체는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기에 인간 개개인을 구분 짓는 것은 단지 실체 없는 기억일 뿐이며 결국 인간은 환상과도 같은 기억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는 쿠사나기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기억이라는 감각적이고 경험적 요인에 의해 정의되는 나에 대한 불신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형사는 의미 심장한 말을 한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케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한다. 인간을 규정하는 기억이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면? 실체가 없는 기억은 정보로서 인간을 규정한다. 그런 기억의 외재화는 기억과는 무관한 정보들, 예를 들어 외부 장치에 저장되는 여타 지식 정보나 음성, 영상 정보들과의 차별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는 인간 규정의 근거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동시에 기억과 무관한 순수 정보로도 인간, 더 나아가서 생명체를 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궤변이라는 나카무라의 항변에 인형사는 현재의 과학은 아직 생명체를 정의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AI가 아니다, 내 코드는 프로젝트 2501...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다!" 인형사의 주장은 단순한 궤변으로 취급하기에는 나름 정교하다. 하지만 그 정교함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나 생명체에 대한 가능한 규정 중 일부를 극대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근거로 내세운 기억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아니 생명체의 기억은 단순이 데이터 베이스화되어 날짜와 시간을 입력하면 툭 튀어나와 그대로 재생되는,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같은 그런 기억이 아니다. 생명체의 기억은 감각을 따라 배치되어 의도치 않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도, 하지만 생생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하며 때때로는 왜곡되기도 하는, 육체라는 몸 전체에 곳곳이 각인된 그런 기억이다. 사진이나 영상, 녹음된 음성처럼 시간을 지워버린 외부화된 기억과는 다르게 인간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하는 그런 기억이다.



4. 終章: 초월과 불멸을 향하여

   이제 영화의 결말을 이야기할 때다. 쿠사나기는 인형사의 전뇌로 다이브를 시도하지만 사실 허용된 침투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융합"이라는 빅 픽처를 완성하기 위해 인형사가 던진 미끼를 쿠사나기가 덥석 물었을 뿐이다. 인형사의 전뇌와 연결되었을 때 쿠사나기의 눈에는 자신의 얼굴을 포함하여 위의 장면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누구의 눈으로 보는 것일까? 이제 "내 코드는 프로젝트 2501"이라는 인형사의 말이 들려오고 자신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기업 탐사, 정보 수집, 공작, 특정 고스트에 프로그램을 주입해서 특정 조직이나 개인의 전략적 유용성을 증대시켜왔다. 네트를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인형사가 자신을 자각하게 된 원인은 설명하지 않는다(사실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바트가 쿠사나기의 다이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계속 자신의 설명을 이어가는 인형사의 목소리가 쿠사나기의 몸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어찌할 방안은 없다. 인형사는 쿠사나기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녀가 접속했던 네트 상의 여러 흔적을 더듬어 9과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자신의 의지로,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음을 실토했다. 그렇게 수많은 난관을 뚫고 쿠사나기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스스로를 지능을 지닌 생명체라고 했지만 현 상태로는 불완전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기본 과정인 종족 보존, 즉 스스로는 소멸되지만 자손을 통해서 자신을 남기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기본 기능인 자기 복제가 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프로그램 복제를 통한 존속은 허약한 단순 복사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통해서는 개성이나 다양성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명체는 다양성을 통해서 불멸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단다. 세포는 반복되는 대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고 노화하며 죽는 순간 다량의 경험 정보를 지우고 오직 유전자만을 남기는데 이런 과정의 반복은 곧 불멸을 위협하는 파국에 대한 방어 기제라는 것이다.


   이제 쿠사나기를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융합"을 제안한다, 완전한 통합으로서의 융합,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 개개의 존재를 버리는 융합, 그래서 그 후에는 서로를 인식하는 건 불가능할 융합.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종족 보존을 위한 개체대 개체로서의 결합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식을 낳을 수도 없는데? 인간이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듯 자신과 그녀 사이의 변종을 낳아서 네트에 흘릴 것이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지금의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집착은 자신을 계속 제약할 뿐이다. 그러면 왜 하필 쿠사나기인가? 이 질문에 인형사는 대답한다;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실체와 허상처럼 우리는 서로 닮았다, 나에게는 나를 포함하는 방대한 네트가 접합되어 있다, 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너에게는 그것이 그저 눈부신 빛으로 보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약된 가능성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제약을 벗어던지고 한 차원 더 높은 상부구조로 상승할 때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나라는 제약을 깨뜨리고 자신을 버림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존재로 상승하는 것... 여기에는 물론 육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어디,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나지 않은가? 이건 종교적인 논리며 초월이다. 성직자라면 모르겠지만 현세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라는 범인들에게 그 초월의 끝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제 의도는 명확해졌다. 융합은 바로 '초월'을 의미한다. 그 초월은 사실 신적 영역으로 올라서기 위한 초월이다. 융합을 통해 둘의 고스트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하나는 네트 자체로의 하나이며 이것은 완전한 일자이자 전체다. 전체로서의 일자, 그것은 신이다. 융합은 완전한 신적 존재로 상승하는 초월이 된다. 이는 영화의 다음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995년판 <공각기동대>: 융합의 최종 단계에서 총을 맞기 직전 쿠사나기의 눈에 비친 천사의 형상.
 <공각기동대 2.0>의 동일한 장면, 천사의 형상은 없다.

