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어느 날, 아침부터 입주민의 민원이 줄을 잇는다.
민원 해결을 위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전하다가 한숨 쉬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 사무실인 관리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잠시 있자니 경리가 안 좋은 표정으로 와서 보일러 온수가 안 나오는 세대가 있으니 가서 봐달라고 한다.
내막은 모른 채 그냥 단순하게 온수가 안 나온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세대로 올라갔다.
세대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니 웬걸, 안에서 화를 못 참아 내는 짐승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들어서자마자 팬티바람에 서서 고함을 치기 시작한다.
“왜 온수가 안 나와요?, 이 추운 날 찬물로 샤워하는 기분 알아요?”
대답도 하기 전에 “여기는 뭐가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아요? 돈은 비싸게 받아 먹으면서.... 응!”
순식간에 연타를 맞고 정신이 얼얼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잠깐 사이에 이렇게 많은 짜증 섞인 고함소리를 듣는 것은 평생 처음일 듯싶다.
그 순간 기분은 형언할 수 없이 나빴지만, 근엄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저한테 소리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일단 진정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답을 하기 전에 보일러실 문을 열고 일전에 A/S 기사가 일러준 곳을 체크해 봤으나 이상이 없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A/S 접수를 하라고 했더니,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 거냐?, 관리하는 곳에서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하고 난리다.
다시 한번 근엄 모드로 돌아가서 “다른 세대도 이런 고장 많이 나는데 본인들이 A/S 접수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디다 해야 되는 거냐?, 당장 온수를 쓰지 못하는데, 언제 될지 알고 내가 A/S 접수를 해야 하느냐?”
이 대목에서는 근엄 모드가 살짝 풀려 나도언성이 높아졌다.
“다른 세대도 금방 와서 고쳤어요.”하면서 번호를 알려주었다.
A/S 접수되는 것을 보고 나중에 비번이나 알려달라고 한 후 내려왔다.
사무실로 내려오면서, 나보다 먼저 경리에게 화풀이를 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인기 개그맨이 개그프로에서 했던 멘트가 생각났다.
필경 '비싼 월세 내고 살고 있는데 너희들이 다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감정이 깔려 있어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이제까지 보일러 고장으로 민원을 제기했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태도를 보였다면 이해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언행은 이 경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었다.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해보고 안 되면 A/S 요청을 하라 권고했고, 모두들 순순히 따랐었다.
결국 두 시간도 안 되어서 A/S 기사 도착, 부속을 교체함으로써 상황은 종료되었다.
출근해 있던 입주민에게 전화해서 “수리 완료했고, 온수가 잘 나온다.”라고 했더니, 급 공손 모드로 “어쨌든,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후에 과정을 몰랐던 윗사람에게 이야기 하니 “그전에도 같은 언행을 보여준 적이 있어서 다 알고 있다.”라고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나도 기분이 태도가 된 적이 없었는가?’였다.
근본적인 문제해결과는 아무 상관없이 감정의 배설이 우선되는 태도 말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태도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치니 정말 끔찍했다.
우선 그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반성하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은 절대 기분이 태도가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좋은 말이라고 적어놓은 노트에 두 가지가 생각났다.
하나는 ‘인품이란, 일종의 습관이다,’이고, 두 번째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예의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였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습관이 모여서 인품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죽을 때까지 예의를 배워야 한다.
말은 소리로 드러내는 인격이자, 상대에게 던지는 무기이다.
그리고 어떤 산문에서 읽었던 “말은 사람의 입에서 왔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분명한 것은 분노를 드러내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겠지만, 당사자에게 가장 피해를 줄 것이다.
당장은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몰라도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것이니까.
직업과 신분에는 귀천이 없지만,
말투에는 귀천이 있다.
기분을 관리하면 인생이 관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