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문법] '쓰다'의 피동 표현
피동 표현은 간접 인용, 사동과 더불어 한국어 3급을 대표하는 문법이다. 보통은 ‘경찰이 도둑을 잡았다, 경찰한테 도둑이 잡혔다’ 같은 예문으로 설명한다. ‘잡다’의 당하는 말이 ‘잡히다’이다. 대표적인 상황은 '귀신의 집'이다. 귀신의 집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듣다), 갑자기 문이 닫히기도(닫다) 하고, 열리기도(열다) 한다. 불이 꺼지기도(끄다) 하고 확 켜지기도(켜다) 한다. 모두가 피동이다. 피동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셋이다. 첫 번째는 ‘-이-, -히-, -리-, -기-’이다. ‘보다-보이다, 잡다-잡히다, 듣다-들리다, 끊다-끊기다’가 대표적인 예이다. 두 번째는 ‘-아/어지다’이다. ‘만들어지다’는 ‘만들다’의 당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되다’이다. 예를 들어 ‘발명하다-발명되다, 건설하다-건설되다’ 등이다.
‘피동’을 가르칠 때면 질문이 쏟아진다. ‘보히다, 보리다, 보기다’가 아니라 왜 ‘보이다’냐고 묻는다. 어느 동사는 ‘-이’를 쓰고, 어느 동사는 ‘-히-, -리-, -기-’를 쓰는지 규칙을 알려 달라고 한다.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동사 어간의 끝소리와 관련이 있겠다 싶지만 추측일 뿐이다. ‘-아/어지다’도 마찬가지다. ‘만들이다, 만들히다, 만들리다, 만들기다’가 아니라 왜 ‘만들어지다’냐고 묻는다. 역시 대답할 말이 없다. 학생들을 어르고 달래며 이끌다 보면 ‘쓰다’에 이른다. ‘쓰다’의 당하는 말은 ‘쓰이다’인가, ‘써지다’인가, ‘쓰여지다’인가?
이렇게 '쓰이다'와 '써지다'를 고민하는 데에는 배경이 있다. 몇몇 동사는 피동접사(이, 히, 리, 기)와 '-아/어지다'를 모두 쓴다. 끊다, 나누다, 가르다, 믿다 등이다. 특히 끊다의 당하는 말 끊기다, 끊어지다는 자주 쓴다. 인터넷, 와이파이, 휴대전화가 자주 끊기는 탓이다. 아래 예문에서는 피동 접사나 '-아/어지다'를 모두 사용할 수 있으며 이때 의미 차이가 없다. 물론 뒷맛이 약간 남기는 한다.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내 잘못이 아니고' 등으로 둘이 미묘하게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전화가 끊겼다/끊어졌다.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나누어졌다.
남과 북으로 갈렸다/갈라졌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믿기지 않아/믿어지지 않아.
학습자들이 피동을 배우는 과정은 대개 이렇다. 피동 접사를 먼저 배우고, '-아/어지다'를 나중에 배운다. 그러면서 동사에 따라 둘 중 하나는 선택하여 취한다고 가르친다. 예외적으로 위 동사들은 두 방법을 모두 쓸 수 있는데 이때에도 의미는 같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예외까지 가르쳤는데, 이제 '쓰이다'와 '써지다'를 구분해야 한다. 학생들의 원망이 귀에 들린다.
‘쓰다’는 의미가 여럿이지만 자주 쓰는 뜻은 크게 넷이다. 우리는 메일을 쓰고(write), 모자를 쓰고(put on), 컴퓨터를 쓴다(use). 그리고 좋은 약은 입에 쓰다(bitter). 앞의 셋은 동사이고, 마지막은 형용사이다. 맛이 ‘쓴’ 것이야 형용사이기에 당할 일이 없으니 피동도 없다. 맛이 ‘써지다’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문법이다. 형용사에 붙는 ‘-아/어지다’는 변화의 뜻이다. 길어지고, 많아지고, 예뻐지는 경우의 ‘-아/어지다’이다. 문제는 동사 ‘쓰다’이다.
(가) 글이 안 쓰여/써져.
(나) 모자가 작아서 안 쓰여/써져.
(다) 시험을 볼 때도 컴퓨터가 쓰인다/써진다.
(라)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작문 숙제가 나왔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안 나간다. 하얀 백지를, 컴퓨터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만 앉았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글이 안 ‘쓰여’라고 적나, 아니면 글이 안 ‘써져’라고 적나?
‘쓰이다’와 ‘써지다’ 모두 맞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된다.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쓰이다’에는 ‘피동사’라고 명시했지만 ‘써지다’에는 ‘피동’이라는 표현이 없다. ‘동사’라고만 했다. 그렇다면 ‘써지다’는 ‘쓰다’에서 나왔으나 아예 독립된 동사로 인정을 받은 것인가? 알 수 없다. 첫 번째 뜻은 아예 다른 상황이다. 볼펜펜 따위가 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가리킨다. '이 볼펜 정말 잘 써져'라고 할때 '써지다'이다. 두 번째가 지금 우리의 관심사이다. 어쨌거나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인 (가)에서는 ‘쓰이다’와 ‘써지다’가 모두 맞다.
