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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Mar 31. 2021

너 먼치킨 고양이였어?

처세술의 달인 김노랭 선생

노랭이는 눈치 챘다. 여기 날 좋아하는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마당에서나 인기묘였지 이곳에서는 밉상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노랭이는 영특하게도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물론 자기도 새끼를 두 번이나 낳은 장년에 접어든 고양이였지만, 60대가 경로당에 가면 막내라서 잔심부름을 해야 하는 것처럼 11살, 10살 두 오빠와 9살이지만 최고위층인 언니 앞에서는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며칠 만에 알아챘다.


노랭이는 처음 마당에 입주할 때 앵구가족에게 보인 공손함과 내게 썼던 애교 작전을 비롯한 각종 처세술을 이곳에서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배경에 스며들기 작전. 노랭이는 일단 눈에 띄지 않기로 했다. 눈에 띄었다간 괜히 한 소리 더 듣고, 한 대 더 맞기 때문에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 노력했다. 꼭 자기 몸 색깔과 비슷한 장식장 서랍 안이나 박스 안에서 잤다. 노랭이가 숨어 지낼 곳이 필요할 것 같아 책 박스를 여기저기 두었는데, 그곳이 편했던 것 같다. 노랭이가 박스를 차지하니 다른 고양이들은 박스를 쓰려고 갔다가 노랭이를 보고는 그만 언짢아져서 “에잉”하고 돌아섰는데, 독서교실에 오는 어린이들은 그 사정도 모르면서 “선생님, 왜 노랭이만 박스 안에서 자요? 지금 노랭이 차별하시는 거예요? 차별은 나쁘다면서요!”라고 따지기도 했다. “얘들아, 고양이는 원래 박스를 좋아하는데 노랭이 때문에 다른 고양이들이 박스를 못 쓰고 있는 거야.”라고 설명해줘도 듣지도 않고, “다른 고양이들은 다 폭신한 방석이랑 이불에서 자는데 노랭이만 차가운 박스에서 재우고. 길고양이라고 그러는 거죠? 선생님 나빠요!”했다. (얘네들 다 스트릿 출신인데....)


동정심을 산 노랭이는 어린이들만 오면 “애애액”하고 발 벗고 뛰어나가서 다리 사이에 쏙 얼굴을 파묻거나, 아주 애처로운 눈빛을 발사하며 애교를 떤다. 마치 ‘제발 날 좀 여기서 데리고 나가 줘!’하는 것 같다. 그럼 어린이들은 “너무 귀엽다”를 연신 외치며 노랭이를 쓰다듬어 주는데 노랭이는 그게 아주 좋은 모양이다. 새로운 영업 사원 고양이 탄생이다.




노랭이의 두 번째 작전은 항상 낮은 곳에 임하는 것이다. 거의 다리가 안 보일만큼 바닥에 붙어서 걸어 다니다 보니, 먼치킨 고양이로 오해를 받을 지경이다. 한 번은 노랭이를 조용히 관찰하던 한 아이가 “선생님, 노랭이 다리가 왜 저렇게 짧아요? 다른 고양이랑 종이 다른가요?”하고 물었다. “응, 아니야. 우란이 무서워서 포복 자세로 다니는 거야.”하고 말해주며 예전 사진을 보여줬다. 그 사진에서 노랭이는 모델만큼 길고 쭉 뻗은 다리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우란이가 일어나 있는 시간이면 한 마리 애벌레가 되어 바닥을 기어 다닌다.



노랭이는 우란이를 아주 무서워한다. 우란이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노랭이를 죽일 듯이 쫓아가서 꿀밤을 먹이고 하악질을 하기 때문이다. 우란이는 보통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숨숨집에 들어 가 자는데, 노랭이는 그때 아주 행복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책방 한 가운데 쭉 뻗고 누워 자기도 한다. 노랭이가 가장 긴장하는 때는 우란이가 일어나 화장실 갔다가 밥 먹고 난 직후인데, 우란이가 일어나는 기척만 들려도 후다다닥 뛰어서 장식장 아래 서랍 속으로 쏙 들어간다. 우란이가 유유히 걸어 나와 자기 앞에서 쭈욱 기지개를 켜면 최대한 안쪽으로 몸을 붙이고 없는 척한다. 공기마저 멈춘 듯 적막이 흐르고 내 침 넘기는 소리만 꼴깍 들린다. 다행히 들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지만, 우란이가 고개를 돌리다 노랭이랑 눈이 마주치면 바로 싸움이 난다. 우란이는 당장 꼬리털을 부풀리고 “아아악악”하고 솜방맹이질을 시전하고, 노랭이는 바로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헛손질을 하며 방어 자세를 하다. 물론 둘의 손은 서로에게 닿지 않지만, 굉장한 기를 주고받으며 주위를 긴장되게 만든다. 그럼 어디선가 살룻과 룬이 달려온다. 룬은 우란이 편에 서서 “아오오”하면서 노랭이를 약 오르게 한다. 살룻은 왜 뛰어왔는지 알 수 없게 근처에 식빵 자세로 앉아 관람을 하는데 아마 팝콘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눈빛이다.