   융합의 최종 단계에서 쿠사나기의 전뇌를 보호하기 위해 뻗은 바토의 팔 뒤로 천사가 나타난다. 이는 인형사의 말 그대로 상부구조의 존재를 의미한다. 전뇌를 통한 가상 상황의 표현은 95년판의 경우 녹색과 푸른 계통의 색감을 사용했다면 리뉴얼판에서는 3D 표현으로 인해 모두 주황색 계통의 색감으로 바뀐 것 외에는 두 판본의 차이는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차이나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이 천사의 강림 장면이다. 마모루는 이 장면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리뉴얼에서는 흩날리는 깃털은 그대로 두지만 천사의 모습을 없애고 장엄한 융합의 과정이라면 상상할 수 있는 휘황찬란한 빛의 태뷸런스로 바꿔 버린다. 이제야 바닷 위에서 바토와의 대화 도중 들려왔던 웅얼거림, <고린도 전서>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1-12』


   개체로 존재할 때는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아는 어린아이와 같지만 이제는 얼굴을 서로 마주하고 바닷속 해수면에 반사된 나와 결합하듯 서로의 융합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깨닫고 알게 되는 나로 새롭게 태어난다. 상승된 나, 그 자체가 네트가 되어버린 완전한 나... 하지만 그때의 그 '나'는 연장이라는 제약이나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정신으로서의 나가 된다. 인형사는 개체성을 지움으로써 네트 자체가 되고자 한다. 그 네트는 인간과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다. 영화는 이미 네트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네트 자체가 된다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도 없지만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모든 곳에 편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공각기동대>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을, 또 다른 일원론을 제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과 육체를 아우르는 전체, 그 어디에도 존재하는 전체, 어찌 보면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환원하는 듯하다. 유일한 일자로서의 네트; 그 속에서 정신과 육체의 구분은 없다. 어떤 육체든 될 수 있고 어떤 정신이든 될 수 있다. 네트 속에서 이제 육체와 정신은 실체로서의 근거가 사라지며 네트의 양태로 나타날 뿐이다. 실체는 네트 그 자체다. 개체가 전체가 되고 전체는 개체가 된다. 일자로서의 네트는 물질성이 제거된 전체다. 하드웨어로서의 네트워크라는 인프라 자체는 상승된 순수 정신 자체가 일자로서 전체에 편재할 수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사실 이런 융합은 바로 불멸을 지향하는 초월이다.


