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이었던 첫째가, 며칠을 베개를 적시며 울었던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어깨를 돌리고 누워, 흑흑 눈물을 삼키는 소리에 내 심장이 같이 흐를 뻔했던 날. 그즈음 우리 가족에게 큰일이 있었고 어른들이 힘듦을 버티는 동안 아이를 살피지 못했다. 어렵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사과했고 갓난아기처럼 안아 펑펑 울게 했다. 함께 울었다. 그 시기를 통과하며 얻은 건, 감정 표현에 능하지 않은 첫째에겐 한 번씩 터트릴 품을 내줘야겠다는 다짐. 그래서 더욱, <리디아의 정원>을 읽으며 안타까웠나 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잠시 외삼촌 댁으로 가는 길.
홀로 기차에 앉아 창밖을 보며 리디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도시의 기차역에 덩그러니 내렸을 때는?
흑백 풍경이 아이의 마음일까.. 자꾸 아이 눈을 들여다본다. 두렵지만, 빛처럼 따스한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마음을 다잡는 거니? 예전에 읽을 때 보이지 않던 포인트에 마음이 맺히니 계속 작가님께 말을 걸며 읽게 된다. 외삼촌 무뚝뚝한 반응에, 빈방에서, 휑한 옥상을 발견했을 때라도 한 번은 울게 해 주시지.
우는 게 어때서?
빨강머리 앤 처럼 매사에 신이 나, 기차 플랫폼에 혼자 있어도 마냥 설레는 아이는 드물다. 동화나 그림책 속 아이들은 성장을 전제로 한 캐릭터겠지만 이렇게 흔한 '슈퍼키드' 라니.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는 다부진 아이라 해도, 한 번쯤 터트려 훌훌 털고 성장의 테마로 전환하는 선택도 괜찮을 텐데.. 안타까운 건 엄마 시점이겠지.
데이비드 스몰, 사라 스튜어트 작가 부부의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성장기가 있다.
이번엔 가족과 함께였지만, 멕시코 소녀의 미국 이민 적응 과정을 그린 <이사벨의 방>.
리디아처럼 편지로 털어놓을 대상이 있고, 무언가를 가꾸면서 나만의 '공간'에 열정을 쏟는 것. 결국은 그 공간을 통해 관계가 연결되어 치유와 극복의 계단을 밟는다는 점이 닮은 그림책이다.
작가님의 비하인드를 아는 팬들은 '극복'의 의미가 작가님에게 무엇인지를 알겠지만, 보이지 않는 리디아의 눈물에 서현 작가님 <눈물바다>의 장면이 떠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아이.
자꾸만.. 눈물이 나는데,
출렁.
내 눈물이야 이거?
바다다!
각자 두려운 것, 슬픈 것을 갖고 떠다니는 눈물바다에서 더 펑펑 울고, 신나게 떠밀리면 닿는 곳은 '시원함!'.
후아!
'얘들아,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담고 있지 마.'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눈물바다를 가로지르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우아아 앙- 울어버리고 콸콸 쏟아 버려! 시원하게 울고, 콧물 닦으며 가뿐하게 일어서면 돼!
「인사이드 아웃」 속 말처럼, 기쁨이 오기 전에 슬픔이 있어서 더 또렷하게 기쁠 수 있는 거야.
힘든 순간을 헤쳐나가는 의젓한 용기는 좋지만, 울고 싶을 때 우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면 안 될까?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가~" 울면 착하지 않은 아이가 되니 선물 안 준다는 협박의 말은 이제 저쪽으로 밀어 두자, 엄마부터!
아이들은 짧은 글과 그림 속 인물들에서 '나'를 그린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타인의 입장에 나를 대입해 읽는 것이, 곧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직 어린 '나'를 곧게 세우는 성장 과정이 아닐까. 이 자연스럽고 놀라운 일에 어른들의 시선이 조금 더 부드러워질 때가 된 것도 같은데.. 주먹 불끈 쥐고 참아내는 성장 이전에, 기꺼이 드러내 울 수 있는 마음을 짚어주는 그림책도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스스로 털고 일어서는 순간 또한 아이의 성장점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