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세븐틴-손오공
땅을 보고 계속 올랐지 정상까지
많은 시련은 보란 듯이 I Always Win
강한 마음이 중요하지
미래는 도망가지 않아 내가 놓기 전까지
“여러분, 춤추는 거 재미있어요?”
세상 재미없는 목소리였다. 하하호호 웃으며 지난번 배운 안무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직감적으로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촬영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피드백을 주고, 멋져 보일 포인트를 짚어주기도 했는데, 그날은 거울에 힘없이 기대앉아 우리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결석이 많아 학생이 5명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가장 최근에 들어온 나만 빼고 다른 학생들에게 “몇 년 다니셨죠?”하고 물었다. 3년을 다닌 사람 둘, 1년 다닌 사람 하나, 6개월 다닌 사람 하나. “한 가지 취미를 1년 이상 한다는 거 대단한 거 같아요. 일도 아니고. 그 시간을 다 저랑 하셨네요.”하며 쓸쓸히 웃더니, “저 사실 이달까지 하고 그만둬요.”라고 말했다.
아..... 드디어 내게 맞는 선생님을 만나서 여기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했는데. 통영 파괴왕인 내가 가는 곳마다 문을 닫고 사람이 떠나는구나 하며 애석한 마음도 잠시, 선생님이 이곳에서 8년을 일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20대를 이곳에서 보냈고 이제는 좀 지쳤다고 했다.
난 22살에 일을 시작해서 서른이 될 때까지 한 곳에서 2년 이상을 일해 본 적이 없다. 1~2년 하다 보면 질리거나 지쳤고, 그럼 그만두고 여행을 가거나, 공부를 좀 더 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내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됐지만, 지금도 매년 달력에 내년은 안식년을 갖자, 아니야, 내후년이 좋겠다, 이렇게 ‘꿈’으로 끝날 일을 꿈꾸고 있다.
수업이 끝난 후 오래 다닌 사람들은 “선생님이 딴 곳으로 가면 따라가겠는데 아예 일을 그만두실 모양”이라며 아쉬워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흘린 땀만큼 정도 깊을 것이다. 얘길 들어보니 작년에 슬럼프가 와서 한두 달 쉬면서 미국 여행도 다녀오고 리프레시했지만, 결국 한계가 온 듯하다고.
좋아서 하는 일이, 일이 되면 싫어진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겐 독서가 그렇다. 독서 슬럼프를 겪은 지 한참이 되었다. 요즘 쇼츠와 릴스의 노예가 된 뒤론 책에 더욱 집중이 안 된다. 수업 관련 책은 읽지만, 개인적 관심사로 읽는 책의 수가 엄청 줄었다. 흥미가 당겨 사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이 책장에 쌓여가니 그만큼 죄‘책’감도 늘어간다.
독서는 오랜 세월 동안 취미였다. 글을 읽게 된 뒤로 약 25년간 오로지 재미로 책을 읽었다. 32살 독서논술 학원을 열면서 독서는 취미에서 직업으로 훌쩍 경계를 넘어왔다. 한 10년은 치열하게 읽었다. 수업도 해야 하고, 독서모임도 해야 하고, 그걸 해내려면 또 내 관심사를 넓혀야 했기에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다 어떻게 읽어냈지 싶을 정도다. 물론 중간중간 책태기가 와서 읽기를 등한시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땐 주로 열심히 썼다. 어쨌든 활자의 세계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이건 ‘나의 일’이니까.
2~3년 전부터 읽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읽는 책마다 그 말이 그 말 같아 새로움이 없었다. 예전에는 읽는 책마다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는 듯한 상쾌한 충격이 있었는데, 그 맛이 더는 안 느껴졌다. 두 번째는 노안이다. 한 자리에서 4~5시간 책을 읽어도 피곤하단 생각이 없었는데, 마흔이 넘으면서 눈이 아파오면 머리, 어깨까지 지끈거려서 오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스마트폰.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면서 영화에 집중을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더니 기어이 이젠 책에도 집중이 잘 안 된다.