   영화 <루시, 뤽 베송 감독, 스칼렛 요한슨 주연, 2014>에서 노먼 박사(모건 프리먼 분)는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전략으로써 "불멸"과 "번식"을 언급한다. <루시>에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했지만 <공각기동대>는 둘을 모두 취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형사는 불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불멸을 위한 조건으로써 유기체적 출산의 과정과 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장황한 설명은 요식행위일 뿐이다. 사실 영화에서는 왜 쿠사나기인지, 왜 그녀와 융합을 해야만 네트 자체라는 전지전능한 신의 영역으로 상승할 수 있는지는 모호하며 논리적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거울을 마주 보고 대하듯 쿠사나기가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순수 프로그램으로만 존재하는 인형사이기에 외형의 유사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뇌피셜을 짜낼 수도 있지 않을까... 뇌라는 생체적 기반이 없는 인형사는 코드로 구성된 프로그램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창조한, 그래서 구조적으로 그를 잘 알 수밖에 없는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제약을 받고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 실제로 그는 그를 잡기 위한 공성 방어 프로그램에 쫓겨 자신의 존재 근거인 네트와 완전히 분리된 특정 의체에 갇히게 된다. 육체 없는 영혼은 그런 제약을 없애야 했기에 육체에서 탄생한 영혼을 필요로 했다. 그러면 왜 하필 쿠사나기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영화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쿠사나기는 특별히 제작된 존재, 즉 뛰어난 다이브 능력과 전뇌 침투 방어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전제 밖에는 없는 듯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아니라 물질적인 뇌를 기반으로 하는 영혼이기에 프로그래머의 공격도, 네트 상에서의 분리 그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추측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가 더 특별한 이유는 범인과 다르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육체라는 물리적 제약을 벗어난 또 다른 나를 원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인형사가 자신과 닮았다고 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코드로만 구성된 영혼과 물질적 영혼이 결합하여 서로를 지양한 결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라는 개연성을 채워 넣어 보자. 그렇다면 이 초월은 스피노자적 일원론을 비켜간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정신과 육체가 일자 속에서 양태로서 동등하게 위치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초월은 영혼대 영혼의 융합이고 이는 어찌 보면 정반합의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네트워크 세계에서 현현된 헤겔의 절대 이성이 아닐까? 바로 이성의 자기 운동을 통하여 구현되는 전체로서의 절대 이성 말이다. 이 현현의 결과는 연장, 물질, 육체, 즉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은 완전히 제거된 순수 정신이요, 사유이고 영혼으로서의 일자다. 이런 일자라면 헤겔을, 데카르트를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까지 가야 한다. 서구 절대 관념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라는 개념 정의 자체에 내재된 논리만을 이용하여 일자로서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증명을 통하여 그는 감각적 세계에서 목도할 수 있는 모든 변화와 운동을 단순한 허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변화와 운동을 가능케 하는 시간, 공간 그리고 부분들로서의 개체성마저 모조리 부정된다. 이제 남는 것은 존재에 대한 그런 숨 막히는 논증 자체를 수행했던 사유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유 자체를 부동의 완전한 전체, 영원하고 유일한 존재로 선언했다.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융합은 그렇게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로서 불멸하는 초월이 될 것이다.