(나)를 보자. 겨울이 되어 날이 차다. 모자가 필요하다. 모자를 사러 갔다. 모자가 작은 것인지 내 머리가 큰 것이지 어쨌거나 모자가 작다. 뭐라고 말할까? 모자가 쓰이지 않는다, 써지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 ‘쓰이다’ 항목에 ‘모자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예문이 나온다. 그리고 앞서 확인한 ‘써지다’ 항목에는 모자와 관련된 언급이 없다. (나)에서는 ‘쓰이다’가 맞고, ‘써지다’는 틀렸나? 내 생각에도 그렇고, 주변에 물어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써지다’가 낫다. ‘모자가 안 써져’가 자연스럽다. 직관으로야 ‘써지다’에 기울지만 어쩔 것인가? 사전에서 ‘쓰이다’라고 하는데. ‘쓰이다’가 맞고 ‘써지다’는 확인할 수 없다.
토플(TOEFL)은 PBT(Paper Based Test)에서 CBT(Computer Based Test)로, 다시 IBT(Internet Based Test)로 바뀌었다. CBT와 IBT는 컴퓨터를 사용한다. 시험에 컴퓨터가 ‘쓰이는’ 것인가, ‘써지는’ 것인가? 역시 표준국어대사전 ‘쓰이다’ 항목에 ‘농사에 기계가 많이 쓰인다’는 예문이 보인다. 그리고 앞서 확인한 ‘써지다’ 항목에서는 ‘이용하다’와 관련된 언급이 없다. (다)에서도 ‘쓰이다’가 맞고 ‘써지다’는 틀렸나? 이 경우에는 직관으로도 ‘쓰이다’가 맞다. ‘컴퓨터가 써지다’는 어색하다. 언어 습관으로 보나 사전으로 보나 ‘쓰이다’만 맞다.
(라)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에서 따왔다. 1940년대에 이미 '이중 피동'이 있었나 보다. 피동을 만들 때에는 ‘-이-, -히-, -리-, -기-’를 사용하거나 ‘-아/어지다’를 쓴다. 둘 중 하나면 족하고 거듭 쓰면 안 된다. ‘쓰여지다’는 ‘-이-’와 ‘-아/어지다’의 중복이다. 문법적으로 바른 표현이 아니다.
문제는 남는다. 바르지 않음에도 우리가 자주 쓴다는 것이다. 10월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들린다. 가수는 잊혔어도 노래는 잊히지 않았다.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잊혀질 권리’가 떠올랐다. ‘잊힐’ 권리인가, ‘잊혀질’ 권리인가? ‘잊다’의 당하는 말은 ‘잊히다’이다. ‘잊히다’에 ‘-어지다’를 붙이면 과잉이다. 사전에도 ‘잊히다’만 나올 뿐 ‘잊혀지다’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잊혀진’ 계절을 듣고 ‘잊혀질’ 권리를 찾는다. ‘잊힌’ 계절, ‘잊힐’ 권리라고 하면 괜히 어색하다. 문학, 음악, 권리 가운데 그리고 일상에 이중 피동이 굳건히 살아 있다.
정리하면, 메일(write)은 쓰이거나 써진다. 모두 사전에 올랐다. 모자(put on)의 경우 사전적으로는 ‘쓰이다’가, 직관적으로는 ‘써지다’가 맞다. 컴퓨터(use)는 ‘쓰이’는 것이지 ‘써지는’ 것은 아니다. ‘쓰여지다’는 사전에 없으나 우리가 자주 쓴다. 이런 ‘쓰다’의 피동을 외국인들이 배운다.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학생도 모두 힘들다.
사족이다. 조심스레 추측을 해 보자. ‘쓰다’의 당하는 말은 애초에 ‘쓰이다’ 하나였다. 언젠가부터 ‘-아/어지다’가 사용되면서 ‘써지다’가 언중의 힘을 얻었다. 덕분에 첫 번째 뜻(메일)에서는 사전에도 올랐다. ‘써지다’가 계속 사용되면서 두 번째 뜻(모자)에서도 언중의 인정을 받았으나 아직 사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세 번째 뜻(컴퓨터)은 언중의 인정도 받지 못했다.
하나를 더한다. '씌여지다'를 묻곤 하는데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쓰다'의 피동은 '쓰이다' 또는 '써지다'이다. '쓰여지다'는 '쓰+이+어지다'의 형태로 중복이 되어 바르지 않다. '씌여지다'는 '쓰+이+이+어지다'로 이루어졌다. 세 번 겹쳤다. 말을 하다 보면 저리 발음이 될 때도 있겠다 싶지만, 쓸 때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제발 '씌여지다'만큼은 쓰지 말자.
책은 위 글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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