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생신 날 온 가족이 모였다. 여동생이 예약해 놓은 장어집은 따로 방이 있는 깔끔한 집이었다. 한참 축하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아버지가 아내에게 "축하한다면서 술도 한잔 따르지 않냐?" 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때까지 한 사람도 술을 드리지 않았는데, 유독 아내를 지목해서 불만을 표했다. 평상시 쌓인 감정이 표출된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아내는 술과 상극인 집안 분위기에 자라나 술을 싫어한다. 술을 따르는 예절(?)도 알 턱이 없다. 반면 아버지는 술과 관련된 예절을 기준으로 됨됨이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매번 만날 때마다 그걸 지적하곤 했다. 그래서 아내는 아버지 만나러 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가기는 하지만 만날 때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곤욕스러워한다.
내가 결혼한 후 지속되던 장면이니까, 어언 삼십 년도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생신 날이었는데, 똑같은 모습이 재현되니까 황당했다. 아버지가 그러려니 하거나 아내가 먼저 행동하면 되는데, 항상 평행선이어서 내가 좌불안석이다. 나는 아내의 감정이 비단 술 따르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내만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권위를 세워왔다. 그리고 자식들은 어쩔수 없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권위가 유지될 수는 없다. 다른 분위기에서 자라난 며느리들이나 사위에게는 쉽게 수용될 수 없는 부담이었다. 급기야 자식들 부부 사이의 갈등요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문제가 되어있다.
이젠 자식들에 대한 강압적 통제를 통해 만들어졌던 권위는 힘을 잃었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집안 어른으로서의 권위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강압적 통제로 형성된 권위를 고수하려는 언행이 늘 문제의 출발점으로 작용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버지와 자식들과의 관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나는 어떠한가? 아버지의 권위적 모습을 닮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대로 시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움찔했었다. 지금은 아들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며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가까이 오기를 꺼려하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며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은연중에 보고 배운 것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생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불만에 찬 투정을 쏟아냈다. 아내의 입장을 이해는 하면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게 안타까웠다. 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독거 중인 아버지가 전 보다 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는게 신경이 쓰인다. 결국 생각이 미치는 것은 '아버지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방식에 변화를 줄 수는 없을까?', '아버지에게 지금 무엇으로 존재가치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시, '아버지의 마음'의 한 구절이다. 서글프다. 1960년대에 지어진 시라서 시대적 상황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부모 세대들이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을 견뎌 나오면서 자식들만큼은 더 잘 살게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아버지도 가난에 찌들었던 시기를 어렵게 어렵게 헤쳐나왔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버지는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 권위를 세워야 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을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옛날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가장으로서 권위마저, 늦가을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처럼 아슬아슬하다. 가끔이나마 인생사 궁금증을 해소해 주던 역할도, 인터넷 검색이라는 만능 키에게 밀려난 지 오래다. 오히려, 안이나 밖이나 상황이 더 서글퍼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족의 일상에 공존하지 못하고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부모세대는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할 시기를 이미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들의 존재와 권위를 쉽게 공감 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 세대들이 가장으로서 험난한 길을 버겁게 지켜오는 모습을 보아 왔다.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그들이 영예롭게 퇴장하는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 또한 권위를 세우는 일에 토달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정성을 기울여 존재가치를 느끼게 하고 싶다.
이미 평생을 살아오면서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권위의식을 바꾸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있다. 지난한 갈등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더 편할 듯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남았다는 안위거리를 내세워 부탁 아닌 부탁을 해 봐야겠다. 아버지가 존재감을 느끼게 만드는데 동참해달라고. 그리고 아들들에게도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 아버지가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