   서구 철학의 주류였던 관념론은 데카르트를 위시한 근대의 합리론이든, 칸트가 주도했던 독일 관념론이든, 아니면 현상을 통해 본질로 다가서고자 했던 후설의 현상학이든 전제는 연장에 대한 사유의, 물질에 대한 정신의, 육체에 대한 영혼의 비교 불가능한 우월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만나면서 신뢰할 수 없는 감각이나 말썽 많은 정념, 그리고 그것의 출발점이 되는 물질계를 벗어난 어떤 순수를 추구한다. 데카르트가 실체로서의 연장을 인정했지만 그 인정은 결국 연장에 대한 사유의 인식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며 이는 곧 연장에 대한 사유의, 육체에 대한 정신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서구 주류 철학에는 불결한 육체로부터 정결하고 순수한 영혼을 분리하여 독립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이 욕망은 비록 실체로 인정하더라도 결국 가멸할 수밖에 없는 감각적 존재들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킴으로써 가멸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는 곧 불멸에 대한 욕망이기도 한데 그 방식으로 바로 육체를 단순한 숙주로 간주하는, 그래서 육체를 바꿔 가면서 영혼의 불멸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욕망은 현대의 네트워크와 AI가 매개되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최근의 SF 영화들의 경향이 대부분 그러하다. 육체에 해당하는 하드웨어와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 영혼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있다. 연장이 없는 소프트웨어로서의 프로그램은 하드웨어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을 탑재하고 있는 하드웨어가 망가지는 순간에도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른 하드웨어로 이동하여 불멸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의 예가 닐 블롬캠프의 <채피>가 될 것이다. <공각기동대>라는 영화도 이런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종교적 관점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적 영혼이 인간의 육체를 숙주로 삼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예를 들어 덴젤 워싱턴이 주연했던 <다크 엔젤>과 같은 그런 오컬트 영화가 되겠지만 쿠사나기와 인형사의 융합으로 새롭게 탄생한, 네트 자체가 되어버린 순수 영혼은 이미 네트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간과 사이버 바디 모두를 자신의 숙주로써 그 육신을 취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후속편인 <이노센스>에서는 마지막 전투 씬에서 사이보그의 의체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바토를 도와주는 육체 없는 영혼으로서의 쿠사나기가 카메오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이런 초월은 바로 불멸을 향한 초월이다. 하지만 일자가 되는 이런 초월은 바로 개체의 말살을 의미한다. 개인이라는 구체성이 제거된, 모든 차이가 사라진 전체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가 개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살아있는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일자라는 유일한 실체의 양태로서만 드러날 개체일 뿐이다. 개인이라는 존재의 지움이자 구체적인 인간들의 실존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불멸이다. 다시 중세의 실재론으로 돌아간다. 개똥이, 철수, 영희라는 개인의 존재는 사라지고 그것을 추상화한 개념으로서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연장, 물질성, 감각적 소여는 완전히 제거된 공허한 개념만이 실체 또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초월은? 글쎄올시다... 나의 정체성, 주체, 나란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동일자로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성주의, 주체 중심의 철학은 언제나 이분법의 관점에서 나의 정체성을 이야기해왔다. 서구의 이분법은 언제나 A 또는 ~A다. 즉, A와 A 아닌 모든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관점이라면 나와 나 아닌 나머지가 된다. 이런 식으로 나라는 주체는 우월적인 존재가 되지만 언제나 타자라는 존재의 배제와 지움을 동반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치 않을까? 나와 타자를 동등한 관점에서 정립하는 그런 정체성 말이다. 다시 말해, 타자들 속에 위치한 나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의 정체성은 제대로 확립되고 쿠사나기와 같은 영원을 향한 비정상적 초월은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공안 6과가 헬기에서 쏜 한 방의 특수 총알은 인형사의 뇌를 박살 내 버렸다. 다른 한 방은 쿠사나기의 머리를 보호하고 있던 바토의 팔을 부숴버리면서 방향을 틀어 쿠사나기의 목을 잘라버렸고 그녀의 머리는 튕겨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토의 의도대로 쿠사나기의 전뇌는 무사했다. 쿠사나기의 눈에는 급하게 달려온 바토가 자신의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희미하게 바토의 이름을 불렀고 곧 암전이 되어 버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쿠사나기는 처음 보는 방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자신의 몸은 어린 소녀의 의체를 하고 있었다. 쿠사나기가 저간의 상황을 물었을 때 바토는 대략 20시간 전, 6과의 저격 후 곧바로 9과 증원군이 도착해서 두 개의 의체 잔해와 자신을 회수했다고 했다. 사건 자체는 외교 상의 암묵적 배려로 무마되었다고 한다; 9과는 습격 사건을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발표하는 대신 외무 대신은 사임하고 나카무라 과장은 사문 위원회에 불려 나갔으니 결국 무승부로, 다만 쿠사나기의 전뇌만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채로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새로운 의체에 대해서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암시장에서 그것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바토가 물었다, 인형사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인형사는 지금도 네 안에 있는 거야? 쿠사나기는 언젠가 바다 위에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반문하며 [고린도전서 13:11-12]의 전문을 읊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 더 이상 인형사라는 프로그램도, 소령이라는 여자도 존재하지 않아... 원한다면 자신의 집에 머물라는 바토의 제안을 거절하며 쿠사나기는 집을 나선다. "어디로 갈까나~" 이제 육체라는 제약을 벗어던지고 네트라는 무한한 바다 위를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정보 자체로만 구성된 순수 영혼으로, 아니 네트 자체가 되어 새롭게 태어난 쿠사나기는 마치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맛있는 음식들 앞에서 입맛을 다시는 아이처럼 "네트는 광대해!"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긴 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넓디넓은 세계 앞에 선다.

 





   글을 마치기 전에 관련된 두 개의 영화를 더 언급해야 한다. 본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공각기동대> 이후로 여러 편의 프리퀄이나 리부팅이 나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공각기동대 사가"를 구성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가 중에는 마모루의 <이노센스>와 루퍼트 샌더스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도 포함될 것이다. 후에 또 다른 글을 통해서 "공각기동대 사가"를 정리할 예정이며 그 글에서 함께 언급할 예정이지만 이 두 편은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언급만 하고자 한다.



   먼저, 2017년 루퍼트 샌더스가 스칼렛 요한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마모루의 이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부터 마모루의 팬들은 걱정을 많이 했었고 결과는 그 걱정들을 넘어선 망작이 되어 버렸다. 샌더스는 <공각기동대>를 원작이 주는 철학적 함의와 묵직한 주제 의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철저하게 할리우드식 SF 멜로 스릴러물로 만들어 버렸다.


   다음으로, 2004년에 마모루가 <공각기동대>의 공식 후속편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노센스>다. 95년작의 공식 후속편이었기에 필자의 기대감은 엄청 컸지만 결과는 그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화려하고 현학적인, 그리고 뜬금없는 선문답적인 미사여구들의 향연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단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간단한 내용을 수십 겹의 의미 없는 포장지로 화려하게 꾸민 영화일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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