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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Dec 30. 2023

갱년기에 임테기 사러 갑니다.

핸드폰에 깔아 둔 앱에서 생리 예정일이 지났다는 알림이 왔다. 생리 기간을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작년부터 조금씩 불규칙해진 주기가 한 달씩 건너뛰는 일이 잦아졌다. 임신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고 생리를 안 하는 것이  별 상관은 없다. 생리 날짜가 지나가면 예전처럼 혹시나 임신은 아닐까를 기대하기보다는 ‘이러다 생리가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몰려온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내 몸의 노화를 뚜렷이 느끼고 있다. 하여튼 스트레스로 인한 생리불순일 수도 있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 것보다 더 큰 고민은 최근 몇 년 사이 시달리고 있는 질염이다. 이번에는 좀 심해져서 결국 병원에 갔다. 처음 간 병원이라 초진 기록지를 적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상태가 심해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진료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의사가 불러 세운다.


“이번 달은 생리를 안 하셨네요? 그럼 임신 가능성이 있으신 건대 이 약은 임신한 경우에는 쓰면 안 되는 약이에요.”

“아. 제가 생리 주기가 좀 불규칙해서요. 임신은 아닐 거예요.”

의사가 다시 물었다.

“이런 경우 임신인 경우가 있어요.”

의사는 약 처방해 주는 게 불안한 눈치였다.


“아니에요. 괜찮을 거예요.” 의사에게 임신이 아니라는 확신을 어필하기 위해 난임이라는 사실까지 털어놓고서야 약 처방을 받았다.      


지루한 병원 대기에 복잡한 곳을 벗어나 조용한 차 안에 앉으니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에 걸렸던 단어는 ‘임신’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나의 임신 가능성은 0을 향해 가고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완경은 아니라 완벽한 0프로라고 할 순 없다. 0.001프로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내 나이를 봤을 때 단순히 생리를 안 한다고 임신으로 가정할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스트레스로도 생리는 얼마든지 지연될 수 있다. 생리가 지연되는 것이 99프로 확실하지만, 정확히 확인해서 불필요한 불안감을 거두고 싶었다. 결국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동네 약국에 갔다.     


지금이야 사십 대 중반이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전 같으면 ‘중년’이라 불렸다. 내 또래는 대다수 중고생 자녀가 있다. 방송에는 나와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젊은 배우들, 앳된 얼굴의 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방송에 등장하는 아이돌, 배우들의 나이와 내 나이 차이를 셈해보면 새삼 놀랄 때가 많다. 2-30대들의 언어와 감각에 적응이 안 된다. 어느 기업이 새로운 CEO를 뽑았다는 기사를 보면, CEO의 나이가 나보다 한두 살 적거나 비슷하다.


그렇게 나는 이제 사회적으로도 나이가 제법 있는 축에 속한다. 갱년기가 임박한 내가 임신테스트기를 사야 하다니, 생각할수록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온다. 임신을 기다리던 삼십 대 때 임신테스트기는 늘 나에게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 물건이다. 임테기를 살 일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임테기가 필요한 일이 생겼다. 그래도 임신을 확인하려는 기대감 같은 것은 이제 없다. 그런 기대감은 이제 물에 젖은 성냥처럼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그냥 임테기의 한 줄을 확인하고 홀가분하게 약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 집을 나설 때와 달리 이내 마음이 덤덤해진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 외출을 했더니 목이 칼칼하다. 먼지 탓인지 멀리 보이는 것들이 뿌옇게 보인다. 걸음을 걸을수록 머릿속은 잠잠해진다. 타이레놀을 사러 갈 때처럼 마음은 평범하다. 이제 임테기를 사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임테기는 이제 임신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임신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도구다. 내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던 작은 막대가 이제는 나를 안심시켜 줄 도구가 된다.


 오래전 나를 울게 했던 작고 흰 막대는 이제 내 마음속에 남았던 불안을 사라지게 해 준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도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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