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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생동물의 친구 Nov 25. 2019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 녀석의 정체는?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이 모진 밤을 견디고 있을 너구리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가 있다면 누가 믿을까요? 메두사의 눈을 마주하거나, 마법사가 나타나 살아 있는 존재에게 돌로 변하는 마법을 부렸다는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니 당연히 믿기 어렵겠죠. 하지만 직접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돌덩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마치 돌덩이를 닮은 것이고, 이 무언가는 분명 살아 있기에 움직입니다. 녀석의 정체는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입니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의 모습은 마치 돌덩이 같기도, 곰보빵 같기도 하다. 어쨌든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야외에서 갑자기 녀석과 마주한다면 흠칫 놀랄만한 모습이다.
정상적인 상태의 너구리의 모습,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와 비교해보면 과연 같은 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정상적인 상태의 너구리의 모습,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와 비교해보면 과연 같은 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개선충증(Scabies, Sarcoptic mange infection)은 외부 기생충인 개선충이 원인체입니다. 대다수의 육식을 하는 포유류가 이 기생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지만, 국내 야생동물 중에는 단연 너구리가 감염에 취약합니다. 어쨌든 개선충은 너구리의 피부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삽니다. 이 과정에서 귀와 겨드랑이, 복부, 다리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의 털이 빠지고, 심한 가려움증, 표피박리, 만성피부염 등을 유발합니다. 갈라진 피부에 상처가 발생하면서 2차 세균 감염에도 취약해지죠. 심한 가려움증으로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고 먹이를 취하여 먹을 기회 역시 줄면서 체중 감소, 탈수로 이어질 수밖에요. 궁극적으로 심각한 영양 결핍과 면역력 저하, 저체온증에 따른 폐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너구리에겐 그만큼이나 치명적인 질병이죠.

이 작은 녀석이 너구리를 위협하는 '개선충'이다. 드물게 사람에게도 감염되어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생활사를 이어갈 수 없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이 작은 녀석이 너구리를 위협하는 '개선충'이다. 드물게 사람에게도 감염되어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생활사를 이어갈 수 없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너구리가 개선충에 취약한 것은 녀석이 가진 생태적 특성 탓이 큽니다. 굴과 같은 곳을 은신처로 이용하는 너구리는 이를 공유하는 배우자나 새끼와 같은 가족들에게 병을 전염시킵니다. 또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주변의 다른 개체들과 교류를 나누는 특성상 개체 간 접촉 가능성도 높습니다. 더욱이 개선충은 건강한 개체라도 얼마든지 감염이 될 수 있어 더더욱 위협적입니다.

개선충에 감염된 새끼 너구리 7남매. 너구리는 대체로 배우자 혹은 가족 단위의 무리로 생활하기에 개체 간 접촉에 따른 질병 전파 가능성이 높다.개선충에 감염된 새끼 너구리 7남매. 너구리는 대체로 배우자 혹은 가족 단위의 무리로 생활하기에 개체 간 접촉에 따른 질병 전파 가능성이 높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는 특히 겨울철에 쉬이 발견됩니다. 민가 근처까지 나타나 비틀거리거나 누군가 길고양이에게 제공한 음식물을 먹으러 와 종종 모습을 드러내죠. 그렇다고 겨울에만 개선충에 감염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먹이를 구하기도, 체온을 유지하기에도 쉽습니다. 또 주변에 자라난 식생으로 인해 은신을 하기에도 용이하죠. 혹여 감염되더라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람의 거주지 주변에 버려진 음식물 한 톨이 녀석들에겐 생명을 연장하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개선충에 감염되면 스스로 먹이를 찾고 사냥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민가에 나타나 사람에게 의존도를 높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개선충에 감염되면 스스로 먹이를 찾고 사냥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민가에 나타나 사람에게 의존도를 높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가 무조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조기에 구조된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빠진 털 때문에 떨어진 체온을 유지해 주면서 수액 처치로 탈수와 전해질을 교정합니다. 동시에 항생제와 항기생충제 약물 투여를 병행한다면 치료가 가능합니다. 다만 감염 초기에는 경계 반응과 운동성이 남아 있어 구조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의 너구리처럼 마주할 가능성도 낮고 중증으로 번지고 나서야 그나마 눈에 띄어 구조가 이루어지니 구조센터에 들어오는 너구리 대다수는 이미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구조된 너구리의 모습. 몸에 붙은 노란 것은 '파리의 알'이다. 녀석에겐 파리를 쫓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구조된 너구리의 모습. 몸에 붙은 노란 것은 '파리의 알'이다. 녀석에겐 파리를 쫓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돌덩이처럼 변해 버린 야생동물을 갑작스레 마주한다면 누구나 걱정이 앞설 겁니다. 실제로 질병에 감염된 야생동물과 그들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 무턱대고 접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꼭 직접 만지고, 구조해야 도움을 주는 건 아니겠죠. 녀석들을 살피고, 구조센터와 같은 전문 구조기관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당장 포획해야 할 위험한 상황이라면 장갑을 착용해 피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고, 포획용 뜰채나 담요를 이용해 덮어 잡은 후 이동장에 넣어 보호하면 됩니다. 추가적으로 약간의 물을 제공하거나 따뜻한 곳에 두어 체온 유지를 돕는 것 역시 필요하겠죠. 또,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는 경계 반응이나 분별력이 낮아진 상태이기에 먹이로 유도해 포획틀에 들어가게끔 하는 방법으로 쉽게 구조가 가능합니다. 다만, 보온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포획틀 내부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머무는 동안 추위를 덜 느낄 수 있도록 비닐이나 이불을 덮어 보온에 신경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획틀을 이용한 구조. 내부와 들어와 머무는 동안 저체온에 의한 폐사를 우려해 비닐을 덮어 바람을 차단시켰다.포획틀을 이용한 구조. 내부와 들어와 머무는 동안 저체온에 의한 폐사를 우려해 비닐을 덮어 바람을 차단시켰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이나 전염병이라면 기겁을 하고, 마냥 두려워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조심해야 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죠. 자연 생태계에서 질병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과거부터 특정 개체군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조절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거든요. 하지만 오늘날,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오염, 인간의 거주지 확대와 농토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그 결과 단위 밀도당 특정 개체 군이 과밀해져 전염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점이나 사람이나 사람이 키우는 가축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잦아진 점은 분명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치료가 끝나 회복 중인 너구리의 모습. 털이 다 자라 스스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치료가 끝나 회복 중인 너구리의 모습. 털이 다 자라 스스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무리 질병이 생태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질병에 걸린 동물을 발견했을 때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의 기회를,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줄여주거나 다른 개체에게 전파될 가능성을 줄여 주는 것이 좋겠죠. 특히나 그 질병의 확산이 우리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책임감이 따릅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잔인하리만큼 길고 추운이 모진 밤을 견뎌내고 있는 녀석들에겐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돌덩이로 변한 너구리를 구해주는 신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쩌면 여러분일 수 있다.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길 당부드린다.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돌덩이로 변한 너구리를 구해주는 신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쩌면 여러분일 수 있다.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길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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