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이 모진 밤을 견디고 있을 너구리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가 있다면 누가 믿을까요? 메두사의 눈을 마주하거나, 마법사가 나타나 살아 있는 존재에게 돌로 변하는 마법을 부렸다는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니 당연히 믿기 어렵겠죠. 하지만 직접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돌덩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마치 돌덩이를 닮은 것이고, 이 무언가는 분명 살아 있기에 움직입니다. 녀석의 정체는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입니다.
개선충증(Scabies, Sarcoptic mange infection)은 외부 기생충인 개선충이 원인체입니다. 대다수의 육식을 하는 포유류가 이 기생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지만, 국내 야생동물 중에는 단연 너구리가 감염에 취약합니다. 어쨌든 개선충은 너구리의 피부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삽니다. 이 과정에서 귀와 겨드랑이, 복부, 다리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의 털이 빠지고, 심한 가려움증, 표피박리, 만성피부염 등을 유발합니다. 갈라진 피부에 상처가 발생하면서 2차 세균 감염에도 취약해지죠. 심한 가려움증으로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고 먹이를 취하여 먹을 기회 역시 줄면서 체중 감소, 탈수로 이어질 수밖에요. 궁극적으로 심각한 영양 결핍과 면역력 저하, 저체온증에 따른 폐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너구리에겐 그만큼이나 치명적인 질병이죠.
너구리가 개선충에 취약한 것은 녀석이 가진 생태적 특성 탓이 큽니다. 굴과 같은 곳을 은신처로 이용하는 너구리는 이를 공유하는 배우자나 새끼와 같은 가족들에게 병을 전염시킵니다. 또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주변의 다른 개체들과 교류를 나누는 특성상 개체 간 접촉 가능성도 높습니다. 더욱이 개선충은 건강한 개체라도 얼마든지 감염이 될 수 있어 더더욱 위협적입니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는 특히 겨울철에 쉬이 발견됩니다. 민가 근처까지 나타나 비틀거리거나 누군가 길고양이에게 제공한 음식물을 먹으러 와 종종 모습을 드러내죠. 그렇다고 겨울에만 개선충에 감염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먹이를 구하기도, 체온을 유지하기에도 쉽습니다. 또 주변에 자라난 식생으로 인해 은신을 하기에도 용이하죠. 혹여 감염되더라도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람의 거주지 주변에 버려진 음식물 한 톨이 녀석들에겐 생명을 연장하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물론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가 무조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조기에 구조된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빠진 털 때문에 떨어진 체온을 유지해 주면서 수액 처치로 탈수와 전해질을 교정합니다. 동시에 항생제와 항기생충제 약물 투여를 병행한다면 치료가 가능합니다. 다만 감염 초기에는 경계 반응과 운동성이 남아 있어 구조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의 너구리처럼 마주할 가능성도 낮고 중증으로 번지고 나서야 그나마 눈에 띄어 구조가 이루어지니 구조센터에 들어오는 너구리 대다수는 이미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이나 전염병이라면 기겁을 하고, 마냥 두려워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조심해야 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죠. 자연 생태계에서 질병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과거부터 특정 개체군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조절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거든요. 하지만 오늘날,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오염, 인간의 거주지 확대와 농토 개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그 결과 단위 밀도당 특정 개체 군이 과밀해져 전염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점이나 사람이나 사람이 키우는 가축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잦아진 점은 분명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무리 질병이 생태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질병에 걸린 동물을 발견했을 때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의 기회를,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줄여주거나 다른 개체에게 전파될 가능성을 줄여 주는 것이 좋겠죠. 특히나 그 질병의 확산이 우리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책임감이 따릅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잔인하리만큼 길고 추운, 이 모진 밤을 견뎌내고 있는 녀석들에겐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