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와 '살아 보니'는 딱 한 글자만 차이가 있다. '다'와 '아'만 바뀌어 있다. 그런데 내게 다가오는 어감에는 엄청난 차이가 느껴진다. 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이다. '살다 보니'는 현재진행형이고, '살아보니'는 끝에 다다라서 지나온 것을 회상하는 분위기다. 그냥 살다가 불쑥불쑥 할 수 있는 말은 '살다 보니'이고, '살아보니'는 지금 내 위치에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처럼 무게가 있다. 왠지 '살아보니'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을 달관했을 것 같다. 단지 나이가 많다고 쓸 수 있는 말은 아니고, 세상풍파와 우여곡절을 현명하게 헤쳐 나오면서 정리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말로 여겨진다.
"아무리 운명이 뒤통수를 쳐서 살을 다 깎아먹고 뼈만 남는다 해도 울지 마라. 기본만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살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시간에 차라리 뼈나 제대로 추려라. 그게 살 길이다." 이 말은 이미 고인이 된 장 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저서에 있는 한 문장이다. 솔직히 나는 기묘한 비장감이 느껴지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회한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었다. 장영희 교수는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 송연하게 와닿았다. '살아보니'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가 되어 온갖 차별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다가, 세 차례의 암투병 끝에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지체 장애를 극복하며 삶을 개척해 나간 스토리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영문학자로서 모교인 서강대 강단에 서면서도 번역가, 산문가, 칼럼니스트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것은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인생궤적이다. 그녀는 암투병 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강단에 서면서 글을 써왔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세 번째 암투병 중에 완성한 것으로 사후에야 발간된 책이다. 이런 배경이 이 책에 실린 한 문장 한 구절에 진중함을 느끼게 만든다.
내가 장 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에 집중한 이유는, '살아보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죽음의 순간까지 담담하게 서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도 특히 '내가 살아보니까'라는 글에 주목했었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살다 보니'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보고 싶어서이다. 백수 생활로 접어들면서 구입했던 책이었는데, 큰 울림을 받은 것은 물론 나의 선택이 늘 틀리는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샤무엘 버틀러의 "잊히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어쩌면 사람들에게서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아보니까'라는 글 중에서 특히 관심을 가지고 주목했던 것은 두 대목이었다.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만의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지 못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괴감을 느끼고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는 비교의 늪에서 벗어나 '살다 보니'를 알차게 해줘야 한다. 비교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달성한 것에 대한 만족 시간이 짧다. 곧이어 비교해 보면서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자기 비하를 반복한다. 종국에는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리고 허탈감만 느끼게 된다. 행복을 느껴야 하는 시기에도 늘 허전함으로 불행을 떠올린다. 이제 인생 2막을 걸으면서 자존감을 살려가야 하는 시기, 번번이 비교의 늪에 빠져 자괴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평생현역의 장도를 가기 위해, 나의 어제와 오늘 만을 비교해 가며 정도를 걸어가련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돌이켜 보면, 알량하고 편협한 마음 때문에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다. 그땐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는가 후회해 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나의 '살다 보니'를 후회 없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관계를 맺은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기에, 나의 친절과 사랑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장 영희 교수는 '살아 보니 밑지는 적이 없다'라고 했지만, 좀 밑지면 어떠랴. 이제부터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고, 주는 것에만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친절과 사랑을 한 없이 주는 사람이, 결국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말을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