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는 내 장례는 누가 치러주나?’
어느 날 불쑥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40대가 하기에는 다소 이르고, 비관적이여 보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고민되는 문제는 맞다. 요즘 들어 부쩍 삶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진다. 쓸쓸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감정들이 번갈아 찾아온다.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정도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마음이 허해진다. 갱년기 우울증이 드디어 찾아온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양가 부모님 모두 타시는 차에 문제가 생겨서 이를 처리하는 과정을 도와드린 일이 있었다. 그 외에도 연세 드신 부모님들이 도움을 요청하시는 일들이 잦아졌다. 전에는 자식들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는데 지금은 도움을 요청하신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드리고 부모님이 안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지만, 약해지신 부모님 모습에 한편 쓸쓸하다. 그러면서 곧 다가올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생각이 번진다.
‘자식 없는 나는 나중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이런 생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생각은 마음속에서 더 번져간다.
최근에 장례식장에 갈 일이 있었다. 몇 호실인지를 찾으려고 안내 모니터를 보다가, 고인의 이름 밑으로 자녀들과 배우자, 자손들의 이름이 적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따라 안내모니터가 눈에 깊이 들어와 박힌다. 자녀가 없는 나는 그곳에 무엇을 적어야 할까.
신문에 일본의 한 지역에서 시행하는 장례 제도가 소개되었다. 고령화 사회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는 장례문화도 이제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이다.
일본의 한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 제도는, 독거노인의 장례를 지자체가 대행해 주는 것이다. 희망자가 약간의 금액을 지자체에 납부하면, 지자체에서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해 안부를 확인한다. 그러다 당사자가 사망하면 간소한 장례를 치러주고 주변 정리를 해준다고 한다. 이 제도에 가입한 노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장례에 종종 가게 된다. 빈소에 가면 보통 고인의 자녀들과 그 배우자, 손자들이 손님을 맞이한다. 자녀들은 검은 옷을 입고, 상주는 팔에 삼베로 된 작은 띠를 두른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고인의 삶이나 질병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질병이셨는지. 연세는 어떻게 되셨는지. 생전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작은 소회들이 상주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이것이 평범한 장례의 모습이다. 만약 고인에게 남겨진 가족이 없다면, 이런 장례 절차는 어려워진다.
우리나라의 1인 가구가 천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비혼도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 장례문화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홀로 맞이할지도 모르는 ‘고독사 위험군’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또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정리해야 할까. 먼 미래에 나도 고독사 위험군에 속할 수도 있는데,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남편은 빈 둥지 증후군을 남들보다 빨리 겪고 있는 것이라고 애써 위로해 준다. 남들은 자녀를 다 키워 독립시킨 후에 빈 둥지 증후군을 앓지만, 우리는 그 공허함을 조금 일찍 느끼는 것뿐이라는 거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은 부부 두 사람이 노화와 함께 남겨진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건강검진과 의료혜택 덕에 살아갈 시간은 더 늘어날 듯하다. 우리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 남겨져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시간만큼 긴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부터 건강을 잘 돌보는 것뿐이다. 돌봐줄 자녀가 없으므로, 스스로 건강을 잘 돌보고 챙기자고 남편과 다짐한다.
설탕도 줄이고, 올리브 오일도 먹고, 맛없지만 샐러드도 열심히 먹어본다. 장례 걱정 하다가 결국은 더 건강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장례에 대한 걱정을 삶에 대한 의지가 압도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