어쩌면 이 모든 건 핑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새로움을 줄 책을 찾아 읽으면 되고, 안경 렌즈 바꾸면 되고, 스마트폰 꺼두고 책 읽으면 되니까. 사실은 그냥 지겨워진 것이다. 남의 일을 해줄 때는 그냥 관두고 떠나면 되는데, 애면글면 가꿔온 ‘나의 일’을 잠시라도 그만두면 다 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 10년을 망부석처럼 박혀 있었다. 뭐든 금세 질려서 연애도 오래 못했던 내가 이 정도면 정말 견딜 만큼 견딘 것이다. 코로나19로 한 2~3개월 쉬엄쉬엄 일했을 때 리프레시가 되기도 했으나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으니 온전히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다.
일이 계속 잘 된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 감히 슬럼프에 빠져도 될까 하는 걱정이 든다. 다행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은 질리지 않아 즐겁게 하고 있지만, 수업이 끝나면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축 쳐졌다. 책도 읽기 싫고, 글도 쓰기 싫고, 밥도 먹기 싫고, 사람도 만나기 싫고. 그러다 수업 시간이 되면 또 신나게 일을 하고, 끝나면 또 굴을 파고 들어가고.
댄스 학원 선생님이 딱 내 모습 같았다. 수업 시간에는 정말 열정적이고 언제나 업텐 모드인데, 끝나고 나갈 때는 세상 다 잃은 표정이어서(우리가 마지막 수업이라서 그랬나?) 어쩌면 억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도, 쉬는 날 없이, 새로울 것 없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는 그 일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슬럼프가 심각하게 오기 전 다행히 운동을 시작했다. 만화 미생의 유명한 대사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를 귓등으로 넘기던 30대를 지나 40대가 되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되도록 오래 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기에 헬스장으로 (남편에게 끌려)갔다. 혼자 의지로는 안 될 것 같아 거금을 주고 3개월간 PT를 받았고, 인바디 지수는 전후 모두 형편없었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몸이 가벼워지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피어올랐다. 그 힘으로 스노클링, 서핑, 패들보드, 복싱, 놀이기구 타기 등 안 해봤던 일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그중 가장 잘한 도전이 ‘케이팝 댄스 배우기’다.
이제 1년 정도 배운 케이팝 댄스는 태어나서 가장 오래 한 취미가 돼버렸다. “여러분, 춤추는 거 재미있어요?”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우울하지만 않았다면, 슬램덩크의 강백호처럼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하고 대답할 뻔했다. 댄스학원에 가는 날은 하루 종일 심장이 두근댄다. 잘 못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 텐션이 높아지는 걸 보면 설레는 게 맞는 것 같다.
학원에 들어갈 땐 소름이 확 돋을 만큼 낮은 에어컨 온도에 벌벌 떨지만, 수업이 끝나고 온몸이 흠뻑 젖어 학원 밖으로 나갈 땐 몸에서 김이 난다. 그 순간이 왠지 모르게 짜릿하다. 선생님의 몸과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잔걱정들(아픈 고양이들, 미뤄둔 일, 말 안 듣는 학생들, 수일 째 모아둔 쓰레기, 내일도 가야 하는 헬스장 등등)이 어느새 사라져 있다.
학원은 일주일에 두 번 가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30분씩이라도 춤 연습을 하려면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불필요한 일은 과감히 접고, 해야 할 일은 빠르게 해치우고, 불안 때문에 억지로라도 해놓으려던 것들은 미래의 어떤 날로 대범하게 미뤄 버린다. 고양이들에 대한 집착이나 죄책감도 내려놓는다. 살 만큼 살다 가겄지. 나도 좀 살아야 것다! 하는 마음으로 졸고 있는 고양이 옆에서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고 발을 구른다. 그럼 고양이들은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부산한지 딴 방으로 가버린다.
일 말고도 몰입할 것이 생기니 일 슬럼프가 뇌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방이 서서히 좁아진다. 여전히 책 읽기가 싫고, 글쓰기도 겨우겨우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그저 눕고 싶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 새로 산 예쁜 옷을 입고, 안무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카메라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입술에 머금은 채 노래를 갖고 놀며 유려한 춤을 선보일 나’를 상상하며 몸을 일으킨다. 도래하지 않을 미래지만, 상상의 반의 반의 반의 반 정도가 내 한계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몸을 흔들어 댈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