“엄마가 싸우지 말랬지!”하거나 “쓰읍!” 하면 싸움은 끝난다. 우란이가 분이 안 풀렸다는 듯 “에에엑깩깩”하면서 노랭이 주변을 배회하다 볼 일 보러 사라지면 그때서야 노랭이는 혀를 낼름낼름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편한 자세로 고쳐 안거나, 부리나케 나에게 쫓아와서 안긴다. 그럼 내가 토닥거리며 “우리 노랭이 언니한테 혼났쪄요~.”하고 달래준다.




노랭이 편을 들어 우란이를 혼내면 어떻게 될까? 알 수 없지만 상황은 악화될 것 같다. 우란이는 질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단 한 번도 혼난다고 꺾인 적이 없는 아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자고 있는 살룻에게 다가가 갑자기 하악질을 하며 꿀밤을 먹여서 혼낸 적이 있다. 그럼 우란이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편인데, 보통 대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왜 가만있는 오빠야 때리노!”

“(눈치 보며)아오오”

“뭘 잘했다고 말대답 하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애애앵”

“이게 그래도 반성 안 하제!”

“(더 크게)아아오오옥”

“이 가스나 끝까지 잘했다고 하나!”

“(이를 드러내며)하하아악!”

그럼 그냥 무서워서 내가 물러난다.


집안의 계급 구조가 ‘우란-룬-살룻-나-노랭’이기 때문에 노랭이를 몰래 달래주는 수밖에 없다. 또 노랭이가 오고 나서 룬, 우란, 살룻 모두 살이 빠졌는데, 노랭이만 무려 1.2kg가 늘었기 때문에 노랭이 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


노랭이의 마지막 전략은 살룻 매수 작전이다. 노랭이는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깨닫고 만다. 살룻 오빠야가 가장 만만한 고양이라는 것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하면서 늘 명상에 빠져있는 살룻은 노랭이가 밖에 살든 안에 살든 통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가만 고민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노랭이에게도 딱히 싫은 티를 내진 않았는데, 노랭이가 곁에 오면 솜방맹이질을 하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자 노랭이가 살룻에게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룻이 밥 먹을 때 슬쩍 옆에 가서 같이 먹었다. 역시 같이 밥을 먹어야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나 보다. 살룻은 뚱냥이답게 밥 먹을 때는 밥에만 집중하는 서타일이라서 노랭이가 옆에 오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다음에는 살룻이 잘 때 슬며시 근처에 가서 자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점 간격을 좁혀 가면서 나중에는 살룻 궁둥이에 자기 궁둥이를 딱 붙이고 자는 게 아닌가. 살룻은 노랭이가 다가오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꿀밤을 때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내버려두었다. 분명히 잠들 때는 혼자였는데 일어나니 노랭이가 옆에 있는 걸 보고 움찔하다가도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그냥 다시 잠들 때가 많았다. 그렇게 봄볕에 얼굴 타는 줄 모르게 노랭이가 살룻의 삶에 스며들었다.



현재 노랭이와 살룻은 꽤 친해져서 늘 함께 붙어 자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살룻이 자고 있으면 노랭이가 살룻을 때리고 자리를 빼앗는다. 그럼 살룻은 방석 밖으로 밀려나지만, 그래도 노랭이 곁을 떠나지는 않는다. 가끔 노랭이가 너무 치대면 귀찮고 무서운지 딴 곳으로 갈 때도 있지만. 노랭이의 타겟팅은 정확했고 성공적이었다. 나는 내심 노랭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랏샤가 떠나고 살룻이 어떤 마음일지 걱정됐다. 오래 함께 붙어 살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허전하지 않을지, 혼자 외롭지 않을지 마음이 쓰였다. 다행히 살룻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지만, 그래도 조금은 쓸쓸해보였는데, 노랭이 덕분에 더는 쓸쓸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노랭이는 식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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