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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티기 Jun 08. 2023

데이트 폭력은 사소하지 않다

오월은 사흘간의 황금연휴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근무 특성상 연휴의 의미는 없지만, 공교롭게 두 번다 이틀을 근무해야 했다. 두 번째 연휴가 시작되는 날, 혼자 보낼 수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푸근한 마음으로 출근하였다. 


그런데 막상 출근해 보니 엘리베이터 하나가 고장 난 상태로 정지되어 있었고, 비가 계속 오는 것으로 예보되어 있어 누수 개소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라 마냥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어제 고장 신고가 되어 서비스 요원이 다녀갔으나 미결 상태여서, 곧바로 서비스 요원을 요청하여 고장수리를 시작하였다. 오늘따라 게스트룸에 건물주의 지인이 묵는다고 해서 이전 손님이 나가면 청소를 하기 위해 미화여사 한 명도 불려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윗사람 당부 있기도 해서 미화여사가 청소하고 난 뒤 청결상태를 확인하고, 건물주 지인도 성심성의껏 안내하느라 오전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오후에는 민원이 있었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하고 그나마 브런치의 내 서랍을 채우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짬밥 팔 개월째의 느낌상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연휴 첫날이라 그런가?


저녁 식사 후 음악을 들으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건물 외부 CCTV 화면에 경광등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이다. 혹시 몰라서 달려 나가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건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현장으로 가서 목격한 장면은, 경찰관 여러 명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입주민인 젊은 여자가 사지를 늘어뜨린 채 119 요원에 의해서 건물 내부로 옮겨지고 있었다. 119 요원이 약식으로 여자의 건강 체크를 하더니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마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한 듯, 곧바로 숙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경찰관을 통해서 데이트 폭력 사건이고 남자가 피해자로서 신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그래도 입주민이 아닌 한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다니고 있어서 의아해했었다. 


여자가 숙소로 옮겨지고 난 후, 남자는 로비에서 경찰관들과 조서를 작성했다. 조서 작성 중간에 입주민 여자로부터 남자친구에게 숙소로 올라와 이야기를 하자는 전화가 왔는데, 경찰관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야 되기 때문에 만나면 안 되니 귀가하셔야 한다."라고 하였다. 남자에 대한 조서 작성이 완료되자 모두들 건물 밖으로 나가면서 상황은 종료된 듯했다.


이십 분 후, CCTV를 보니 경찰관들이 통로에 보였다. 다시 쫓아나가니 여자의 숙소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계급이 높은 경찰관이 달려온 것을 보며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따라 올라가니 먼저 와있던 119 요원들에 의해 여자가 간이침대에 실려 이동되고 있었다. 여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팔, 다리와 옷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경찰관은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으나, 여자가 혼자 있는 시간에 자해를 했고, 전화를 받은 남자가 경찰에 재차 신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상황보고 준비를 해놓고 나니 시계는 밤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허탈했다. 그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쓸까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출근했었는데......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잔상에 남아있던 남자친구라는 사람의 떨떠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참고 참다가 경찰관에게 울먹거리면서 한 말도 생각났다. "피해자는 난데 왜 아무도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겁니까?"

그래서 CCTV를 되돌려 보았다. 폭력이 일어난 장소라고 했던 벤치 근처는 CCTV 사각지대여서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 웬걸 실제로 폭력이 일어난 장소는 벤치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고스란히 폭력 장면이 담겨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무분별한 폭력을 끝까지 참으면서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술기운도 있고 화를 다스리지 못한 듯, 제풀에 지쳐 비 오는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경찰관들과 119 요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평소에 관심 가질 일이 없었던 '데이트 폭력'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나니, 얼마 전까지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큰 아들 생각이 났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급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접근해 본 '데이트 폭력'은 명칭부터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교제 폭력'이라는 말과 혼용되고 있었다. 일부 언론에서 " '데이트 폭력' 대신 '교제 폭력'이라 쓰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교제 폭력'으로 사용할 것을 유도하였지만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분위기다.


나는 흔히 '데이트 폭력'이라 하면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 일도 그렇고, 데이터로 확인해 본 바로는 여성과 남성이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다만 강력사건으로 비화된 비율은 여성이 월등하게 많았다. 당연히 뉴스로 전파되는 사례가 많다 보니 피해자는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는 편견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이 피해자인 '데이트 폭력'이 피해가 심각하지 않고 경미한 폭력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풍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피해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데이트 폭력' 자체의 심각성에 집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우리 사회의 무관심한 단면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해 발의된 법안들이 본격적인 논의도 없이 2년 넘게 계류 중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특례법이 없다 보니 형법에 규정되어 있는 법률에 따라 고소를 해야 하는 문제점이 계속되고 있다. 법이 없어 피해자가 오히려 법 앞에서 약자가 되어 뒤로 숨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법 개정이 만능 해결책이 될 순 없다."면서 일선 경찰이 '피해자가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라는 관점에서 선제적인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경찰관들에게 책임을 떠 안기는 듯한 것이 진정한 대책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국회가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통해서 '데이트 폭력'은 만연하고 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인지했다. 서로 호감을 가지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한 남녀간의 교제가 불행한 결과를 남기고 이별해야 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별은 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는데, 이별의 상처가 너무 커서 새로운 시작 조차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이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정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법적인 정비를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벼운 문제로 취급되는 분위기를 일소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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